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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Apr 21. 2020

이게 다 '라 투레트' 때문이다

모든 것의 시작, 라 투레트 수도원

 결혼을 하고, 나는 가장이 되었다. 이제는 늘 두 사람이 함께니 무엇을 하더라도 혼자일 때 보단 어렵고 힘이 든다. 하물며 여행도 마찬가지다. 철없던 연애시절엔 하룻밤에 5유로짜리 호스텔에도 곧잘 묵곤 했었다. 하지만 일 년에 단 한번 부부가 함께하는 여름휴가에 그런 숙소를 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미리부터 세워보는 휴가 계획에는 비행기 값도 두 배, 식비도 두 배, 숙박비는 두배 플러스 알파로 계산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회사의 공식 여름휴가 기간은 주말을 합쳐도 단 6일이 전부였다.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우리 부부의 이번 휴가지는 멀리 가도 동남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난 올해 여름 꼭 '라 투레트'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말이야 쉽지만 프랑스까지 가려면 돈도 시간도 꽤 많이 들게 분명했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짧은 일정 중에 무려 이틀이나 비행기 안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것도 정말 바보 같았다. 하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쉽게 고치지 않는 나였다. 생각은 확고했다.


 학생 시절부터 도면과 사진을 통해 수도 없이 보아온 '라 투레트'였다. 그런 그곳을 여태껏 못 가봤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자책이 밀려들었던 것 같다. 늦었다고 생각됐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다. 그날로 나는 에어프랑스 티켓 두 장을 샀다. 무이자 할부 3개월로.


리용 IN - 니스 OUT, 나흘 안에 700km를 달려야 하는 고된 일정이다.


 일주일 안에 프랑스를 왕복하는 빡빡한 일정을 세웠다. 심지어 라투레트는 직항편도 없는 리용(Lyon) 근처에 있었다. 이왕 멀리까지 가기로 마음먹은 김에 니스 근교의 '르 토로네 수도원'도 여정에 넣었다. 계획을 세우면 세울수록 욕심도 커지는 건지 자꾸만 일정은 비현실적으로 늘어만 갔다. 고민 끝에 승선생님의 지혜를 조금만 빌리기로 했다. 선생님께선 이미 여러 차례 수도원 기행을 다녀오셨고 그때마다 가이드북을 손수 제작하셨다. 사무실 서고에 꽂혀있는 오래된 가이드북들을 꺼내어 두어 번 정독했다. 그중 꼭 가보고 싶은 장소만을 추려 나만의 일정표에 추가시켜 나갔다. 마지막으로 펜을 들어 모든 지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니 비로소 700여 km를 차로 달리는 고달프고도 벅찬 여정이 완성되었다. 참고한 페이지들만 따로 추려 제본을 하니 단 하나뿐인 나만의 가이드북도 한 권 생겼다.


 길눈이 어두운 아내를 대신해 여행 계획과 경로를 정하는 건 언제나 나의 임무였다. 떠나기 전에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서 인지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시큰둥한 편인 나다. 반면 아내는 예민한 감각과 풍성한 감수성으로 현장에서 더 생기가 넘치는 타입이다. 서로 상반된 성향에도 우리의 여행은 의외로 대 성공인 경우가 많았다. 출발을 앞둔 어느 날 저녁, 식사가 막 끝난 식탁 위에 완성된 여행 지도를 펼쳤다. 나는 신나게 침을 튀겨가며 시시콜콜 모든 계획을 아내에게 소상히 일러바쳤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는 이내 두 눈을 끔뻑거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표 이미 샀지? 그럼 됐어


 내가 세우는 여행 계획은 보통 지나치게 자세하고 빡빡한 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일을 대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그 절반도 다 못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여행 방식이 이제는 익숙해서인지 아내는 떠나기 전 나의 계획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견이 잘 없다. 아내 입에서 나오는 '됐다'라는 말은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종의 'OK' 사인인 셈이다.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출근만 해도 등줄기에 주르륵 땀이 흐르던 그해 초여름, 내 마음은 이미 지중해와 나란히 뻗은 A8번 고속도로 어딘가를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샤를 드골 국제공항 국내선 환승 터미널에 막 들어섰다. 감각적인 노출 콘크리트 벽체와 유리로 된 천장이 참 아름다웠지만 뜨거운 7월의 햇볕 때문에 어쩐지 후텁지근한 기분이다. 아내는 화장실에 들러 헛구역질을 하고 나왔다. 전날 밤을 꼴딱 새우고  열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파리에서 아내의 몸상태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번 여행의 출발지인 리용에는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다. 걱정스러운 마음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국내선 환승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내 아내의 손을 끌어당겼다. 늦지 않으려면 지금 뛰어야 한다.


국내선으로 환승하며 잠시 스쳐 지났던 파리의 청명한 하늘
인상적인 구조의 2F 터미널에서 리용행 국내선으로 갈아탔다.
다시 시작된 비행, 이번 휴가는 시작부터 쉽지 않다.


 이게 다 라 투레트 때문이다. 애초에 이번 휴가를 계획한 이유부터가 라 투레트를 보기 위해서였고, 긴 비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국내선을 한 시간이나 더 타야 했던 것도 라 투레트가 파리보다는 리용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비행기 좌석에 앉았고 정시에 파리를 출발한 비행기는 금세 리용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장을 나와 미리 예약해둔 렌터카를 수령하고 공항 근처의 이비스 호텔에 들어서니 이미 저녁때가 훌쩍 넘었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 뻗어버렸다. 내일 아침엔 아내 몸이 꼭 괜찮았으면 좋겠다. 그보단, 아내가 라 투레트를 꼭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공항에서 가까워 편리했던 숙소, 쓰러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먼길 떠나기 전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도 아내는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했다. 간단히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겨 차에 올랐다. 어제 리용 공항 근처에서 빌린 차는 주행거리가 막 1000km를 넘어선 신형 지프 레니게이드였다. 이번 휴가는 대부분을 차로 움직여야 하는 만큼 차량의 성능도 성패의 중요한 변수였다. 나는 운 좋게도 지불한 금액보다 한 등급 높은 차를 받았고 잠시 몰아본 느낌으로는 승차감도 나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 검색창에 '라 투레트'를 적어 넣었다. 이번 휴가의  궁극적인 목적지이자 모든 일정의 시작점, 라 투레트로 출발했다. 벅찬 순간이었다.


라 투레트로 가는 길, 흥겨운 샹송 메들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운다.


 리용 시내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묵었던 호텔과 라 투레트는 서로 동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이폰과도 연동되는 제법 똑똑한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시내를 우회하는 외곽 도로로 안내했다. 처음 몰아보는 차종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내 차인 것처럼 금세 적응해버렸다.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주변 풍경으로 눈을 돌리자 비로소 휴가가 시작되었음이 느껴졌다. 아내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프랑스에선 프랑스 노래를 들어야 한다며 아내는 유튜브로 샹송을 틀었다. 이름 모를 노래들을 들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키가 큰 가로수들이 양 옆으로 빼곡히 들어선 오솔길 위에서 내비게이션은 안내를 멈췄다. 아직 라 투레트는 보이질 않는다.


남쪽으로 곧게 뻗은 오솔길, 라 투레트의 진입로다.
드디어 만났다, 내 너를 보러 이 먼길을 달려왔다.


 엔진이 꺼지고 흥겨운 음악도 멈췄다. 이내 주위는 이내 적막으로 가득해졌다. 보이는 것이라곤 멀리 들판과 파란 하늘이 전부였지만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차에서 내리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 남쪽을 향해 곧게 뻗은 오솔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자 라 투레트의 북측면이 자태를 드러냈다.


 아, 드디어 만났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반가웠고, 상상했던 것보단 작고 아담한 크기였다. 매일같이 도면과 스케일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종이를 통해 보는 것과 눈 앞에 맞닥뜨리는 것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존재했다. 진실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 승선생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문구가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꼭 표지판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라 투레트의 문지기, 잉카와의 첫 만남!


 라 투레트의 매표소에는 '잉카'라는 이름의 귀여운 강아지가 있다. 시크하면서도 매력적인 외모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예정된 가이드 투어 시간이 되었다. 참여자는 우리 부부와 독일인 커플, 그리고 미국인 아저씨 한 명까지 총 다섯 명이었다. 안내를 맡은 프랑스인 젊은이는 건축을 전공한 학생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 위대한 건축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 보니 모두들 직간접적으로 건축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가이드는 이번 투어의 수준을 조금 올려도 되겠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 투레트의 부분들


 투어는 매표소에서부터 시작하여 응접실과 기도실, 식당을 돌아 회랑을 거쳐 채플과 지하 예배당까지 건물 전체를 한 바퀴 크게 돌며 진행됐다. 가장 궁금했던 수도사의 방은 아쉽게도 숙박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가이드는 축소 모형을 통해 방 내부 구조와 설계 의도를 설명해 주었다. 1인 1실로 계획된 각각의 방은 한 명의 수도사가 생활하는 공간 크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일행이 있어도 숙박은 무조건 한 사람당 한 방을 써야 한다. 우리 부부처럼 밤낮으로 붙어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겐 조금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이미 두 달도 전에 모든 방은 매진이었다. 다음에 다시 이 곳을 찾는다면 그때는 꼭 하룻밤을 묵어 보리라 기약했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


 라 투레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지만 담대했고, 자유분방하지만 조화로웠고, 거칠지만 따뜻했다. 부분을 면밀히 살펴보면 크고 작은 요소들이 정신없게 섞여있어 보이지만 또 멀리서 보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전체 그 자체였다. 익히 보고 들어 잘 알고 있던 부분들은 정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또한 반가웠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들도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불쑥 튀어나와 감상하는 즐거움을 더했다. 


 승 선생께선 지금까지 이곳에 열 번 정도 다녀가셨다고 했다. 회랑을 천천히 혼자 거닐며, 그동안 내가 그려온 혹은 보아온 건축이 왜 그래야만 했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멀리 언덕 아래를 바라보며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에 아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서 카메라 뷰파인더에 깊숙이 빠져 홀린 듯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내는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보여주는 건축에 대한 냉철하고 뛰어난 직관으로 나를 놀라게 할 때가 있다. 휴가에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잠자리에 들기 전 종종 라 투레트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한다. 라 투레트로의 여행을 계획한 장본인으로서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다.


도착 예정시간 17시 15분, 현재 외부 기온 40도
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출발, 도로 왼편으로 Confluence Museum이 보인다.


 더 머물고 싶지만 오늘은 마음이 급하다. 오늘은 나흘간의 일정 중 가장 이동거리가 긴 날이다. 라 투레트 근처 작은 마을에 들러 식사를 한 뒤 곧바로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로 출발했다. 벌써부터 햇볕에 뜨거워진 차에 올라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속도계 바늘은 시속 100km를 돌파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은 평온했다. 새 차의 승차감이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라 투레를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둘 다 였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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