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프랑스다운 하루,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리용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마르세유까지 이어지는 A7번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이대로 서너 시간 정도 계속 달리면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 도착한다. 그러고 보니 외국에서 운전하는 게 벌써 인도, 미국, 이탈리아에 이어 네 번째다. 자동차가 네 바퀴로 굴러가는 이치야 만국 공통이지만 그럼에도 나라마다 특유의 운전문화라는 게 있어 매번 긴장하곤 한다. 괜스레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려오는 까닭이다.
어느새 리용에서 꽤 멀어지고 이정표에 아비뇽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즈음부터 운전이 한결 편안해졌다. 프랑스의 운전자들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선 120, 130킬로미터까지 시원스럽게 내 달린다. 나 역시 추월차로를 넘나들며 지중해를 향해 엑셀을 힘껏 밟았다. 초반 한 두 개 정도 못 보고 지나친 과속카메라 말고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주행이었다고 자평해본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집으로 날아온 과속 딱지 같은 건 없었다.
이번 휴가 일정에선 라 투레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방문지가 남부의 프로방스(Provence)와 코트 다 쥐르(Côte d'Azur) 지역에 몰려있다. 때문에 중부의 리용과 남부 여행지들을 한 번에 돌아보려면 오늘 중 최대한 많은 거리를 움직여둬야만 했다. 특히나 그날 우리가 생 레미에서 묵을 숙소에는 멋진 정원과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만 도착하면 그래도 여유 있게 물놀이도 하고 일광욕도 즐겨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목적지까진 한 시간도 더 남았지만 아내는 벌써부터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수영복을 입을지 고민 중이다. 무려 수영복만 세 벌을 챙겨 오셨단다. 빡빡한 시간계획과 건축 답사 일색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행을 '휴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마 그날 우리에게 허락된 단 하루의 여유가 있었던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못되어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프로방스의 태양은 아직 머리 위에서 작렬하고 있었다. 구글 지도로 미리 위치를 확인해둔 우리의 숙소는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으로 온통 비슷한 집들 천지인 덕분에 두어 번 정도 주위를 맴돈 끝에야 겨우 대문을 찾았다. 벨을 누르자 이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차를 타고 다시 백여 미터를 더 들어가니 진짜 대문이 한 번 더 나온다.
'헬로', '익스큐즈미' 아무리 외쳐봐도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잔디를 깎고 계신 주인아저씨는 묵묵부답이다. 아마도 기계 소리가 너무 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한국말로 '아저쒸!!!' 하고 시원하게 외치자 그제야 우릴 보고 환하게 웃으셨다. 얼른 수영장에 풍덩 하고 뛰어들고픈 아내의 간절함이 주인아저씨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정갈하게 잘 가꿔진 정원과 꽃나무들이 제일 먼저 우릴 반겼다. 우리의 호스트인 노부부는 결혼하고부터 쭉 이 집에 살아왔다고 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생 레미와 이 집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묻어나는 게 느껴졌다. 장성한 자식들이 독립한 이후로 취미 삼아 B&B를 시작했고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사랑채를 따로 지어 하루에 딱 두 팀만 받고 있다고 했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게스트에게 생 레미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이 취미이자 낙이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한창 짐을 풀고 있는데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다가와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늦둥이 막내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친구 BTS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얼마 전 프랑스에선 최초로 파리에서 열린 콘서트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광팬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인사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노래 한 소절이라도 불러주고픈 마음을 꾹 참았다. 아가 놀랄라...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돌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불어 들어온 실바람에서 물 냄새를 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내와 나는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채 10m가 안되어 보이는 작은 풀이었지만 크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이곳엔 우리 둘 밖에 없다.
첨벙. 네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운전한 피로가 일순간에 가신다. 막 수영에 재미를 붙여가던 아내는 나보다 더 신이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이다.
썬베드에 몸을 뉘여도 본다. 코끝에 걸친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문자 그대로 그림 같았다. 미리 챙겨 온 컵라면을 하나 가방에서 꺼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수영하고 먹는 컵라면이 얼마나 꿀맛인지는 먹어본 사람만이 알 지어다.
옆 방의 유일한 이웃 손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미국에서 홀로 온 아주머니셨다. 벌써 일주일째 휴가를 즐기는 중이라는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유유히 풍경을 즐기며 독서를 즐기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여행하며 외국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한국의 여름휴가가 유난히도 짧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나의 이번 휴가 또한 짧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이 작은 도시에선 시간이 참 느리고, 평화롭고, 아름답게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내일 아침엔 근처의 생폴 드 모졸 수도원을 찾을 생각이다. 반 고흐가 귀를 자르고 1년간 입원했던 정신병원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곳 생 레미 드 프로방스는 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폴 세잔, 에곤 쉴레, 에밀 졸라도 모두 프로방스 지역과 인연이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찾았고, 사랑했고, 그렸다. 물에 젖은 몸을 뉘이고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태양에 몸을 뽀송하게 말리고 있자니 마음마저 평온해진다. 왜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사랑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늘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생 레미의 도심으로 향했다. 아담한 크기의 도심은 전형적인 중세 성곽도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지도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골목길을 거닐다 보니 어느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쳐 지났던 몇몇 식당 중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던 이탈리아 식당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리뷰를 검색해가며 이성적으로 식당을 골랐을 나였다. 하지만 왠지 이 작은 도시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먹물 파스타와 계란 노른자를 올린 피자를 시켰다. 다행히 나의 직감이 통했던 모양인지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이탈리아 요리보다 더 맛이 좋았다. 내친김에 글라스 와인까지 한 잔 곁들였다. 조금씩 취기가 오를 때마다 우리의 이야기도 함께 여물어 갔다. 그렇게 생 레미의 어느 골목 어귀에서, 오래도록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