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만든 건축과 도시, 세낭크 수도원과 고흐드
건축하는 일은 곧 땅에 대한 존중과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설계 작업은 으레 그 땅을 직접 찾아가 두 발로 걸으며, 두 눈으로 면밀하게 살피는 일로 시작된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연필을 쥐기 전부터 건축가의 사유라는 것이 이미 시작되는 까닭이다.
내가 건축에 매력을 느끼는 건 자연과 인간이 서로 밀고 당기며 균형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지경계라는 가상의 선을 땅 위에서 찾아내고 이를 기준으로 집의 향과 배치를 결정하는 일부터가 당장 그렇다. 더욱이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되면 중력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대 자연의 힘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여야 하며, 건물이 높아지면 질수록 바람과도 싸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공사가 시작되면 더욱 힘겨운 과정의 연속이다. 땅을 파고, 메우고, 벽을 세우고, 붙이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자연을 극복하거나, 혹은 자연과 타협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일들이다.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도 멋진 일이 건축이라는 믿음은 학생 시절이나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지금이나 그 생각이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프로방스에서 동쪽으로 산중 깊숙한 골짜기 한가운데에 세낭크 수도원이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제법 많이 찾는 여행지가 되었는데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만발하는 보랏빛 라벤더 밭이 이곳의 백미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던 7월 말엔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렸을 시점이니 내가 이곳을 찾은 게 꽃 때문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앞서 방문했던 현대식 수도원인 '라 투레트'나 병원으로 사용주인 '생폴 드 모졸'이 아니라 진짜 수도원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건축'이라는 것이 땅, 혹은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했다. 프랑스의 몽셍 미셀이나 그랑 샤르트뢰즈, 스페인의 몬세라트, 아니면 그리스의 메테오라 수도원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수도원은 곧 스스로를 추방시킴으로써 완성된 건축이다. 감히 그곳으로 찾아가는 과정부터가 수도원이라는 건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터였다.
V자 형태의 가파른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높다란 산등성이 두 개가 나란히 뻗어있다. 그 골짜기 가장 낮은 곳에 세낭크 수도원과 라벤더 밭이 들어서 있다. 한눈에 보아도 산 정상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지지 않는 한 도달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오지였다. 생 레미에서부터 차를 타고 가면 두 산등성이 중 한 곳의 위쪽부터 아래로 좁은 길을 따라 접근하게 된다. 잠시 차를 세우고 그저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과연 절경이었다. 길도 좁고 험한 데다 자꾸만 창밖 풍경에 이끌려 속도를 줄이게 되니 자연히 마음부터 차분해진다.
수도원과 라벤더 밭 사이에 마련된 주차장에 도착했다. 고갯길에서 굉음을 내뿜던 엔진마저 잠잠해지고 나니 이내 아득한 적막이 밀려온다. 방금 전 위에서 내려다본 두 개의 산등성이가 소리를 막는 역할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먼저 온 여행객들의 들뜬 목소리도 자연이 만드는 고요 앞에선 한낮 잡음에 불과했다. 속세로부터 오는 소리마저 이 골짜기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수도원 내부는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위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라벤더로 유명한 곳이라 각종 라벤더를 이용한 상품들이 한가득인데 모두들 쇼핑하느라 정신이 없다. 예전에는 수도사들의 생계유지 수단의 하나로 이곳에서 난 라벤더를 가지고 기름이나 향수 따위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판매되는 제품들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공장제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동일한 제품을 프랑스 공항 면세점에서도 팔고 있으니 혹시라도 라벤더 때문에 이곳을 찾을 계획이라면 쇼핑은 계획에서 빼도 좋겠다.
세낭크를 빠져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고흐드로 향했다. 애초에 목적지로 삼지는 않았던 곳인데 소위 '예쁜 마을'로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라고 해서 한번 들러보기로 했다. 산 능선을 여러 개 차례로 넘다 보니 주변으로 굉장히 고급스러운 개인 별장들과 숙박시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제법 시원한 걸로 미루어볼 때 고도가 높은 고흐드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한 시설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매 날씨가 좋고 바다가 지천인 지중해 주변 사람들은 여름휴가를 도리어 산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회전 한번, 좌회전 한번, 다시 우회전 한번. 순간 앞을 주시하던 나의 오른쪽 시야에 뭔가가 훅 하고 들어왔다. 고흐드였다. 가파른 돌산 하나 전체가 그대로 건축이자 도시가 된 기이한 모습이었다. 도시 곳곳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하게 뻗쳐 있어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만화적 상상력마저 자극했다. 세낭크에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감동을 느꼈었다면, 여기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바라다보며 느끼는 감동이 있었다. 아내는 조수석에서 창에 얼굴을 딱 붙이고 눈을 뗼 줄을 모른다. 나에게도 처음 마주한 고흐드의 자태는 경이로움, 혹은 신비로움에 가까울 정도였다.
마을 입구의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지중해식 요릿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카프레제 샐러드에 들어간 모차렐라 치즈가 정말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산책도 하고, 중앙광장 근처 작은 미술관에 들어가 전시도 관람했다. 멀리서 보았던 압도적인 풍경과는 또 반대로 골목 구석구석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평범한 마을이라 더욱 좋았다.
윈스턴 처칠은 '인간은 건축을 만들고, 그 건축은 인간을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에 앞서 건축을 만드는 건 자연이다. 세낭크와 고흐드는 모두 '거기에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축'이다. 어쩌면 인간은 그저 자연 앞에서 주어진 소명대로 건축을 완수하는 역할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가끔 건축하며 자연과 대립해야 할 순간순간마다 세낭크에서, 고흐드에서의 마주했던 장면을 떠올려보리라. 자연 앞에서 겸손할 때 비로소 좋은 건축이 만들어지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