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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Sep 10. 2020

다시 유럽에 갈 수 있을까?

밀라노, D-4 2015.0720.2100

 ‘다시 유럽에 올 수 있을까?’ 스무 살, 유럽으로의 첫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푼돈에 부모님의 지원금까지 보태어 무리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물론 여행지로서의 유럽은 충분히 멋지고 좋은 곳이었지만 그만큼 과분했다. 그곳에서 한 달간 수없이 마주했던 감동들은 마치 손 틈새로 새어나가는 모래알과 같아 다시는 쥐기 힘들 것만 같았다. 인생이 충분히 길다는걸 채 다 알지 못했던 그때, 나는 유럽에 다시는 오지 못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나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고 다시 유럽 땅을 밟았다. 생각보다 빠른 재회였다. 하지만 아직 학생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 여기고 매 순간을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다. 무사히 학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건, 코로나로 전 세계 국경이 닫혀버린 요즘, 매일같이 되뇌어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시 유럽에 갈 수 있을까?'


밀라노 대성당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그렇게 영영 마지막일 줄만 알았던 유럽과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이어졌다. 밀라노로 출장이 결정된 것이다. 입사한 지 3년 차, 갓 신입 티를 벗어내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밀라노에서 내가 하게 될 일은 '2015 광주 디자인비엔날레'를 홍보하는 전시공간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당시 밀라노에서 한창 치러지던 엑스포 기간에 맞추어 해외 홍보전을 개최하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엔 그저 도면만 그리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밀라노 현장에 직접 가서 설계대로 시공이 잘 이루어지는지 감독까지 해야 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밀라노 한복판에 이런 전시공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당시 나는 첫 직장으로 건축사사무소에 입사하여 한창 '현상설계', '마스터플랜' 같은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상설계'는 당선되지 않는 한 지어질 수 없는 그림에 불과했고, '마스터플랜'은 설계(design)라기 보단 계획(planning)에 가까운 일이니 어쩐지 실체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건축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으니 땅 위에 뭐라도 지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때까지도 나의 작업들은 어쩐지 구름 위에 동동 떠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전시설계를 맡게 된 것이었다. 꼭 건축설계만이 정답은 아님에도 처음엔 조금 실망스러운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생사는 새옹지마고 모든 일은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그때 처음으로 전시설계를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여섯 번의 전시를 더 치러냈다. '건축설계'가 본업이긴 해도 나름 재미있는 경력이 하나 추가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전시가 열리는 장소를 따라 이탈리아, 일본, 브라질 등 다양한 곳으로 출장을 다니는 행운도 누렸다. 결국 이 모든 경험들이 재료가 되어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내 경력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고마운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출장가방'은 '여행가방'보다 늘 더 무겁다. 부담감과 책임감의 무게였다고 해두자.


 인천에서 밀라노까지 가는 출장길은 말 그대로 흥분의 연속이었다. 사무실 문밖으로 나와 만끽하는 자유로움 같은 것도 좋았고, 아직 사원임에도 무려 유럽까지 단독 출장을 간다는데에 조금 우쭐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무려 대한항공 직항 편이었다. 학생 시절에 곧잘 외국의 이름 모를 공항 차가운 바닥에서 열 시간씩 노숙하던 것에 비하면 비단길도 이런 비단길이 없었다.


 밀라노행 출국 게이트에 서있는 사람들은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커플이거나 어린아이 손을 잡은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한껏 신나고 편안한 복장인 가운데 나만 혼자 정장 바지에 셔츠, 구두까지 갖춘 어색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에 차림이 불편할게 분명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중이니깐!


무사히, 아프지 않고, 다친곳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부터가 출장 업무의 시작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선 4년 차부터 '대리'가 된다. 대리는 '과장대리'의 준말로 과장이 부재중이어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원'인 나에겐 아직 그런 능력이 없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는 회사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시점에서 갑자기 혼자 출장을 나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부담감이 상당했던 것 같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옷차림 또한 스스로 몸과 마음가짐을 똑바르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결과였으리라.


 그렇지만 '사원'은 그만큼 모험심 또한 강하다. 7월의 끝자락, 일주일의 출장 일정 뒤에 나는 당당히 여름휴가 일주일을 더 붙였다. 어차피 오고 가는 비행기는 정해져 있으니 날짜만 붙이면 무려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계산이었다. 한편으로 걱정도 됐다. 만약 출장 가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다치기라도 한다면? 회사에는 뭐라고 말하지? 산재처리인 건가?... 어쨌거나 비행기는 무사히 밀라노에 도착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출장 내내 지내게 될 소중한 나만의 공간


 유럽이 이렇게나 가까웠던가. 처음 타본 직항 편은 모든 면에서 편안하고 좋았다. 말펜사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밀라노 센트럴 역으로, 다시 기차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서야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다. 회사에서는 하룻밤 10만 원 내외 금액에서 자유롭게 호텔을 예약해도 좋다고 일러주었다. 출국 전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한 곳을 골랐다. 이 호텔의 장점은 싱글룸이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동일한 가격 더블룸에 비해 별 반 개정도 더 붙은 좋은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전시장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까워 언제든 현장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위치 선정 또한 기본적으로 고려했다.


호텔에 늦은 체크인을 마치고 가까운 식당부터 찾았다.
혼자 먹는 식사지만, 제대로 근사하게!


 밀라노에 늦은 오후에 도착한 탓에 어느새 저녁시간이 훌쩍 지났다. 숙소에서 가까운 이탈리안 레스토랑 중 trip advisor에서 가장 평점이 높은 음식점을 찾아갔다. 당장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질 테니 미리 충분히 맛있고, 여유 있는 한 끼를 즐기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실하게 말이다.


 종업원을 불러 이 집에서 가장 자신 있고 특색 있는 메뉴가 뭔지 물어보고 그걸 시켰다. 본격적인 업무 시작도 전에 술부터 마시는 게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구색은 맞춰야 하니 글라스 와인도 한잔 시켰다. 큼직한 접시에 담겨 나온 고르곤졸라 치즈를 곁들인 그린빈 오일 파스타는 꽤 특색 있으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생각보다 비싼 한 끼였지만 회사에서 출장 식대 기준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어 흔쾌히 결제했다. 출정을 앞둔 나의 사기를 위해 꼭 필요한 경비였노라 스스로 타협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다시... 유럽에 왔구나!


 밀라노의 밤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한 풍경에 어쩐지 울컥했다. 돌이켜보면 건축사사무소에서의 첫 3년은 그야말로 전쟁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건 업종을 불문하고 사회 초년생들이 으레 다 겪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시간을 자면 다음날 살짝 졸린 정도고, 4시간을 자면 푹 잤다 할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 홀로 유럽 한복판에 툭 하고 떨어지게 된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취직하면 여행이고 여가고 모든 것이 단절될 거란 각오를 하고 시작한 사회생활이었다. 그런 나에게, 눈 앞에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은 '너 지금 잘하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날들만 있을 거다'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느껴졌다.


 내일 동트기 전 새벽같이 전시품들이 입고된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시간 맞춰 나가 보겠다고 답장하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제야 저녁에 마신 와인의 취기가 온몸을 감돈다. 일곱 시간의 시차 따위야 아직 가뿐하다고 온몸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이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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