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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Sep 10. 2020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밀라노, D-2 2015.0722.1300

 나에게 있어 출장지에서의 한 끼 식사란 언제나 ‘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 이상의 의미였다. 한 그릇의 음식은 낯선 도시를 탐험하는 체력의 원천이자, 타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위로가 되기도 하며, 새로운 정보와 문화를 습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먼길을 떠나기 전, 일에 대한 설렘만큼이나 먹게 될 음식에 대한 기대감 또한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게다.


 지치지 않는 체력은 출장에서 최고의 덕목이다. 특히나 지난 밀라노에서 처럼 현장 업무가 수반되는 경우엔 더욱 그랬다. 예정에 없었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의외로 빠른 판단력보다는 체력이었다. 그러니 출장 중에는 입맛이 없어도 삼시세끼 일부러 잘 챙겨 먹어야만 한다.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한 끼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면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이겨낼 자신이 생기곤 했다.


 환경에 익숙해지면 일의 능률도 오른다. 출장지에선 자신을 얼마나 빨리 적응시킬 수 있는지에 일의 성패가 달렸다. 종종 외국에 다니다 보면 내 몸 어딘가에 '모드(mode)' 스위치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무언가에 의해 그 스위치가 켜져야만 비로소 생각도, 감정도, 언어도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한 끼의 식사는 나만의 스위치를 ‘ON’하는 가장 쉽고,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한 접시의 음식 안에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현지의 기후와 풍토가 물씬 배어있는 원재료를, 그 지역만의 독특한 전통과 식습관이 반영된 조리법으로, 새로운 언어와 사람들로 가득한 식당에서 맛보게 되는 총체적인 행위가 바로 '식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까지 와서 와퍼 세트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침 이번 출장지는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 중 미식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탈리아'였다. 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창한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출장기간 동안 맛보게 될 다양한 음식들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어디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는가. 놀랍게도 그곳에서 나의 공식적인 첫 끼니는 '버거킹 와퍼 세트' 였으니 말이다. 작업 첫날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 탓에 감독자인 내가 도통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포장된 햄버거를 받아 들게 되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아 다 식어 딱딱해진 미국식 햄버거를 김 빠진 콜라와 우물거리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먹다가는 의욕도, 체력도 다 바닥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출장에도 의욕적으로 매 끼니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여긴 이탈리아니까 일단은 피자부터...
... 가게 안으로 들어갈 기운이 없어 야외에 앉았다.


피자(Pizza)


 이탈리아 출장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단연 피자였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홀로 미술관을 빠져나와 무작정 근처의 번화가로 향했다. 호텔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크고 작은 피자집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야외 테이블이 비어있는 곳에 적당히 앉았다. 첫날이라 긴장할 대로 긴장한 데에다 점심도 부실했던 탓인지 식당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힘조차 없었다.


정통 이탈리아 스타일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었던 첫 번째 피자


 둘이 먹어도 충분할 것 같은 크기의 피자였다. 주방장의 손맛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수제 도우 위에 옥수수와 햄이 토핑으로 올려진 것도 인상적이었다. 맥주는 특별히 '이 지역의 것(Local)'으로 부탁했는데 'Tuborg'라는 처음 보는 브랜드를 받았다. 당연히 밀라노 맥주겠거니 하고 마셨건만 나중에 찾아보니 브랜드는 덴마크, 공장은 터키에 있는 다국적(?) 맥주였다. 아마도 식당 주인이 덴마크 혹은 터키 출신의 이민자였던 모양이다.


 한 조각도 남김없이 맛있게 해치웠다. 하지만 어쩐지 이탈리아만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 한 끼였다.


다시 맛 본 진짜 이탈리아 피자, 마르게리타


마르게리타(Margherita)


 이튿날 다른 피자집을 또 찾았다. 이번엔 미리 알아보고 정통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을 골랐다. 만약 이탈리아에서 딱 한판의 피자만을 맛볼 수 있다면 나의 선택은 단연코 마르게리타(Margherita)다. 오직 바질, 모차렐라 치즈, 토마토소스 만을 올린 가장 본질적인 피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원류는 나폴리지만 밀라노에서 맛보는 마르게리타 또한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노릇하기 구워진 표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출장의 피로를 잊기에 충분했다.


재료의 신선함으로 승부하는 요리, 카프레제


카프레제(Insalata Caprese)


 이미 전 세계인의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피자와 파스타는 한국에도 잘하는 집이 꽤 많다. 하지만 ‘카프레제’ 만큼은 꼭 한번 현지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불을 쓰지 않기에 원물의 신선함과 풍미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이런 요리야말로 현지에서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카프레제 또한 피자만큼 맛있었다. 사실 카프레제의 재료들을 도우 위에 올려서 구운 것이 마르게리타다. 피자가 맛있는 집은 카프레제도 맛있고, 카프레제가 맛있는 집은 피자 또한 맛있는 까닭이다.


일종의 이탈리아식 감자 수제비, 뇨끼

파스타(Pasta)


 파스타란 밀가루와 계란을 주 재료로 하는 이탈리아식 면 요리를 통칭한다. 다만 우리나라 한정으로 이 파스타와 스파게티(spaghetti)가 동의어처럼 쓰이긴 하지만, 실제 그 종류는 면의 길이, 모양, 재료, 형태, 지역 등에 따라 셀 수 없이 많다.


 피자를 선택할 때는 정도(正道)를 걸었지만 왠지 파스타만큼은 모험을 좀 해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가장 먹기 어려운 게 뭐가 있을까 고민 끝에 뇨끼(Gnnochi)를 주문했다. 뇨끼는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의 두툼한 숏파스타로 감자와 치즈와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다. 밀가루가 주 재료인 일반적 파스타에 비해 감자 전분에 의한 쫄깃함이 더하고 치즈의 풍미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샐러드처럼 보이는 냉파스타, 제멜리


 조금 더 특이한 것도 맛봤다. 정확한 메뉴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모양으로 볼 때 제멜리(Gemelli)로 추정된다. 제멜리는 이탈리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꽈배기 빵처럼 한 가닥을 꼬아 만든 숏파스타다. 요철이 있는 모양 탓에 포크로 잡아 올릴 때 소스가 많이 묻는다는 특징이 있다. 샐러드로도 먹는 푸질리(Fusilli)와 비슷한 모양 때문인지 신선한 야채와 함께 차가운 파스타로 서빙되고 있었다.


커피 없는 출장을 상상할 수 있을까?


커피(caffè)


 식사가 체력의 총량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커피는 그 체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에 관여한다. 출장지에선 으레 짧은 시간 동안 집중력을 발휘하여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만큼 나에게 있어 커피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탈리아에선 커피(카페)를 시키면 에스프레소를 내주고, 라테를 시키면 스팀으로 데운 우유 한잔만이 나온다. 커피가 곧 '아메리카노'고 라테가 곧 '카페라테'인 우리나라 문화는 이탈리아보단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생기는 차이다. 의자 없는 높은 테이블에 기대어 진한 에스프레소 도피오(dopio, 샷 두 개를 넣은 것)에 각설탕을 푹 담그고는 시원하게 원 샷한 뒤 동전 몇 푼 컵받침에 올려놓고 유유히 사라지는 게 이곳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다. 지금도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 나의 커피 습관은 어쩌면 이때의 출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와서 젤라토를 빼놓으면 섭섭하지
초코맛 종류만 여섯 가지다, 여긴 천국임이 분명하다!


젤라토 (Gelato)


 얼마 전 사람들과 대화 중에 '배스킨 라빈스'에 가면 주로 뭘 시키는지 이야기가 나왔다. 의견을 종합해보니 극명하게 두 파로 갈리는데 한쪽은 '레인보우샤베트'나 '애플민트' 같은 셔벗(sherbet) 계열을 더 좋아했고 다른 한쪽은 '아몬드봉봉', '엄마는외계인'처럼 유지방이 많이 함유된 '아이스밀크'나 '아이스크림'을 선호했다. 나는 후자에 가까우며 특히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이는 가장 기본인 메뉴일수록 맛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이런 나의 기대에 부흥하기라도 하듯, 출장지에서 찾아간 젤라토(gelato) 전문점에는 초코맛만 무려 여섯 가지를 구비하고 있었다. 이미 다양한 음식들을 열심히 맛보느라 빈틈없이 꽉 차 버린 배였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두 가지 맛을 골라 찰나의 행복을 즐겼다.


결국, 먹는 게 남는 거다!


 피자와 파스타에서부터 커피, 젤라토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당을 누비며 열심히 먹어댄 덕분에 출장 내내 나의 몸상태는 최상을 유지했다. 맡은 바 임무 또한 기분 좋게 완수할 수 있었다. 이때 얻은 '잘 먹어야 한다'는 교훈은 이후 중국, 일본, 브라질까지 계속되는 출장에서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겨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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