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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키 Apr 27. 2020

존재 의의 찾기라는 우주적 혼란 속에서

사람을 믿지 말자, '으른들'을 믿지 말자는 말의 생명력이 생각보다 길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어린애 투정 같은 말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니!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어른이지만 그 어른을 아주 예전과 같이 철석같이 믿고 따르며 본받아 성장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지속된다. 그건 그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예전처럼 안정적이고 확고한 지표를 기준으로 삼아 시대의 변화를 논하기에는 여러 갈래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시대의 조류가 너무나도 빠르고 거센 탓이 아닐까. 계속 이딴 말들로 (사실은 스스로조차 믿지 않는) 자기 위안을 삼아는 보지만 그건 마치 이길 수 없을 술로 자신의 숨길 수 없는 우울을 숨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다. 답이 아니다.


거창한 시대적 소명, 혹은 개인으로서의 소명 따위를 물어야 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개인적으론 생각은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사소한, 내가 좋고 내가 옳다고 믿는 '소품'과도 같은 현실마저도 하나의 좋은 사례(case)로써 매우 작은 사회적 가치나 의미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란 회의적인 생각도 점점 강해진다. 그렇다면 남게 되는 존재의 이유를 묻기 위한 질문은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것 하나뿐인데, 그 알량한 사회적 가치나 의미를 찾는 행위로 나 자신의 사회적 의의를 정당화하는 지금의 작태가 퍽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예컨대 나 자신이 향후 한 5~7년간 화두로 삼고자 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당장 먹고살아가기 바쁜 이들의 삶에 어떠한 새로운 의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야기가 정녕 그만한 시간과 정성과 돈을 들여 쌓아 올릴 법한 이야기냐고 되묻는다면, 지금의 나로선 - 그리고 아마도 근 미래의 나로서도 - 영 뚜렷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얘길 해야 하는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 지금처럼 주절거리는 차원을 떠나,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돼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항상 "모른다. 모른다. 모르겠다."만 외치는 앵무새가 되진 않을까. 그렇다면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이 업을 택한 나는, 왜 사회적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생각, 대체할 수 없는 뚜렷한 시각, 한 마디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관리자 라인부터 다중에 이르는 전 범위의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설득력. 예전엔 이와 같은 무형의 자산으로 이루어졌던 플레이어 간 싸움이 굉장히 한정적인 범주의 중세 기마병의 마상시합에 가까웠다면, 지금플레이어들 간의 싸움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게릴라들이 벌이는 게릴라에 가깝다. 대다수의 경우 조금은 뒤쳐진 조류 속에서 흐름을 겨우 좇는다. 시대의 조류를 비교적 빨리 깨우친 이들이 그 게릴라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자신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그 선 안에서 이야기를 맞추려 하지만, 기마병이 투구를 쓴 채 게릴라라고 주장을 한들 기마병은 기마병일 뿐 게릴라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중세의 기마병이 그 갑옷과 무장을 뒤집어쓴 채 기존의 방식으로 게릴라전을 대처할 수 있느냐고 한다면, 그 또한 사실 불가능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현재 만드는 이야기는, 모든 게릴라들이 타협할 수 있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이기에 결과적으로 어떠한 이야기도 아닌 것이 될 때가 많다. 그러 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만인에 대한 인의 사소한 투쟁을 벌인다.  속에서 의미를  수 없게 된 유 낭자한다. 시끄러운 침묵 속에서.


지금의 나는 사실 이러한 현실에 죄다 눈을 감은 채 실눈으로 가까운 하늘의 별 하나만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걷고 있었을 뿐이다. 옆에서 가시에 찔리고 뱀에 물려 신음하고 절규하는 수많은 목소리를 외면한 채, 그저 아스라이 보이는 별 하나만을 바라보며 발에 밟히는 모래로부터 전해지는 통각조차 무시한 채 그 별의 끝에 내 발걸음이 온전히 도달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걷고 있었다. 아마도 그 별만을 좇는다면 이 어두운 밤길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고, 혹여라도 운이 좋게 별이 떨어지는 곳에 알맞은 시간에 도착한다면 운 좋게도 별똥도 주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기념비 삼아 흥얼거리며 돌아가는 소시민적 삶을 꿈꾸는 게 나라는 걸, 그게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답인 것처럼 우쭐거리며 살아온 게 나라는 걸, 그걸 오늘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다시 뛰어들어야 하는가, 아님 다시 눈을 감아야 하는가. 무엇이 답인가.


나라는 '집'은 있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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