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테이블>은 섬세하다. 오프닝 초입, 느긋하게 클로즈업까지 해가며 보여줬던 물잔 속 물의 움직임처럼, 영화는 큰 변화나 감정 기복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큰 동선의 변화 없이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에 맞춰진 카메라의 초점은, 마치 영화 속 내내 (거의) 침묵을 유지하는 카페 여주인처럼 묵묵하다. 수많은 대화들이 오가지만 그 대화 이면에는 그보다 훨씬 더 생략된 수많은 이야기들로 넘실거린다. 다만 <더테이블>은 그 이야기들을 전부 다 보여주는 대신, 생략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관객은 마치 만화 <유리가면> 속 극중극 '지나가는 비'를 보는 관객들처럼,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그 화면 속에서 남겨진, 그리고 남겨질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된다.
유진(정유미)과 창석(정준원),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 은희(한예리)와 숙자(김혜옥) 그리고 혜경(임수경)과 운철(연우진). 각각의 대화들은 완전히 분리된 옴니버스식 구성에서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오로지 '공간' 뿐이다. 카페 주인이 정성스레 닦고 물 잔을 비워 새롭게 채워 넣은 '꽃잔'이 있는 탁자. 그러나 그 작은 공간,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지는 대화 속에는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들이 담겨있다.
1. 밍밍한 맥주와 에스프레소
어쩌면 철없던 어린 시절의 행복과, 옛사랑의 추억을 기대했을 유진에게 창석은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찌질하디 찌질한 남자로 남자일 뿐이다. 설렘에서 현실로, 기대에서 실망으로 변하는 순간은 매우 순식간에 다가온다. 창석은 실없는 주제에 눈치도 없으며, 추억조차 '트로피'로 여기는 한심한 남자다. 그랬기에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유진은 특유의 배우의 감성으로 자신의 실망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만, 표정에 드러난 복잡다단한 감정들은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다. 그저, 창석이 그걸 눈치채기에는 너무나 둔하고 모자란 인간일 뿐이다.
2. 쌉쌀한 듯 달콤한 초콜릿 케익
반면 마냥 답답하게만 보였던 민호와 경진의 이야기는, 보다 미묘한 감정선을 보여준다. 서로 애써 모른 척하고 시치미를 떼고 속에 있는 것과는 다른 소리를 하지만 그들의 '진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겉도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대화 속에 놓였던 벽은 서로의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겸연쩍은 웃음, 실없는 듯한 표정, 그리고 침묵 속의 수많은 몸짓들. 민호는 순진한 듯 영악하고, 경진은 도도한 듯 순수하다. 마냥 변화구를 던지며 타자를 살살 약 올리던 민호의 '한 방'은, 네 달이란 시간의 벽마저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돌아가기 시작했다.
3. 다른 듯 같은, 라떼 이야기
(개인적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은희와 숙자의 대화는 유난히 '극적'이지만 과하지는 않다.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오고 가는 대화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녹아든 삶의 조각들은 곱씹을수록 먹먹하다. 하지만 둘은 그 감정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대신, 오히려 더 무미하게 만들어냄으로써 감정을 극대화한다. 라떼 아트가 흐트러지듯, 서로 상처가 많았을 거짓 유사 - 모녀는, 그렇게 한 순간이나마, 진짜 모녀가 된다.
4. 돌이킬 수 없을 커피와 홍차 사이
비가 내린 저녁, 혜경과 운철의 대화는 겉보기엔 매우 자극적이지만, 실체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 혜경은 끊임없이 도발하고, 운철은 이를 받아넘기지만, 이 모든 것은 차라리 '연극'에 가깝다. 절대로 속내를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터져 나오는 진실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영화 속 그 어떤 사람들보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다스린다. 다가오는 결혼이라는 현실은 도망가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기지만 둘은 그럼에도 어긋날 생각이 없다. 남은 감정은 차갑게 식어가는 차와 같아서 억지로 데우려 하지 않듯 그 누구도 구태여 돌이키려 하지 않는다. 아직 잔은 따뜻할 테지만, 그건 남겨진 사람들이 언젠간 털어내야 할 숙제다.
단조롭다면 단조롭고, 과하다면 과한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더테이블>은 마치 연극과 같은 구성 속에서도 영화로써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나른하고 노곤한 배경들은 이야기를 매끄럽게 만드는 풍경이 된다. 대화를 통해 주어진 상황들은 보이지 않지만 관객들의 상상에 의해 채워질 수 있을 만큼의 정보들은 준다. 비록 대화 속 일부 감정선들은 인위성이 다분히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관객의 상상을 방해할 만큼 심하지는 않다. 이는 감독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 모든 것마저도 마치 사실처럼 (잠시나마) 착각하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 속 모든 순간순간들 속에서는 말을 넘어선 '대화'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나의 카페에서 하루 동안 이루어진 이야기들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사람들은 이야기를 넘어서도 살아갈 것이고,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서로의 손을 끌어당기며 미처 끝내지 못했던 남겨진 이야기들을 스스로 매듭지을 것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리고 남겨지고 남겨질 '것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흘러가고 있을 것만 같다.
* 사진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