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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weller Sep 12. 2024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스> 북리뷰

짧은 희곡으로 미국문학을 맛보고 싶다면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혀있었지만 단 한 번도 눈에 띈 적이 없어 있는 줄도 몰랐던 책이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 오늘 읽은 이 책도 내게는 그랬다. 200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을 열자마자 거의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는 걸 보고 처음엔 깜짝 놀랐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인 이 책은 미국 문학사에서 유진 오닐을 잇는 최고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희곡으로 알려져 있다. 


유진 오닐이 극작가로 유명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을 본 적은 없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의 첫사랑이었던 우나 오닐이 그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그러나 우나 오닐은 정작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찰리 채플린과 결혼했다는 엄청난 사실도 기억나고..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를 보면서 찾아봤던 정보들인데 유진 오닐 얘기는 아니니까 이쯤 해두기로 하겠다. 


https://tv.naver.com/v/57895801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극락'이라는 곳에서 육체적, 정서적 쾌락을 누리며 살고 있던 한 부부의 삶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온 여자 블랑시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아내 스텔라의 언니다. 이 자매는 남부에 '벨 리브'(아름다운 꿈이라는 뜻) 농장에서 자란 귀족 출신이었으나 그녀들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몰락했고, 다른 방식으로 몰락한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매는 힘겨워한다. 


스텔라는 남편 스텐리의 저급함과 신사답지 못한 성품을 알면서도, 그걸 현실이라 여기며, 또 남편이 주는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쾌락을 이기지 못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이 부부의 관계는 도입부에 남편 스탠리가 스텔라에게 붉은 고기 덩어리를 던지며 고기를 사 왔다고 하는 장면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거칠게 던지는 붉은 고기를 부인 스텔라는 웃으며 받아 든다. 그들의 관계는 그런 관계였다. 스탠리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 포커를 하다 아내를 때리는 날이 있어도, 잠깐 울고 다시 그에게 돌아가고 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스텔라의 남편인 스텐리는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그는 거칠고 육적이며 원색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 스텐리를 블랑시는 '폴란드 사람'이라며 무시한다. 그에게는 볼링과 포커, 그리고 여자가 거의 전부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란 블랑시는 자신의 동생이 그런 남편과 한 집에 사는 걸 보며 치를 떤다. 고등학교 문학 선생인 그녀는 남편에게 맞고도 남편에게 돌아간 동생에게 말한다. 


그 작자는 짐승처럼 행동하고, 짐승 같은 습성을 가졌어! 짐승같이 먹고, 짐승처럼 움직이고, 짐승처럼 말한다니까! 아직 인간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뭔가, 인간 이하의 뭔가가 있다니까! 그래, 인류학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그림같이, 뭔가 유인원 같은 면이 있어!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그를 비껴가 버렸어. ...  맙소사!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스텔라, 내 동생아, 그때 이후로 약간의 진보란 게 있었단다! 예술같은 것들, 시나 음악 같은, 그런 새로운 광채가 그 이후로 이 세상에 들어왔거든!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부드러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그걸 우리는 키워야 해! 그리고 매달려서 우리의 깃발로 삼고 지켜야 해!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향한 이 어두운 행진에서 ... 짐승들과 함께 뒤쳐져선 안 돼!



그녀는 과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쓰레기 같은 오늘을 살아낸다. 이 구렁텅이 같은 현실은, 만약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봤다가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사랑 정도만 알았던 스탠리의 친구 마치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그가 알던 그녀가 사실은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음을 알고 그녀에게 등을 돌릴 때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그러나 그녀는 솔직하기도 하다.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죠! 하지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군요!




이 이야기에는 유난히 대립 구도가 많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젊음과 늙음,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희곡 형식이다 보니 곰곰 곱씹어보면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상징 장치들도 많다. 무엇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말을 늘어놓지만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블랑시라는 인간의 삶에 깊이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제목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극락'이라는 동네에 왔지만, 실상은 극락과는 거리가 먼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그녀의 운명을 보며 우리는 쉽게 우리의 인생을 그녀의 인생에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를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심지어 다다른 그곳이 궁극적으로는 나를 해하는 곳일 수도 있는데, 많은 이들이 그곳을 향해 가니까 그냥 휩쓸려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행복을 바라며 '극락'을 찾아왔던 블랑시의 소망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은 애처롭고 허망하다. 그녀를 기다리는 다음 행선지는 고작 정신병원이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보며 왠지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늘 행복할 수만은 없는, 어쩌면 고통이 더 많은 우리 인생도 그렇게 귀결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 아닐까. 


욕망 자체가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추구할 만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루이지애나주에는 실제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다녔다고 한다. 작가의 제목 선택이 유머러스하고 탁월한 것 같다. 내가 타고 있는 욕망이라는 전차는 어떤 걸까 생각해 보게 되는 짧은 이야기였다. 희곡의 특징상 배경음악이나 인물의 제스처 같은 것이 섬세하게 쓰여 있어서, 그 장면에 나온 노래를 틀으며 대사를 읽거나 인물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상상해 보며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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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w6ThIgsN5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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