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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an 25. 2021

초록색 비둘기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매일 꿈을 꾸는 나에게 꿈이 주는 메시지는 그렇게 의미가 크지 않다. 그냥 일상적인 일이기에 신기한 꿈이 아니면 그렇게 마음 쓰는 편이 아니다.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집안에 날개가 달린 작은 녹색 곤충이 들어왔다. 남편에게 잡아서 내보내 달라고 했지만 잡지를 못해서 내가 직접 다리 네 개를 잡고 창밖으로 내보내 줬다. 그 녹색 곤충은 내보냄과 동시에 초록색 비둘기로 변하더니 하늘 높이 힘차게 날아갔다. 그리고 아침 7시, 꿈을 깸과 동시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성인이 되고 나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다.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 회사 동료의 가족에게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은 목격해왔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닿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 적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없었다.


지난 나의 글을 읽었던 사람들이라면 우리 외가가 얼마나 애틋하고 끈적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8남매는 항상 함께 가까이 살아왔다. 할머니 집을 중심으로 가능한 가까운 지역에 포진하여 명절만 되면 행사를 방불케 하는 모임을 가져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1년, 명절이 되어도 시끌벅적함을 느낄 수 없었고 김장도 각자의 집에서 따로 했어야 했다. 늘 한데 뭉쳐서 엉덩이 맞대고 히히 호호하며 즐겁게 일하던 것을 각자 떨어져 힘겹게 묵묵히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항상 그 중심에 계시던 할머니가 89세의 연세로 90세를 미처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사유는 뇌경색으로 인해 혈류가 막히면서 온갖 장기의 기능이 저하되어 결국 패혈증까지 와버린 합병증 때문이라 했다. 연세도 있으시고 힘도 없으시다 보니 한 번의 뇌경색으로 잘 견뎌주던 장기들이 한 번에 힘들어졌나 보다. 그렇게 2021년 1월, 할머니가 갑작스럽고 조용하게 눈을 감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할머니를 잃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것이다. 사실 나는 손주라 내 윗세대인 엄마와 이모들만큼 남다르지는 않겠지만 할머니의 성격과 외모를 8남매 중 우리 엄마가 가장 똑같기 때문에 대략 짐작이 된다. 얼마나 유난스러웠을지, 그리고 엄청 힘들지만 엄청 고마운 그 마음도 알 것 같다.


할머니는 스스로 거동은 어려웠지만 정신만큼은 말짱하셨다. 연세에 비해 기억력도 좋으셨고 치매도 없으셨고 삼촌이 혼나는 거 보면 여전히 힘도 쎄 보였다. 가끔 삼촌이나 외숙모가 혼날 때 옆에서 지켜보면 너무 무서워서 나는 할머니 손주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혼을 내다가도 나만 보면 항상 미소만 흐뭇하게 지어주셨다.


할머니에 대한 남다른 기억 중 하나는 술이다. 할머니의 8남매는 대부분 술을 좋아해서 명절 때 만났다 하면 진로 한 박스와 카스를 냉장고 야채칸에 가득 들여다 놓고 마셨다. 때문에 항상 사건사고도 많고 시끌벅적한 게 일상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예를 들면 시집이나 장가 오는 며느리나 사위들)은 힘들어할 만큼 소란스러운 가족이다.


할머니 연세가 겹겹이 채워져도 술잔은 늘 할머니 앞을 지켰고, 그 술잔을 한 입에 털어 넣는 모습만큼은 20대 저리 가라였다. 게다가 술도 엄청 셌다. 나와 내 친척동생이 20대 중반에 할머니랑 대적하다가 둘 다 KO당해서 각자의 엄마에게 실려갔으니 말이다. 아직도 그때 얘기를 하면 나와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할머니는 워낙 워딩이나 문장이 센 편이었다. 특히 사위들을 강하게 키워서(?) 모든 사위들은 할머니 앞에 깨갱할 수밖에 없었다. 말뿐만 아니라 힘도 정말 셌다. 8남매를 키운 이력 때문인지 어릴 때 반찬이 잔뜩 올라간 엄청 큰 상을 혼자 들였다 내놨다 할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요리는 정말 전국의 어느 맛집보다 맛이 좋았다. 명절마다 늘 올라오는 갈비, 잡채, 온갖 전, 식혜, 각종 나물 등 할머니는 매 명절마다 구색을 맞춰 차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할머니의 손맛을 이모들, 외숙모들에게 전수하셨고 그 영향으로 외갓집 식구들의 음식 맛은 상향 평준화되어있다.


할머니는 노래방도 매우 좋아하셨다. 20대였던 시절 명절 때 거나하게 가족들이 한 잔 하고 노래방을 가면 할머니도 덩실덩실 노래방 화면 앞으로 나와 춤을 추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새벽까지 놀고 나서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칼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실 만큼 체력이 남다르셨다.


할머니의 8남매는 조금씩 모아 할머니에게 매달 용돈을 드렸는데 할머니는 그 돈을 맥주와 소주를 쟁여두는데 쓰셨다. 당신이 드시려는 게 아니라 8남매들이 워낙 술을 좋아하니까 몇 박스씩 들여다 놓고 가지러 오라고 연락을 하셨다. 오는 김에 얼굴도 보고 하려고 사는 거라고 하셨다. 그 술들은 각 남매의 집으로 흩어졌고, 나도 엄마네 집으로 흘러들어온 맥주 박스를 가져오는 혜택을 맛봐왔다.


할머니는 옛날 영화 같은데 나오는 장면처럼 용돈을 바지 속에 쟁여 다니셨다. 때문에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으면 바지 속에 안주머니가 있는지 꺼내서 손을 꼭 쥐고 예쁘기도 하다며 내 손에 쥐어주셨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세배를 알게 된 뒤 할머니에게 세배를 했는데, 나 어릴 때랑 똑같이 바지 속에서 꺼내 주셨다. 기분이 묘했다. 아들의 조막만 한 손을 쥐고 어디서 이런 게 나왔냐며 손을 쓰다듬으셨었다. 어릴 때 나를 바라보던 미소처럼 나의 자식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 흐뭇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짤막하게 써볼까 했는데 너무 많아 다 적지는 못하겠다. 문득, 할머니의 자글자글했지만 고왔던 그 손결이 생각난다. 아들의 손을 잡고 예뻐하셨던 모습이 떠오르며 자주 찾아뵐걸 하고 의미 없는 후회를 한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제법 와 닿는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밝게 웃는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섰다. 술을 따르고 올린 뒤 절을 두 번 하려는데 이모들이 막아선다. 가족은 두 번 절하는 게 아니라고. 같은 하늘 아래 우리가 함께가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한 번 반만 하는 거라고. 그렇게 한 번의 절을 끝내고 목례를 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러고 할머니 사진을 다시 올려다봤는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신 연유를 설명하면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긴 핬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했다. 남들처럼 요양원에 가서 홀로 임종을 맞이하지 않고 가족들 곁에서 떠나갔다고, 그리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고 목소리가 잠긴 채 마지막에 본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하얗고 뽀얗고 예뻤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튿날,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하늘로 가시는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다시 빈소를 찾았다. 엄마와 워낙 닮아서 인가 물끄러미 할머니 사진을 보고 있는데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할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았던 삼촌의 삼형제, 손주들이 함께 슬며시 눈물을 보인다. 이제 정말 보내드려야 한다는 게 실감되지 않나 보다. 엄마, 아빠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없다는 사실에 건장한 20대 청년 셋이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소중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 살아있는 모든 이 중에 과연 누가 감정을 참아낼 수 있을까. 참아낼 필요도 없고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을 건네던 할머니가 오늘 없다는 게 동생들에게는 이튿날인 이제야 조금 실감이 됐을 것이다. 생각 만으로도 너무 그립고 목이 메어오고 아플 것이다. 당분간은 말도 못 하는 상실감에 힘들겠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만큼 부디 힘을 냈으면 좋겠다. 그간 꼭 필요할 때만 들여다봤던 동생들인데,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들여다봐야겠다.


발인 전날 밤, 할머니 빈소에 가족 모두가 한데 모여 마지막 술을 한 잔 기울인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서로 공유하며 웃고 울고 대화를 이어간다. 새벽같이 나가야 하지만 잠을 피한다. 어떻게든 이 소중한 시간에 가족들과의 시간을 지켜내고 싶어 한다. 그렇게 겨우 잠을 이겨내고 새벽같이 화장터로 간다. 할머니가 한 줌에 재가 되어 돌아오니 엄마는 결국 주저앉고 만다. 이게 다 자신 때문이라고 자기를 탓한다. 한 평생 할머니를 위해 가장 많이 힘쓴 자신이기에 그 미안함과 상실감이 누구보다 클 것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하나의 유골함에 합장하여 모셨다. 이모들은 다시 엄마아빠가 신혼부부가 됐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눈물을 글썽이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도 엄마 옆에서 할아버지 곁에 잘 계시니 걱정 말라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제야 엄마는 조금 마음이 추슬러졌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참, 곱다.


솔직히 내게 엄마는 그 어떤 사람보다 힘든 사람이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된다고, 소중함을 느낀다고 했는데 잘 몰랐었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이렇게 함께 맞이하고 나니 옆에 있는 엄마가 너무 고마웠다. 나도 엄마처럼 엄마가 떠나는 날 더 잘할 걸 그랬다며 땅을 치고 후회를 하겠지만 남은 여생이라도 함께 소중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섞인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살아있는 한 최선을 다해 소중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법정스님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일어날 것은 어차피 일어나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깨어 있음이다.

 


꿈속의 초록색 비둘기가 날아간 곳은 분명 푸르고 행복한 무릉도원일 것이다. 할머니를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이제 초록색 비둘기와 함께 편히 떠나보낸다. 깨어있는 지금을 소중히 알려준 할머니의 뜻에 따라 의미 있게 살아가야겠다. 할머니! 그토록 평생 사랑했던 할아버지 곁에서 평온하시길, 당신을 위해 온 힘 다해 살아온 우리 엄마는 걱정 마세요. 제가 앞으로 잘할게요. 꼭, 행복하세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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