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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pr 13. 2021

'잘하는 기획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협업자와 얼마나 잘 맞는가의 차이

얼마 전 친한 동료로부터 함께 일하는 개발자로부터 자신이 지금까지 함께 겪은 기획자 중 잘하는 몇 안 되는 기획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 든 생각은 '오 역시!'였고 - 실제로 일을 잘한다 - 두 번째 든 생각은 '부럽다' 마지막으로는 '근데.. 왜 나는 아니고?'였다. 발언자인 개발자는 나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해왔는데 그 몇 안 되는 '잘하는 기획자'의 목록에 나의 존재는 없었다. 왜일까?






기획을 '잘한다'의 기준

왜냐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는 기획을 잘한다 못한다의 기준부터 따져보자. 기획을 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는 체계적인 위계와 영향범위가 넓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누군가는 넓게 트인 시야로 미래를 상상하며 구체화시켜 문서화를 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정리의 신이라던지 일정관리의 신과 같은 특정 분야에 특화된 기획자도 있다. 이처럼 '기획을 잘한다'의 범주는 우리의 예상보다 광범위하다.


반대로 '기획을 못한다'의 기준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상상 이상으로 문서를 엉성하게 정리, 작성한다거나 청중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으로 리뷰를 한다거나 뭘 정리해야 될지 판단조차 못하는 경우, 기계처럼 시키는 것만 복붙하는 경우 등 못하는 기준은 어느 정도 잡혀있다. 협업이 불가능한 지경이라면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험이 축적된 상태라면 '기획을 잘한다'는 메시지는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을 잘한다는 평을 들은 동료에 대해 생각해보자. A와 B, 두 명에 대해 언급했다고 하니 둘을 대입해본다.


먼저 A는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서비스 전반에 대해 상상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밑그림을 대략 그려내고 큰 덩어리로 구조화하는 작업을 한다. 위계를 명확히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라 구조를 위계에 맞게 설정한 뒤 각 위계를 러프하게 구체화하여 1차 안을 낸다. 그 기획안을 바탕으로 이해관계자와 먼저 만나서 싱크를 맞춘다. 내용을 더 구체화하는데 시간을 쏟기보다 개발팀 및 이해관계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일을 유연하게 해 나가는 스타일이다.


B의 경우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자신이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먼저 한 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구조를 잡고 필요한 꼭지들을 산정해낸다. 그것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전체의 범주 내 해야 할 것들을 잘게 나누어 1차 안을 정돈한다. 워낙 시야가 넓어 프로젝트에 대해 듣기만 해도 필요한 영향범위를 알아서 정리해내는 능력이 있고 이슈 범위가 적힌 문서를 바탕으로 개발자와 소통한다. 1차적으로 소통이 완료되면 좀 더 현실적인 일정을 산출하고,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하듯 순차적으로 진행해나간다.


두 성향이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A는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이성보다는 감성을 좀 더 융통성 있게 다루며 일을 해내는 성향이고 B는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위해 감성은 접어두고 이성적으로 빠르게 판단하고 수행하는 성향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잘하는가 묻는다면 내 기준에서는 둘 다 '매우' 잘한다.


이처럼 저마다의 선호하는 업무의 성향과 방식이 다른 것을 우리는 흔히 '업무 스타일'이라고 한다.



나는 어떤 업무 스타일을 가졌는가

내가 믿고 따르는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실무 기획자일 때와 관리자일 때 어떤 게 더 잘 맞는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둘 다 좋지만 관리자가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의외였다. 그는 한때 나의 팀장이었고 그의 아래서 일을 할 때 손발이 잘 맞는다 표현했었기에 당연히 실무자를 택할 줄 알았는데 관리자란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선배의 대답은 그랬다.


"실무를 할 때는 네 능력으로만 120% 정도 발휘했었다면, 관리자가 된 뒤에는 내가 모르는 네 다른 능력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고루고루 잘 섞여서 그 이상을 만들어"


선배의 말이나 기타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했을 때 나의 업무 스타일은 '협업'이 중심이 된다. 앞서 얘기한 A와 B 중에는 A의 스타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간혹 협업을 '친하면 다 된다'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협업과 친함은 엄연히 다르다. 협업은 업무가 잘 되게 하려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고 친한 것은 업무 외적으로 즐거움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저 친해지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협업이 될 리가 없다. 여긴 회사다. 학교가 아니다.


앞서 선배가 말한 나의 '실무 능력'도 들여다보자. 기획자로서의 나를 스스로 평하가면 실력이 낮지도 높지도 않다고 본다. 과업이 주어졌을 때 해낼 수 있는가의 기준이라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매우 답답해하는 성향이고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집착하는 스타일이라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을 한다. 그러나 그 일을 수행하면서 문서의 완성도와 무결성이 높은가를 따져보면 잘 모르겠다. 구멍이 생기면 주먹구구식으로 메꾸며 일을 해나갈 때가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업무 스타일이 누군가에게는 '잘한다'의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고 - 앞서 언급한 개발자 - 문제 해결이 업무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잘한다'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획을 잘한다'는 객관적 지표는 없다. 그저 '누구와 손발이 잘 맞는가'가 잘한다의 기준을 판단하는 것이고 그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잘 맞는다는 기준은 누구나 다르다.

패션을 생각해보자. '저 사람은 옷을 잘입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무난함'을 잘 입는다고 표현하지만 누군가는 '화려함'을 표한다. 친한 친구 중에 패션 디자이너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패션 감각이 좋다고 옷 참 잘입는다고 들어왔다. 그런데 친구는 만날 때마다 동물인가 싶을 정도의 무늬가 있거나 어마무시하게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입고 나온다. 내 기준에는 그 친구가 '잘입는다'에 속하지 않는다. 신기할 뿐.


이것이 성향이다.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지의 기준으로 판단을 해내간다.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패션 스타일도 다른데 하물며 전 국민의 대부분인 직장인의 업무 스타일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때문에 나의 업무 스타일도 '잘한다'에 속할 수 있는가를 본다면 속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이전 회사에서 내게도 "너는 일 참 잘해. 같이 일하기도 편하고"라고 얘기해준 개발자들이 있었다. 해석하면 그들의 성향에 나는 '손발이 잘 맞는 기획자'였다. 앞선 개발자에게는 아니었지만, 함께 일한 누군가에게는 잘하는 기획자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저 업무 스타일이 안 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왜 나는 아니지?'에 대한 해석이 되고 약간은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이 정리가 된다.



PO, 기획자와 다른 존재

이런 업무 스타일의 차이로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이 필요한 직군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획자는 기획을 하는 사람이다. 만일 개발자가 '기획을 잘한다'는 완벽한 문서와 커뮤니케이션만을 두고 말한다면 나는 '못하는 기획자'일 수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미션을 체계적으로 잘 갖춰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사방을 뛰어다니는 것에 가까웠으니 체계성보다는 대부분의 문서가 널브러져 있는데 신기하게 돌아가네? 에 가까웠을 거다.


기획과 프로덕트를 이끄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프로덕트를 출시하고 가꿔나가는 것은 돌아가는 시장의 상황과 서로 다른 서비스의 연결성, 이해관계자의 협의와 가치판단에 집중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과업이 생기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고 만들어내는 사람이 기획자다. 때문에 최근에 PO(Product owner)라는 직군이 점점 하나의 직군으로 자리 잡고 있다. PO는 기획자와 달리 프로덕트를 이끄는 사람이다.


한때는 기획자가 PM 또는 PO 역할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이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다 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기 어렵다. 하나의 미션에 집중해서 체계를 잡고 깊게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설계하는 역할이 필요했고, 그것이 PO라는 직군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다.


현재 회사에서 PO의 성격을 지니고 유사하게 일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회사 업무 체계가 폭포수(Waterfall model)에 가깝기 때문에 완벽히 PO업무를 수행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폭포수 방식의 업무 스타일에서 PO라는 직군이 어려운 이유는 '권한'이다. 최종 결정과 판단에 대한 모든 권한이 상사에게 있다. 그러나 프로덕트에 기반한 업무방식(그 유명한 Agile!)이 되면 권한이 PO에게 주어진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설득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PO의 역할이다. 때문에 Agile방식의 주요 직군 중 하나로 꼽힌다.



업무 스타일에 맞게 선택

누군가 기획자는 PO처럼 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을 봤다. 내 기준은 다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각자에게 맞는 일을 택하면 된다. 기획자는 기획에, PO는 프로덕트에 집중해야 한다. PO가 기획하는데 시간을 너무 쏟는다면 그 프로덕트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반대로 기획자는 기획을 하는 사람이다. 각자 자신이 맡은 바 리더십을 갖고 전문성 있게 완성해나가는 사람이다. 즉, 기획자는 프로덕트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현실화해주는 전문가다. 기획자가 PO성격을 지니기 위해 시간을 불필요하게 쏟기보다는 기획에 필요한 기술들(UI/UX, 정보의 구조화/위계화, 로지컬 싱킹 등)을 연마해나가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좋다. 프로덕트의 미래나 이슈는 PO에게 맡기고 기획력을 위해 힘쓰는 것이 옳다.


기획자로 살다 보면 여러 사람과 다양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때문에 기획자든 PO든 '잘한다'의 기준은 스스로가 세우는 것이 아닌 협업자로부터 평을 받게 된다. 다만, 그 평가를 위해 또는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본인의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를 성장시켜나간다면 언젠가 나와 스타일이 꼭 맞는 협업자들이 생겨나 잘하는 기획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노하우가 더 쌓이면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마련. 그러니 '잘하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본인 자리에서 의지를 갖고 우직하게 해내가면 된다.


최근 PO역할로 채용 제안이 참 많이도 온다.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이커머스 시장의 성장도 경쟁도 심화됐다는 거겠지. 아직은 회사를 떠날 생각이 없지만 언제 어떤 시점에, 혹시나 PO라는 업무로 직무가 바뀌면 기획자로 살던 삶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끄적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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