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사회 이직자의 흔한 경험
2021년, 팀장을 내려놓고 팀을 리드했던 경험을 살려 기획자 생활 12년 만에 커머스 스타트업의 PO직군으로 이직을 했다. 그렇게 새로운 2022년, 새 출발을 활기차게 시작했다.
이커머스 업계 생활만 8년 차. 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나름 바닥부터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단단하게 업계 경력을 쌓았고 모르면 알 때까지 덤벼가며 일을 했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겹겹이 축적되어 나의 성장에 큰 힘이 돼주었고 덕분에 대규모 팀을 이끌어보는 경험도 하게 됐었다.
그런데, 스타트업에 오니 그 경험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 환경이 바뀌었으니 느낌이 생소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아니지, 그 생소한 느낌은 너무나 당연한 거다. 근데, 환경 때문에 아니라 너무나 잘 아는 지식이나 업무마저 처음 듣는 것처럼 들리는 신기한 마법에 걸렸다. 마치 신입사원이 회사생활을 처음 하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왜냐...?
가장 크게 생소하게 다가온 것은 '완전하게 아는 것이 모르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양파링은 양파맛이야'라는 문장을 듣고 있는데 '어니언 시즈닝을 믹스한 스낵이야'로 변환되어 대화들이 오간다. 그랬다. 소문으로 들었었는데 스타트업은 영어가 모든 문장에 녹아져 있다. 사실 위의 문장은 그냥 같은 말 아닌가. 스타트업에서 유독 더 영어를 쓰는 이유는 대체 뭘까.. 스타트업 문화 태생의 문제일까.
입사 후 여러 명이 돌아가며 신규직원 온보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받는 문서마다 약어 또는 영어가 너무 많아서 외국계 회사를 입사한 줄 알았다. 막상 까 보면 별로 길지도 않아서 굳이 줄이지 않아도 될 약어도 있고 한글로 표기하면 간결하게 두, 세 단어로 끝날 것 같은데... 솔직히 약간 불편하더라.
그래도 어쩌겠는가? 적응해야만 한다. 정말 엄청난 것을 포기하고 굉장한 결심으로 한 이직이기에, 나를 조금이라도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됐다. 들리는 영단어와 약어들을 모조리 적어가기 시작했다. 외워야 보이고 들릴 것 같아서...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직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용어들을 적어가는 중이다. 힘들다.
더불어 용어를 개인의 문서로 정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이전 회사들에서 JIRA를 사용하면 Confluence를 세트로 활용했기에 당연히 동일한 환경일 거라 생각했다. 근데.. JIRA는 쓰지만 Confluence는 쓰지 않았다.(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 좋은 호환을 두고 대체 왜!) 모든 문서는 노션을 사용해야 하고 이 또한 익숙하지 않은 탓에 문서 정리가 평소보다 좀 더딘 것 같다. 휴... 열심히 익혀가는 중이다.
또한 별도의 사내 메신저가 없더라. 지금까지 지낸 모든 회사는 친한 동료들과 노닥거릴 수 있는 사내에서만 쓰는 메신저가 있었다. 그런데 슬랙이 메신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와우... 슬랙은 외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만 깨작거렸었기에 슬랙에서 개인과 대화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인스타그램처럼 슬랙 안에는 DM의 개념이 있는데 그걸로 메신저를 대체하더라. 이밖에도 처음 보는 툴만 열개는 더 설치한 것 같다.
애자일 방식을 선호하는 스타트업은 대체로 스프린트를 기준으로 업무를 해나간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일을 하더라. 백로그 잔뜩 쌓아두고 그때그때 그때 필요한 시점에 꺼내보는 대시보드나 로드맵 형태가 아니었다. 스프린트 일정을 정해두고 에픽을 기준으로 스토리와 테스크를 발행하며 일을 했다. 그리고 모든 스프린트가 지정된 Due date를 향해 달려가며 일을 하고 있고 실제로 납기일을 죽기 살기로 지켜낸다. 아티클로만 마주했던 스타트업의 스프린트, 찐으로 하고 있었다.
다른 담당자가 진행하는 스프린트 리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정'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전 회사는 보통 의사결정을 하는 최고 결정권자들이 있었기에 작은 부분도 늘 컨펌이 존재했다. 그런데, 여기는 함께 일하는 프로덕트 기준의 미션팀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하면 그대로 결정하고 배포가 되더라. 와, 이게 되네? 정말 '권한'이 팀에게 있다는 것. 가장 큰 차이점이자 많이 놀랐던 부분인 것 같다.
미션 조직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빠르게 적용하는 것이 우선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PO가 팀 구성원이 바라보는 목표를 일치시키고 의견을 취합하고 모두의 의견을 듣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인스파이어드에 나왔던 많은 도구와 사고를 실제 업무에 적용하려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이전 회사에서는 그렇게 결정하고 배포 나갔다가는 지옥을 맛보게 될 일.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 기대되고 두근거렸지만 한 편으로는 무서웠다. 내가 판단을 잘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해야 한다! 적응해내야 한다! 계속 되새기는 중이다. 넌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는 중이다.
생소한 용어의 쓰임들(특히 영어), 모르거나 어색한 툴의 사용법, 책이나 아티클로만 보던 업무방식, 아직은 편치 않은 동료들. 그동안 기존 회사의 너무 많은 것들이 내게 익숙해져 버렸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지내왔다. 익숙해짐에 조금 낡아진 나를 정비하고 때로는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누군가 '어색함'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무언가 잘 모를 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라고, 그래서 그 감정을 좋아한다고. 그렇다. 나는 지금 모든 상황이 어색하다. 출퇴근길도 나와는 다른 화려함을 지닌 회사와 사람들... 모든 게 어색하지만 알 것 같다. 그 기분 좋은 어색함을.
빠르게 적응하려고 굳이 노력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기분 좋은 어색함을 즐기며 그저 자연스럽게 이곳에 스며들고 싶다. 리더는 내게 빠른 속도를 바라겠지만, 그런 사람은 나 말고도 충분해 보인다. 속도는 주관적인 거라 누군가는 내 속도가 빠르게 느낄 수도 느리게 느낄 수도 있겠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남 시선 많이 신경 쓰고 살았는데, 이제 나만의 속도로 일을 할 거다.
생소하고 어색한 것은 익숙해지면 해결될 것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도 권한도 생겼다. 이제 정말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신나게 즐기며 해보자. 무지성 상태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진부한 얘기지만 그냥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일을 일답게, 제대로 다시 뛰어보려 한다.
아, 물론 여기도 내 회사 아닌 건 여전하다. 그래도 나를 프로덕트 오너로 불러준다고 하니 까짓 거 내 회사처럼 일해보련다. 반갑다, 스타트업! 같이 잘 키워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