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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Sep 29. 2022

스스로 행복하기를

관계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떻게 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고, 꽉 들이찬 답답함을 해소할 수 없어 그대로 속에서 썩어가는 게 느껴진다. 이내 매스꺼움이 찾아오고 두통이 생기며 숨이 가빠진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잠시라도 쉬어야만 이성적인 상태가 된다.


그렇게 몇 번의 반복을 하다 보면 다시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살아가게 된다. 일이 다시 잘 풀려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냈기 때문이다. 그저 다스리는 것이다. 누구도 그 고통을 견디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워온 못된 관습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제법 괜찮기도, 어느 날은 또다시 숨이 가빠지기도 한다. 어느 날은 이 두 가지 경험을 모두 하기도 한다. 굳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도 하고,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을까. 누구는 아이를 위해,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를 또는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산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 그렇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그 대상인 '누군가'는 과연 자신을 위해 고통받는 소중한 사람의 아픔을 반기고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위해 견뎌내는 순간들이 과연 그 대상을 실제로 행복하게 만들까.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그토록 고되게 삶을 자처해서 사는 것은 맞는 것일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산다는 사람 중 실제로 순수하게 자기희생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삶을 살기보다는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타인에게 '행복하기 위한 조건'을 투영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가 행복한 이유'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처럼 느끼면 나름대로 목표의식도 생기고 동기부여가 되기에 상대의 행복지수를 정성적으로 수치화하며 자기만족을 하기에 편리하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 해냈어'를 통해서 스스로 안도한다. 내가 해냈다고. 그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보람찬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내가' 행복해지려고 한 것인데 말이다.


내가 행복하고 싶다는 것이 이기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일까. 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타인에게 내 행복의 책임을 돌려버리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도 불행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불행을 만들어간다. 나의 연인, 가족, 지인 등 '내 행복의 근원은 바로 너야'라는 어떤 대상에게 책임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워간다. 마치 그 싹을 그 상대에게서 잘 키워내면 그도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처음에는 그 순결한 마음이 실제로 동작한다. 난 너에게 바라는 게 없어, 그저 네가 행복하면 돼. 실제로 많은 희생을 하고 그 희생 자체가 행복하고 즐겁다. 가끔 돌아오는 따스한 말 한마디가 뿌려둔 씨앗에 싹을 틔운다. 그렇게 상대의 마음속에 거둔 작고 소중한 싹을 고귀하게 키워나간다. 그 싹이 자라면 무엇이 되는지도 모른 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난 너에게 이만큼 하는데, 왜 넌 내게 이만큼 안 해?'와 같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생기고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면 서운함이 쌓인다. 서운함은 속상함이 되고 미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처음의 마음과 달리 갈등의 싹은 점점 커지고 결국 썩어버려 열매도 맺기 전 잘라내 버리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너로 인해 행복하지 않다고.


애초부터 상대에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투영해서는 안됐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홀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종족이라 연인 사이에서, 가족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이 패턴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관계 형성은 인간이 갖는 아주 기초적인 욕구이고, 이런 욕구 충족은 늘 같은 패턴으로 사랑과 실망의 공존으로 이어진다.


득도하지 않는 이상 인간은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모두가 그럴 것이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 싶은 것뿐인데, 계속 이렇게 사랑과 미움을 번갈아가며 헛된 시간을 보내야만 할까. 행복이 정말 그렇게 어렵게 견뎌야만 이뤄지는 것일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온화한 가족, 사랑하는 연인, 둘도 없는 친구.. 이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내게 진짜 행복을 주는 것들일까?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평생토록 행복을 줄 수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로 인해 행복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누구도 나의 행복을 평생 지켜주고 책임져주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 애초에 인간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끊을 수 없어 그 싹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행복의 목적을 특정한 상대에게 부여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 싹을 틔우게 해야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내게 바라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는 게 아닌가.


그러니 누가 내게 행복을 만들어주길 바라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스스로가 진정한 행복을 찾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누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마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때마다 내 인생을 내가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롭게 살아갈 때,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됩니다. - 법정,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나를 형성해야 한다. 작은 것에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 작게라도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관계, 인연은 삶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토록 중요한 인간관계들을 유지하려면 스스로 내적인 단련이 필요하다. 스스로 행복에 대한 책임의 씨앗을 타인이 아닌 내 마음속에 심어야 한다.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 어떤 관계 속에서도 온전하게 행복을 느끼기는 힘들다.


출근길의 스쳐가는 풍경을 보는 것, 길거리 나무의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 퇴근길의 아름다운 달을 보는 것, 살랑이는 바람이 피부로 스치는 것을 느끼며 당연한 것을 행복으로 채워야 한다. 나의 귀로, 눈으로, 피부로 세포들을 깨우고 많은 감각들을 관찰하며 무럭무럭 내면의 씨앗을 키워가야 한다.


의무처럼 느낄지언정, 내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모든 것은 무너진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나 지쳐있던 순간, 오랜만에 집어 든 법정스님 책 덕분에 다시 한번 바로잡는 시간이 됐다.


스스로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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