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주워담아 기억하기
글보다는 사진이나 영상 등으로 찰나의 작은 부분까지도 담아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아니, 정확히는 나의 뇌가 매우 하찮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한 기억이라도 잘게 쪼개지거나 희미해지곤 한다. 때문에 기록을 통해 거짓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진실되게 기억하고 싶었다. 기록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며 그 시절 추억을 하루하루 되새기곤 했다.
그러나 가끔은 순간을 그대로 흘러가기 두는 것이 좋을 때가 있더라. 그러지 못한 순간은 아쉬움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얼마 전, 아들 유치원에서 동요 발표회가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늘 영상으로 발표하는 모습만 봐오다가 위드 코로나로 첫 대면 발표회를 보는 날이었다.
아들의 발표가 끝난 후 전달할 예쁜 꽃다발을 준비하고 아들의 멋진 모습을 담기 위해 아빠에게 값비싼 DSLR 카메라를 빌려 준비했다. 아들의 발표를 생생하게 남겨두기 위해 화각이 잘 나오는 자리를 잡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아빠 카메라라 손에 익지 않은 건지, 너무 오랫동안 카메라를 안 다뤄서 그런 건지 원하는 대로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아들은 하필 1번으로 발표를 했고 커다랗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힘겹게 동요 발표를 듣게 됐다. 그 순간이 무척 후회가 되더라. 귀엽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동요를 부르는 모습을 그저 눈에, 귀에 담고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쳐줄걸, 카메라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밝게 웃으며 최고를 날려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걸... 너무나 아쉬웠다.
당당하게 첫 번째 발표자로 나가 한 번의 실수 없이 동요를 완벽하게 부르고 자리로 돌아온 아들에게 멀리서나마 엄지를 척 보내주었다. 아들은 그제야 씩 웃고는 자기 자리에 착석하고 발표회를 즐겼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사전에 기록은 가볍게 하고, 오히려 시선을 무겁게 아이에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기록을 못하게 되면서 뜻밖의 보물 같은 기억을 갖게 된 경험도 있다. 이전 회사에서 맡게 된 팀에서 자의적인 해외 워크숍을 계획하게 됐다. 말이 워크숍이지 그냥 놀러 가고 싶은 사람 여럿이 모여 작당모의를 한 셈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가겠다고 손을 들더니 결국 9명이라는 거대 인원이 해외 워크숍을 가게 됐다. 그것도 2박 3일 보라카이.
듣기만 해도 가성비가 매우 떨어지는 기간과 비용이지만 해외로 가겠다는 일념 하에 우리는 아주 꼭두새벽부터 움직여 보라카이로 향하게 됐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아주 듬직한 여행 가이드(?)가 있었고 그 팀원의 계획에 따라 2박 3일 짧은 시간을 세포단위로 쪼개가며 움직였다. 나는 그 기록을 생생하게 담아 하나의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고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그렇게 한 번의 트러블 없이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둘째 날, 선셋 세일링을 위해 모두가 바닷가로 움직였다. 그런데 현지 가이드가 카메라는 떨어뜨리거나 고장이 날 수 있으니 놔두고 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 어쩌지. 멋진 석양을 카메라에 담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는데.. 이걸 담아야 완전한 한 편의 영상이 완성될 것 같은데.. 오랜 고민 끝에 아쉬웠지만 행여 고장 날까 무서워 결국 짐을 놔두고 보트에 올라타게 됐다.
처음에는 얌전하던 보트는 갈수록 거세졌고, 파도가 조금이라도 센 구간에 가면 엉덩이가 들썩거려 양손을 손잡이에서 뗄 수가 없었다. 아, 안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 재밌는걸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한참을 아쉬워하며 한숨을 쉬던 순간, 갑작스레 드넓은 바다와 멋진 석양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금까지 들썩거리던 보트는 어느새 얌전해졌고, 저 멀리 보이는 석양은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석양에 비친 바다색은 붉게 물들었고, 여행 와서 처음으로 기록을 위해 애쓰지 않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석양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 이 순간만큼은 눈으로 담아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의무처럼 여겼던 기록의 부담을 덜어내고 나니, 내 앞에 펼쳐진 이 한 장의 그림 같은 순간이 온전하게 내 것이 되었다. 그 순간은, 여행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모든 찰나의 순간을 꼭, 무조건 기록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오히려 그렇게 순간을 흘려보내니 많은 감정들이 나도 모르게 정리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기록에 의존해서 살았을까. 흘러가는 소중한 순간들이 잊혀지는 것이 겁났던 것일까.
나는 이제 오히려 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혼자 겨울이나 비수기에 바다를 찾는다. 아무런 방해도, 아무런 소음도 없이 그저 바다의 소리가 나의 귀를 지배하고, 시끌벅적한 관광객 없이 모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동안 쌓인 감정들을 바닷소리와 함께 내보내고 다시 힘을 낼 원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올해 초 홀로 낙산사를 찾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로 오기 전, 많은 것을 내려놓고 준비하고 싶었고 나에게 쌓인 여러 가지 감정을 덜어내고 싶었다. 낙산사는 그 목적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때는 겨울이었고 바람이 살짝 불던 날이었는데, 거세고 우렁차게 파도가 쳤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팀장이라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었던 지난 세월이,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인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었다. 여러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렀고, 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렇게 저 멀리 크게 치는 파도에 한 차례씩 기억들을 떠나보냈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생각에 잠겼던 순간의 기억은 기록되지 않더라도 먼 훗날까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비단 여행에서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도 일상에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거나 감정을 느끼곤 한다.
이를테면 떠오르는 이른 아침 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바람에 휘날리는 풀소리를 듣는 것, 맑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것, 따스한 햇살을 살짝 가리는 나무 아래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는 것, 가족과 때로는 친구와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등
물론 여전히 기록하는 것은 좋고 필요하다. 특히, 아이가 커가는 귀한 순간을 남겨두거나 말도 못하게 멋진 장소에 여행을 갔다면 기록이 여전히 우선할 것이다. 다만, 예전만큼 기록에 완전하게 의존하지 않는다.
잊혀지기에 아까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애써 기록하던 것을 가끔은 멈추고, 흐르는 순간을 그대로 조금씩 주워 담아 기억하기로 했다. 기록에 멈춘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을 간직하며 온전하게 행복한 순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기록이 나의 모든 찬란한 순간을 지배하지 않기를 바란다.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한가득 오롯이 내 눈에, 귀에, 피부에 온전하게 느끼는 그 순간을 기억하기로. 특히 그 시간이 빈틈없이 행복한 순간이라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그저 흘러가게 놓아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