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충성!
"이사님, 저 반차 좀 쓸게요"
"무슨 일 있어?"
"아뇨. 날씨가 좋아서요."
결재를 올렸다. 결재 올린 지 1분 만에 승인이 떨어졌다. 오후는 OFF다.
나도 처음 시도해본 거라 스스로도 결재를 올리면서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도를 했고, 결재승인을 받았다. 일부 동료는 진짜 핵멋있다고 엄지를 들어주었지만 아마도 일부 동료는 속으로 진짜 미쳤다고 생각할 거다. 알게 뭐야, 내 휴가인데 내 맘대로 못써?
미친 일, 맞다. 나도 우리 회사에 오기 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실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쾌감이었다.
이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 졌다. 회사 선택만 잘하면 삶도 제법 윤택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날씨 좋아서 당일 휴가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만족스러운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나처럼 일찌감치(10년인데?) 찾은 회사원도 있겠지만, 힘겹게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가는 회사원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찾아질 거였으면 퇴사가 회사원 드림이 되지는 않았겠지.
좋은 회사, 좋은 팀을 만났다.
사실 좋은 회사에서 팀까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 그렇다고 회사원 모두가 천운을 타고날 수는 없는 일. 어느 정도 좋은 회사(또는 팀)를 만나는 공식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나처럼 운이 좋거나 기준을 바로 알고 그에 맞게 회사를 선택해가면 된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는 고작 7개에 불과하지만 작고 큰 회사를 경험하면서 다소 지엽적인 조건들에 휘둘렸던 과거 10년을 되새겼다. 난 어떤 기준으로 회사를 선택해왔기에 지금의 회사를 만났을까. 과거 경험을 토대로 충성하는 회사를 만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공유하고자 한다.
가장 많이 하는 실수다. 회사 이름은 정말 맘처럼 포기하기 힘들다. 내 명함에 찍혀있는 그 로고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디 가서 우리 회사 이름만 말해도 우와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그냥 내가 이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다만, 회사 밖에서 만인 게 함정.
큰 회사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주 커다란 제도적 문제가 하나 있다. 업무가 너무나도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 한 사람이 할당받는 업무가 너무 소소해서 타 회사에 가게 되면 써먹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것.
단적인 예로, 나는 '기획'이라는 일을 한다. 큰 회사를 가면 대체로 기획팀이 엄청 세분화되어있다. 전략기획팀, 웹기획팀, 모바일기획팀, 서비스기획팀, 플랫폼기획팀 등... 게다가 각 기획팀 안에는 1팀, 2팀과 같이 또 세분화된다. 세분화된 팀 안에서는 또 파트의 개념이 생기며 파트장을 중심으로 업무가 배분된다.
또한 큰 회사의 경우 외주를 많이 돌린다. 외주를 많다는 것은, 내가 프로젝트에 온전하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없다는 거다. 선배가 시키는 것만 하게 될 확률이 농후하다. 그 안락한 편안함에 물드는 순간 커리어는 정체된다.
특히 이제 막 기획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세분화된 팀에 들어가면 주어진 것만 습득할 위험이 있다. 뭐,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월급루팡이 꿈이야 한다면 할 말 없지만.
회사를 들어갔는데 상사라고 있는 것들이 한없이 이상적이기만 하거나 외골수라면 그 회사는 적당히 때를 보고 그만둘 것을 추천한다. 동료에게 배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온다. 회사는 위계가 있기 때문에 권한도 있고 힘도 있는 상사가 일을 잘해야 일의 성과도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특히 팀장이 배울게 전혀 없으면 말 다했다. 이전 글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배울 것은 분명 있다고 했지만 그 회사를 오래 다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충성하기 위한 회사와 팀의 대장은 팀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배움의 기준은 모두에게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팀장의 리더십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팀장의 지적능력에 감탄할 수도 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팀장의 '인간성'에 감동할 수도 있는데, 잊지 말자 여기는 회사다.
인간성만 좋다가는 팀 자체가 호구 취급당할 수 있으니 팀장에게 인간성 외 다른 능력이 있는지 필히 살펴보자. 그 종류가 무엇이든 내가 충성할 팀의 대장이 아무런 배움의 아이템도 장착하지 못했다면 굳이 충성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인간말종 수준의 인간성이 아니라면 적당히 꼰대인데 확실히 일을 잘하거나 리더십이 좋다면 따라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인간성도 좋은데 엄청난 업무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꼰대력도 없는데 리더십까지 있는 사기캐는 회사에 없다고 봐도 좋다.
만족하는 회사 선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사든 동료든 의견 개진이 자유로운 환경이어야 한다. 여기서의 자유로움은 무조건적인 논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은 물론 불편한 것도 스스럼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 이 환경은 내가 이 회사에 충성하게 된 가장 큰 역할을 한 조건이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이전 글을 보면 분노 그 자체다. 내가 속했던 그 조직은 의견 개진은 물론 "네, 아니오"의 대답조차 내 마음대로 시원하게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그 대답을 눈치껏 발언해야 한다. 소신 발언은 내 스트레스를 올려주는 역할만 할 뿐, 상사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았었다.
물론 회사는 위계가 존재하기에 100%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상사는 만나기 어렵다. 다만 적어도 서로의 의견에 존중은 있어야 하고 동의하지 않더라도 의견 자체를 몰살시켜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당근만 먹는 말은 어딜 가도 힘이 없다. 의견 개진 시 무조건 칭찬의 피드백만 오는 회사도 썩 좋은 조건이라고 보긴 어렵다. 누가 맞냐 틀리냐가 아닌 최적의 답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 나의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이, 상대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한 곳에서 일을 하면 만족도가 올라간다.
단, 나의 의견이 무조건 먹힐 거라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주의하자. 내 의견은 하나의 주관일 뿐, 회사는 어디까지나 회사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 여기서 말한 의견 개진은 '다양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법일 뿐, 내 의견이 반드시 먹혀야 한다는 뜻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느 때는 잘 먹히기도 어느 때는 신랄하게 까이기도 한다. 그렇게 더 좋은 방향이 결정되고 의견이 단단해지는 거다.
만약 내가 다니는 회사가 이름도 멋진데 배울 것이 많은 윗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의견 내는 것이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성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위 삼박자를 다 맞추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기준을 마련한 것. 위 조건이 고루 갖춰진 곳이라면 충성해볼 만하다.
위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좋은 회사를 선택했는데도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 이상하게도 애사심이 잘 생기지 않는다면 아래 두 가지의 주의점을 의심해보자.
회사는 공동체다. 별 이상한 인간들과 정상인 인간들이 한데 모여 잘해보자고 의지를 다지는 곳이다. 회사의 규모와 관계없이 사내정치는 반드시 있다. 그게 짙거나 옅음의 차이일 뿐, 내 회사 아니면 정치는 반드시 존재한다.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정치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주변을 의심해보자.
회사에는 정치인이 존재한다. 사내 정치인은 우리가 TV에서 보는 것과 같이 티 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교묘하게 사람의 환심을 얻어내고 귀신보다 무섭다는 사내 소문을 활용해 라이벌을 제거한 뒤 이것을 이용해 직위를 획득한다. 대단할 정도로 치밀하다.
정치인은 어떻게 알아볼까? 가장 먼저 뒷담화가 일상인 사람, 그리고 실력은 없는데 직급이 높은 사람들부터 거르자. 높은 비율로 정치인일 확률이 있고 정치에 휘말린 사람은 똑같이 정치인이 되거나 상처를 받는다.
'회사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이 특히 정치인의 타겟이 되기 쉽다. 장기간에 거쳐 '다른 사람은 믿지 마, 나만 믿어'의 믿음을 주고 작업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일을 도와주는 듯 야금야금 가져가더니 결국 내가 해낸 일들은 그의 업적이 되고, 승진을 한다. 그는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그 순간의 소름 끼치는 장면은 내 회사생활 최악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많은 직장 선배들이 말을 하는 거다. 회사 사람 믿지 말라고. 그럼에도 회사생활을 하는 데 있어 회사 친구는 너무 중요하다. 회사 사람만큼 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무조건적으로 회사 사람을 기피하기보다 정치인을 조심하자. 휘말리는 순간, 억울함은 온전하게 내 몫이다.
회사 이름 좋다고 업종도 무시하고 무작정 가는 오류는 범하지 말자. 일부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은 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그것을 업으로 삼았을 때, 시너지가 발휘되는 것은 지당하다.
사회생활 초창기에 회사 이름만 보고 유명하니까 들어갔던 제약회사가 있다. 외국계 기업이었고 일상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어서 정말 이름만 보고 들어갔다. 수직체계야 어떻게든 참았지만 제약회사가 돌아가는 원리나 지식이 전무해서 재미도 없고 그 환경이 절대 익숙해지지 않더라.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뒀다.
회사이기 때문에 어차피 내 맘대로 못하는 것은 어딜 가든 똑같다. 그러니 업종이라도 내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쪽으로 가면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잘 아는 것은 힘이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는 분야에 있는 업종을 선택한다면 그렇지 않은 회사를 다닐 때 보다 성과는 물론, 만족도가 더 올라갈 거라 생각한다.
물론 업종은 필수조건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세 가지 조건이 중요하고, 그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뭔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의심해보는 주의점일 뿐.
주변에도 게임 정말 못하는데 세상 즐겁게 게임회사 다니는 사람도 봤고 패션감각이라고는 1도 없지만 이커머스에서 이름 날리는 사람도 봤다. 술은 입에도 못 대지만 주류회사를 수년째 만족스럽게 다니는 분도 있다. 어디까지나 선택적 요소지만 무시하기에는 만족도에 제법 영향을 끼친다는 것.
하나. 회사 이름에 현혹되지 말 것
회사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둘. 배울 게 있는 팀장에게 있을 것
일이든 리더십이든 직속 팀장에게 배울 게 있어야 다닐 맛이 난다.
셋. 의견 개진이 자유로울 것
좋은 것은 물론 불편한 것도 스스럼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환경이어야 한다.
정치인 조심
내가 혹시 사내정치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업종 체크
관심 없는 업종 꾸역꾸역 배우기보다는 잘하는 것이 좋다.
사실 '만족'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위 조건들이 꼭 모두에게 해당하는 '충성하는 회사의 조건'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칼퇴근이 제일 중요한 요소일 수 있고 누군가는 급여가 제일가는 조건일 수 있다. 이 조건들의 경우, 즐겁게 일할 수 있으면서도 내 삶을 침해받지 않는 회사의 선택 조건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운 좋게 충성할 회사를 현재 찾았으니 오늘도 열심히 달려야겠다. 매일매일 이 마음이 오랫동안 변치 않고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