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하는 상사에 대한 고찰
점심시간, 길을 가다가 과거에 정말 처절하게 나를 힘들게 했던 상사를 길에서 마주쳤다. 인사를 하기에는 어색한데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기에도 애매해서 가볍게 목례만 슬쩍 건넸다. 씹혔다. 하, 열 받아.
그녀가 했던 수많은 비인격적 발언과 비이상적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때는 정말 그녀가 뭐라고 죽을힘 다해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회사를 다녔을까. 일종의 가스라이팅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게 옳은지 그른지 판단력이 흐려져 퇴사라는 결심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녀를 비롯한 많은 상사들은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거나 실언 수준의 발언을 할 때가 많다. 아무리 좋은 상사여도 한 두 번쯤은 이격이 생기게 마련인데, 매번 짖기만 하는 상사 아래 있으면 회사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우스갯소리로 꿈이 없던 사람이 회사를 다니며 꿈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퇴사'라는 꿈.
사장, 팀장을 비롯한 상사들은 가끔 뇌가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이 있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뱉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고 자체가 정상이 아니니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뇌가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다. 그 있는지 없는지 의심되는 뇌에서 나온 몇 가지 터무니없는 발언과 행동, 소개해본다.
왜 우리는 구글처럼 혁신을 하지 못하냐고 팀원들을 쪼기 시작한다. 구글 같은 소리 한다. 혁신이 무슨 색칠공부도 아니고 대충 말로 밑그림 던져놓고 해오라면 다 색칠되는 줄 안다. 중간중간 계속 바뀌는 말 때문에 밑그림도 갈수록 이상해진다. 이럴 때는 인공지능 로봇이 빨리 보급화돼서 저 인간이 과거에 했던 말과 지금 한 말의 매칭률 - 20% 언더로 확신한다. - 이 얼마인지 계산해줬으면 좋겠다.
구글같이 일할 수 없냐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아마도 '기사 같은데 나오는 구글 직원들 보면 참신한 아이디어도 많고 그걸 실현해내서 혁신의 선두주자가 되던데 너희는 어찌 된 게 매번 같은 일과 말만 반복하냐. 다람쥐야?'겠지. 자, 그럼 구글러들이 왜 그렇게 '혁신'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는지 몇 가지 조건을 보겠다.
먼저 구글러들은 하루에 20% 업무 외 딴짓하는 문화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패가 두려워 참신한 아이디어를 꽁꽁 숨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만든 문화다. 그 딴짓에서 G메일이 탄생했다지? 두 번째, 뉴글러모자 제도라는 게 있다. 새로 들어온 구글 직원은 경력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든 자유롭게 문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제도다.
2개 먼저 우리 회사에 대입해 상상해보자. 만약 내가 구글러들처럼 사무실에서 딴짓을 하면 내 상사는 과연 그냥 보고 있을 수 있을까? 인사평가에 '근무태만' 한 줄 추가될 뿐이겠지. 질문하는 환경은 또 어떤가. 입사한 지 1-2주만 지나도 이제 들어온 지 제법 됐으니 슬슬 뭐라도 보여야 되지 않냐고 쪼임 당하기 시작하니 뭐 하나 편히 물어볼 수도 없다. 하여간 성격들 참 급하다.
그밖에도 구글은 회의 겸 근무 가능한 카페테리아, 자율 출퇴근(심지어 최소 시간 기준도 없는 근무유연제), 반려동물 동반 출근, 자율적 근무환경(재택, 원격 등)등 크리에이티브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심리적, 물리적으로 다양한 환경을 제공한다.
일반적인 회사의 경우도 따라 한다고 카페테리아를 가져다 놓는다. 단, 그 밖의 엄격한 질서와 위계, 통제 등은 그대로 남겨둔 채. 철저하게 직원을 회사 안에 가둬두면서 애지중지(?) 업무를 지켜본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제대로 못한다고 욕먹고 시키는 대로 하면 창의가 없다고 욕먹는다.
혁신적인 사고와 창의는 상사가 볶는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혁신적인 기업의 환경을 세팅한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능력이 된다한들 아이디어만 꺼냈다 하면 시키는 거나 잘하라고 한소리 듣는데 말이나 꺼내겠나. 시답잖은 소리도 진지하게 받을 준비가 됐을 때 창의라는 단어를 꺼내라. 환경도 조성 안됐는데 혁신은 무슨. 구글 같은 소리 하네.
구글에 이어 참 많이도 등장하시는 분이 계시다. 잡스행님. 애플의 창시자이자 세계 최고의 기업가와 롤모델로 불렸던 그가 왜 회사에서 비교대상으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약간 이상할 정도로 많은 상사와 개발자들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왔다. 다들 뉘앙스나 발언의 컨셉은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스티브잡스처럼 생각해'였다.
스티브잡스처럼 생각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애플이 태초부터 '플랫폼'이 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발전시켜온 것처럼 우리도 인류가 생각하는 것보다 먼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인사이트 가 있는 기획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겠지? 그럼 내가 그런 인사이트가 있다고 한들, 나에게 그 발언을 한 그대들은 워즈니악과 같은 천재적인 기술력과 파트너십, 동료애가 있는가? 어디서 함부로 그 이름을 놀려.
잊지 마라. 우리는 보통의 일반 회사원이다. 일부 책이나 글들에서 창의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몇 가지 방법, 혁신을 이끈 몇 명의 인물 등 저세상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오늘 하루도 다시 잘해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는 일반 회사원이란 말이다. IT인에게 신적인 존재를 일개 기획자와 비교하지도 기대하지도 말아달라. 일반인이라고 꼭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법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있을 거다. 근데 난 아니라는 거다.
나는 기본적으로 운이 따라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때문에 큰 기대 없이 목표를 설정하고 적당한 수준으로 능력을 키워간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정도의 능력과 현실 가능한 수준의 목표가 만났을 때 포텐이 터지는 거다. 혁신을 이끈 그들도 그렇게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편이다.
스티브잡스가 '나는 정확히 2년 3개월 하고 6일 뒤 애플이라는 회사를 창립해서 이 세상 플랫폼을 장악할 거야.'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도 그의 자리에서 그저 묵묵하게 해야 할 일을 했고, 주변의 다양한 환경들이 더해지면서 그에게 당시 멋진 인사이트를 제공해준 것이다.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인사이트, 단어 참 좋다. 근데 이게 돈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제 아무리 부자여도 못 산다. 어찌 보면 평등한 능력이다. 그렇기에 인사이트가 없네 있네 따지지 말고 그냥 제 자리에서 묵묵히 그 일을 잘 처리해내길 바란다. 언젠가 훗날, 그 묵묵함이 찬란함으로 변하는 그 날을 기대해보자. 물론, 안 올 수도 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인데 그냥 해보는 거다.
이제, 그 위대한 인물을 한낱 얕은 주둥이에서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확 꼬매버리기 전에.
타 팀에서 연락이 온다. "이번에 이런 툴을 도입해서 데이터를 분석할 거고 저런 툴을 도입해서 기획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가이드를 드릴 겁니다. 아주 혁신적일 거예요." 아, 정말 여기저기서 무슨 유행어라도 되나. 누구 맘대로 혁신이야. 거 혹시, 혁신의 뜻을 모르는 거 아니오?
외국에서 도입한 그럴싸한 툴과 방식, 기법 등 - 가령, 애자일, 그로스해킹 같은 - 또는 어디서 들은 멋진 조직 문화 등을 가져다가 우리 회사와 팀에 적용하려는 상사들이 있다. 좋아 보이는 건 우선 다 갖다 붙이는 거다. 왜 이렇게 상사들은 앞뒤 안 보고 가져다 붙이려고만 하는 걸까.
툴이든 업무방식이든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그것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직원들의 인정이 있어야 비로소 함께 그 변화를 즐기는 것이지, 그 자체가 혁신이라고 해서 우리 조직이 혁신적인 조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간단한 원리를 모르는 상사가 너무나 많다. 가져다 붙이면 우리 팀원들이 멋지다고 어깨를 으쓱할 거라 생각한다. 하여간 착각도 기막히다.
나는 급격한 변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좀 더 반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신문물을 들이기 전에 우리 팀의 지금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 팀원 한 명 한 명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하는 업무의 해결 못하는 병목구간이 존재하고 있는지, 업무의 과중으로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걸 아는 게 먼저다.
다 알고 있다면 필요한 신문물이나 업무 방식 조율이 필요한 구간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일 거다. 그때 해결을 해야지 터무니없이 신기한 거 가져다 놓으면 다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회사가 무슨 유치원도 아니고, 이제 그런 것에 호기심을 갖고 탐닉하고 신기해할 시기는 지나지 않았는가. 어떤 의미로는 상사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나 싶기도 하다.
회사에서 '욕심'이라는 단어는 부정보다 긍정에 속하는 것 같다. 사실, 언제부터 좋은 단어가 됐는지 모르겠다. 나도 인사평가에 이 단어를 뻔질나게 쓰는 걸로 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게 분명하다.
욕심(欲心)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 표준국어대사전
분수에 넘치는 것이 정말 좋은 걸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열의를 가지고자 하는 좋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전 회사 이야기를 해본다. 분수에 넘치게(?) 일을 받아 처리하던 어느 날, 팀장이 다가와 내게 묻는다.
"김대리, 뭐 해보고 싶은 일 없어?"
"네, 딱히..(지금 일도 많아 짜시가)"
"그럼 뭐 바라는 거 없어? 승진이라던가"
"네, 없어요(질문 그만하는 게 바라는 것)"
"김대리는 욕심도 없어?"
욕심부리고 싶지 않은 일에 굳이 욕심을 부려야 할까? 시간낭비다. 팀장은 아마도 내게 뭔가 네가 이것까지 잘 마무리하면 승진시켜줄게. 그러니까 해보고 싶다고 말해!라는 생각을 했겠지. 내가 그렇게 미련 곰탱이로 보였나. 나는 당신 생각만큼 아둔하고 어리석지 않아. 내 회사도 아닌데, 그렇게 충성하고 싶지도 않은데 욕심부릴 이유가 없다.
회사를 다니면 많은 선배나 상사들이 욕심을 좀 더 내라고 '권장'할 거다. 여기서 '저는 별로 부릴 생각이 없는데요' 하면 그대로 낙인찍혀 인사평가가 안 좋아질 거고 '맡겨만 주십시오'하면 일이 터질 거다. 적당하게 잘 넘길 수 있는 꿀팁 하나 전수한다. 욕심을 내라는 선배에게 이렇게 말하자.
"제가 아직 능력은 좀 부족하지만, 한 번 해볼게요."
겸손을 겸비한 그것을 할지 안 할지 미궁으로 빠지는 마법의 문장. 사용해보시기를.
충성하고 싶은 회사를 만났을 때 그 욕심 충분히 부려도 늦지 않다. 게다가 그 합이 잘 맞으면 자연히 성과도 좋게 흐른다. 욕심, 내게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음이 아니다. 소중한 내 욕심을 시간 아깝게 쓸데없는 곳에서 소진하고 싶지 않은 것뿐.
마취총이 있으면 구하고 싶었다. 쏴버리게. 질리지도 않는지 심심하면 쌈빡한 걸 가져오라는 사장이 있었다. 다른 팀은 잘 모르겠는데 유독 기획팀은 말만 들어도 멋진 어드벤처 판타지 소설이라도 써서 제출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들 때가 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서 가져가야 했다. 내가 무슨 창조주야?
그저 정상적인 패턴을 분석하여 잘못되고 있는 구간을 지적하면 우리 회사가 그럴 리가 없다고 보고서를 냅다 던진다. 던지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나는 사장이 원하는 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결국 사장이 보고 싶어 하는 보고서로 탈바꿈한 뒤 겨우겨우 승인을 얻어낸다. 그 승인받은 보고대로 업무를 진행하고 결과가 안 좋으면 사장이 불러서 소리를 지른다. "일 이렇게 개판으로 할래?!" 개가 짖어서 나온 결과물이니, 개판이 맞긴 하다.
가'족'같은 회사일수록 이 상황을 겪을 확률이 높다. 혹시 이 글을 보는 그대가 전 직원의 직급이 사장 뒤로 반 이상이 부장, 차장 이상인 회사를 다닌다면 가능한 빠른 시간 내 탈출하기를 기원한다. 물론 만족스럽게 다닌다면 문제없다. 다만 평균 이상으로 가족회사는 문제가 많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시궁창.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시궁창 속에 빠져나오지 못할 미래를 생각하면 빠르게 탈출하는 것이 현명하다.
좋은 상사들도 분명 많이 존재하지만 가끔 퇴사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상사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스스로가 미쳤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 알려줘야 하는데, 진심으로 알려주려고 하면 도망가거나 부인하거나 성낸다. 또는 우리 회사는 미친놈이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다닌다. 그게 본인인 줄 모른 채 살아간다.
내가 미친놈일지언정 미친놈 없는 회사는 없다. 그 힘들었던 상사를 보고 난 뒤 글을 써내려 봤지만 씁쓸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그들을 나는 이제 진심으로 안쓰럽고 가엾게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그런 말을 또다시 듣게 되더라도 그저 웃고 너그럽게 넘겨주도록 하겠다. 아, 이 정도면 천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