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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일해 달라는 그 말

여자 회사원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단상

by 달하


오래오래 일해주세요.


회사에서 누군가 나에게 이 멘트를 날렸다. 누가 나에게 이런 멘트를 날렸을 것 같냐는 문의에 남편이 대답한다.


"이사님이겠지 뭐"
"땡"
"총괄팀장?"
"땡"
"무튼 윗사람이겠지. 아니, 대체 일을 얼마나 시키려고 오래 하기까지 하래. 아주 못됐네"


틀렸다. 이 멘트를 날린 사람은 우리 팀 막내다.


93년생인 팀 막내가 회식자리에서 나지막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오래오래 일을 해달라고. 상사도 던지지 않는 꼰대 같은 멘트가 우리 예쁜 막내 입에서 나오다니? 이게 무슨...?



오래오래 일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그렇게 일할 수 있어요.


이유는 그랬다. 보수적인 집에서 살아온 막내는 여자는 자고로 집에서 가정에 순종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당연시 여겨지는 집에서 자랐다. 때문에 여자가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고, 팀장까지 맡고 있는 나를 보며 집에서 배워온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워킹맘이 회사를, 그것도 재미있고 당당하게 다니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나 따위가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된다니 부담이 어깨에 척척 얹어졌지만, 한 편으로 그녀가 기대하는 미래가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 젊고 예쁜 후배에게 좋은 선배의 사례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다짐도 생겼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일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늘 다루고 싶었던 주제다. 결혼 8년 차, 직장 10년 차, 5살 아이의 엄마를 역임 중인 인생선배(?)가 슬쩍 그 고민에 탑승해본다. 먼저 결혼 적령기인 여자 회사원이 생각하는 결혼은 어떨지 상상해봐야지. 이미 적령기는 지난 지 오래고 결혼도 해버려서 잘 대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 미혼 여성! 빙의해봅니다. (이게 뭐라고 신나는 거지?!)






결혼, 해야 하나요?

28살, 4살 연상인 남친과 2년 정도 만났고 회사 다닌 지 이제 연차로 4년 정도 됐다. 둘 다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지만 회사를 다닌다. 남친은 자취를 하고 있어서 모아둔 돈이 없고 나는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이제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결혼을 하라고 극성인데 막막하다.

팀장은 결혼도 했는데 맨날 회사에 밤까지 남아서 야구를 본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안 가길래 물었더니 집에 가기 싫단다. 마누라 잔소리에 애는 놀아달라고 매달려서 힘들단다. 와이프가 연애할 때는 일하면서 잘 꾸미더니 아이 보느라 일을 관두고 나서부터는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단다. 저 팀장을 보고 있으면 결혼해도 딱히 좋을 것도 없을 것 같다. 저 인간을 보며 내면에서 소곤소곤 묻는다.

결혼, 이거 꼭 해야 하나?


ⓒPixabay


아니, 안 해도 돼!

자, 인생선배로 돌아와서 대답부터 하자면 안 해도 된다. 결혼은 어디까지나 선택이다. 주변의 극성만 아니면 안 해도 잘 산다. 내 삶인데, 내가 선택하는 거지 정답이 어디 있겠나. 주변에 곧 반백살을 앞둔 사람도 결혼 안 하고 잘 살고 있다. 그것도 너무너무 즐겁게.


그럼에도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꼭 '좋은 결혼'을 하려는 압박부터 버리자.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결혼이란 이상하게 내 주변 엄친딸에게 꼭 하나씩 존재하는 그런 호화스러운 결혼. 미리 결혼한 친구나 선배가 말하는 그 잘난 결혼! 돈걱정 없이 편히 흘러가는 대로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그런 결혼 말이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밝히면 주변의 빌런들이(편히 '언니'로 칭함) 옳거니 하고 훈수를 둘 거다. 배우자는 우선 금전적인 기반이 잘 마련되어 탄탄해야 하고 집은 당연히 해와야 한다며 집이 잘살든 못살든 우선 결혼 전에 받을 것들 - 명품백이나 다이아반지 등 - 은 다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 이 정도 남자는 만나야 '시집 잘 갔다'라고 표현한다. 아니, 그거 그냥 언니들 희망사항 아냐?



내려놓기 실전, 결혼

이왕 다짐한 결혼, 괜찮게 하고 싶어서 언니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한 번의 선택이니 제대로 해야 한다는 그 조언을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다. 마음은 알지만, 상처 받기 전에 그 기대는 겸허히 내려놓자. 조금 서운하게 들릴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결혼 하나 기대도 못하나 싶을 수 있다. 결혼을 기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결혼의 조건이 물질 중심이 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거다.


특히 많이들 못 버리는 게 남자 쪽에서 집을 사 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다. 집 좀 마련해주는 게 뭐 그렇게 큰 기대감이냐고? 자, 둘 다 서울에서 근무한다고 가정하자. 서울 전세 평균 4억이다. 매달 200만 원씩 꼬박 20년을 모아야 4억 8천만 원이다. 땅 만파도 200만 원이 나오는 집이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집을 해오는 건 쉽지 않다. 사람도 괜찮은데 집까지 해온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배우자가 일관되게 나를 대접(?)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내려놓자. 결혼식 준비하다가 소멸해버리는 커플을 제법 봤다. 만족스럽지 못한 물질적 Give&Take와 더불어 가족이라는 변수가 더해지면서 태도가 달라지는 남자. 잊지 마라. 결혼은 가족 대 가족이 하는 거다. 그만큼 신중한 결정이기에 달라지는 태도는 당연하다. 다만, 나의 가치관까지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태도가 변한다면 시간을 좀 갖고 심사숙고해보길 바란다.



사람이 미래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친한 동생이 나를 보면 늘 하는 말이 있다. "결혼하면 언니처럼 살고 싶어". 왜 나처럼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다른 사람들은 결혼하면 힘들다, 하지 마라 말리는데 나는 결혼을 권장을 했다는 거다. 그럼 잘 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들어보니 맞는 말도 같다. 그럼 나는 과연 그토록 '잘난 결혼'을 해서 권장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내가 결혼을 권장하는 이유를 논하려면 밤을 새워야 한다. 짧게 요약하면 앞으로 살 날이 많으니 혼자보다 둘이 낫지 않은가. 물질은 순간의 쾌락, 그에 반해 사람은 평생이다.


결혼 준비를 하다 보면 알면서도 언니들 얘기에 내 결혼의 기반이 초라해 보인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안심하자! 대한민국 인구의 못해도 60% 이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작했고 집 안 받고, 돈이 조금 부족해도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들 살고 있다. 나도 빚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은행의 노예지만 잘 먹고 잘 산다. 결국 잘 사는 조건은 사람이다.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 어떻게 잘살지 즐겁게 궁리하며 사는 것이 결혼이다. 사람에게 집중하자. 정말, 사람이 미래다.






아이 낳는 게 두려운 그대

*자, 이번에는 기혼의 30대 여자 회사원을 빙의해봅시다.(얍!)

존경하던 선배가 아이를 낳더니 퇴사를 한다. 일도 잘하고 당당하고 예뻐서 그렇게 닮고 싶던 선배였는데 아이가 생겼다고 그렇게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 들어보니 선배가 남편보다 잘 벌었다는 거 같았는데 왜 관뒀을까. 감정이 뒤섞인다.

옆 팀의 대리님은 실력도 출중하고 후배들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근데 벌써 몇 년째 대리에서 진급을 못한다. 이유는 딱 하나, 칼퇴근을 하는 것 때문. 회사의 조건은 육아를 위해 칼퇴근을 허락하는 대신 승진을 포기하라고 했다는 것. 맞벌이로 먹고살아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왜 여자만 이렇게 차별을 받지?

아이를 낳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


ⓒPixabay


아이 낳는 것도 선택!

이번엔 워킹맘으로 돌아와서 한 말씀드려봅니다. 출산에 대한 고민은 기혼 여성이면 한 번쯤 거쳐가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고민이다. 위와 같은 사례처럼 많은 회사에서 같은 기혼자임에도 여자라서 불합리한 처사를 받는 경우들이 종종 발견된다.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조차 마음 편히 계획할 수가 없다. 어떻게 쌓아 온 커리어인데, 아이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무조건 회사를 잘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회사에서 여성이 조금 더 눈치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자신의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회사들은 많아지고 있고 덕분에 워킹맘도 이제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애초에 이런 걱정 자체를 하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부부도 많다. 일명 딩크(Double Income, No Kids)가 되기 위해서는 베를린 장벽보다 높기로 소문난 '부모님 장벽'을 넘어야 하지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딩크족은 '경단녀'의 고민 없이 마음 편히 회사를 다닐 수 있다. 출산도 선택이다. 내 인생에서 아이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낳지 않는 것도 선택이 가능하다.



마음 굳게 먹기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게 되면 낳기도 전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 두려움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경단녀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해야 한다. 먼저, 회사를 계속 다닐 계획이라면 회사에 '나는 제법 너의 회사에 도움이 된단다'를 심어놓아야 한다. 일잘러가 되면 출산의 공백 따위, 공백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회사도 있다. 그렇게 회사와 신뢰를 쌓아두자. 회사원으로 평생 먹고살기로 결심했다면, 지금부터 내 커리어를 재정비하자.


커리어 잘 쌓았든 운이 좋아서든 어떻게 복직을 했는데 아이가 자꾸 아프다. 이때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아무래도 아이가 어리면 자주 아파서 시간을 계속 아이에게 쏟아야 하는데 회사를 다니면 시간 쓰기가 쉽지 않다. 정신 바짝 차리고 계획을 짜야한다. 부부가 서로의 시간을 마이크로 매니징 하며 아이를 위한 시간으로 설계를 바꿔가야 한다. 이렇게 아이의 성장을 어느 궤도까지만 올려놓으면 확실히 덜 아프다! 회사에서 원하는 만큼 못해줬던 일은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애초에 쌓아둔 신뢰가 있으면 회사에서 안 자른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애정을 온전히 못준다는 자괴감 갖지 말 것. 아니 가지는 것은 자유지만 그 감정에 과몰입되지 말자. 아이에게 엄마는 하나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활용해서 충분히 사랑해주고 퇴근하고 아이의 자는 모습 옆에 엄마의 온기를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엄마를 잊지 않는다. 온전히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으면 좋겠지만 그런 환경이 안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말자. 마음 단단히 먹고 주말에 최선을 다해서 아이에게 '나는 엄마다'를 시전 하는 거다. 애정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진심이 닿으면 아이는 충분한 사랑을 느낀다.



선택에 당당하자.

앞서 말한 어려움 외에도 맞벌이 부부에게는 아이를 케어하는데 한계가 분명 온다. 나만해도 황혼육아를 하는 친정엄마의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수십 번 관두려고 마음먹었더랬다. 우리 부부는 아이와의 미래를 위해 엄마 외벌이라는 '선택'을 했다. 이 선택에 있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걱정 - 이 글을 참고하자 - 했지만 후회는 없다. 내 삶인데 왜 이렇게 말들이 많아?


이 수많은 고민과 선택, 다짐까지 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경단녀가 된 엄마들이 있다. 주변에서는 그녀들의 빛나는 회사원 시절을 언급하며 아깝다고 표현한다. 그 누구도 경단녀 엄마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할 수도, 혹은 사랑스러운 아이의 성장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든 결국 본인이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에 당당하면 그걸로 됐다.






ⓒPixabay


오래오래~ 일 할게요.


막상 빙의되어 생각해보니 나도 이 두 가지 주제에 대해 고민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계속 말한 것처럼 결혼도 출산도 정답이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고 나는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남의 말에 휘둘려 남 탓하고 살지 않았다. 힘들고 버겁고 지칠 때도 있지만 내가 선택한 이 삶이 뿌듯하고 만족스럽다.


두 가지 선택 모두 분명 쉽지 않다. 다만, 결혼과 출산에 대해 참 말 많은 이 사회의 메아리를 가벼이 흘렸으면 한다. 솔직히 말해서 결혼이든 출산이든 해도 힘들고 안 해도 힘들다. 두려운 그 마음 조금 내려놓고 내가 진짜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이런 힘든 과정을 겪을 우리 팀 막내를 위해, 그리고 우리 예쁜 막내도 나처럼 잘 이겨내고 오래오래 회사를 잘 다니게 해 주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나를 돌아보고 다스려본다.



걱정 말아요, 오래오래~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할게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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