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능력 만들려고 애쓰지 말자
나는 영어를 못한다. 초중고대 합이 16년인데 아직도 영어를 못한다. 이 정도면 안 했다보다 못한다가 맞는 것 같다. 그나마 16년 주입식 교육 덕분에 독해는 어느 정도 하지만 이제 그마저 구글 번역기가 알아서 해준다. 구글 번역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웹사이트 번역쯤 알아들을 수준으로 번역해주더라. 구글은 역시 위대하다.
최근 회사에서 영어권 지사와 협업하게 되면서 영어공부를 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동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영어공부에 발을 들였다. 나 역시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에 몇 십만 원을 주고 화상영어를 신청했고 레벨테스트를 거치고 나서 그래, 다시 한번 열심히 해보자! 다짐을 했다. 이제 막 열정의 불씨를 지피려는데.. 뜻밖의 이슈, 코로나19가 터졌다.
대부분의 화상영어는 선생님이 필리핀 사람이다. 필리핀의 코로나 문제가 심각 수준으로 번지면서 재택근무가 불가한 선생님들이 많아졌다. 나를 담당한 선생님 역시 수업 진행이 어렵게 된 것. 곧 풀릴 줄 알았던 이 죽일 놈의 코로나는 오래도 간다. 그렇게 수업이 장기 중단 상태가 되어버렸다. 기약 없이 영어공부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출근해서 필리핀이랑 얘기할 일이 생기면 다시 어떻게든 해야 된다는 압박과 강박이 생겨서 출퇴근 시간에 cake나 Let's일빵빵 팟캐스트와 같은 영어공부 앱을 켠다. 그렇게 며칠 깨작거리다 접기를 반복하다 문득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이 영어 못하는 게 그렇게 큰 죄인가 싶다. 영어공부, 해야 되나? 내면의 갈등이 시작됐다.
능력(能力)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
정신적인 기능이나 신체적 기능의 가능성
사람은 저마다 알게 모르게 특정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기능을 잘 해내는 것이 능력의 사전적 의미지만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을 때도 능력이 있다고 표현한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쉽게 습득하는 언어 능력, 뭘 배워도 100% 흡수하는 학습 능력, 눈 돌아가는 속도보다 뇌 회전 속도가 빠른 계산 능력 등 선천적으로 능력이 탑재(?)되어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부모님은 위의 모든 기능을 첫째에게 몰빵 하셨고 둘째인 나에게는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를 정직하게 이행할 신체적 능력(?)을 하사하셨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단한 통뼈와 골격까지 물려받아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운동을 좀만 해도 근육이 절로 붙었다. 덕분에 학창 시절에 운동부에서 러브콜 좀 받아봤지.
내가 가진 신체적 능력도 잘만 활용하면 회사 다니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타고난 체력은 무지막지한 업무량으로 인한 야근과 철야가 많아도 전혀 끄떡없다. 새벽 늦게까지 회식을 해도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한다. 뭐야, 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능력은..?
참된 능력을 갖고 싶다. 회사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기능이 필요하다. 가령, 다른 국가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거나 누구에게나 어필될 만한 출중한 글솜씨 따위 말이다. 오빠는 공부도 잘했지만 글도 잘 썼고 언어 습득력도 남달랐으며 심지어 유머도 갖췄다. 체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능력은 다 뺏어간 것 같다. 짜식아, 조금씩만 나눠줬어도 좋았잖아.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아!
다양한 능력을 키우는 것은 나의 미래에 큰 무기가 될 것만 같다. 그렇다면 무작정 열심히 하면, 시간을 대거 투자하면 없는 능력이 생길까? 확신은 없지만 생길 것만 같다. 다만 시간을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 건지 예측이 안된다. 정말 많이 투자해도 그 능력이 생기지 않을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때 버려지는 시간적, 금전적 기회비용은 되돌릴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원이 퇴근 후 무언가 배우려 시도할 때 기본적으로 겁이 먼저 나게 마련이다. 우선 회사를 다니면 오랜 시간을 하나의 능력을 위해 투자하기 쉽지 않다. 때문에 어떤 능력을 배양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언가 배우는 것보다 당장 중요하게 행해야 할 다른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그럼 어떻게 배워야 이놈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지능인의 상징! 회사원이다. 무작정 배우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효율을 따져야 한다. 해야 되니까 해야 할 것 같아서 덤비는 게 아니라 정말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길 때, 그때를 잘 노려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
고3이 됐을 때 이야기다. 다들 수능시험을 위해 분주했고 나는 고2까지 예체능으로 성공하겠다고 깝죽거리느라 국영수 점수는 처참했다. 당연히 내신은 다른 친구들보다 열악했다. '학업'이라는 것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오, 시도해보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렇게 내신관리는 애초에 포기하고 남들 다 하니까 수능 점수라도 조금 올려볼까 학원 근처나 얼씬거리며 공부하는 '척'을 하던 나에게 방과 후 청소시간에 친구 하나가 깐족거리다가 말을 건넨다.
"학원 다닌다고 네 성적이 오를 거 같냐?"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네 가 문제야 멍청아"를 교묘히 기분 나쁘게 잘도 비꼬았다. 똑똑한 놈들은 돌려 까기도 참 지능적이야. 들고 있던 빗자루로 녀석을 KO시키고 뒤돌아 생각했다. 성적? 그거 내가 올려본다. 오기가 생겼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3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았고 나는 전교 16등의 쾌거를 이뤘다.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로 성취감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신이 처참했던 상태라 편도 2시간 거리인 저 멀리 짱 박혀있는 전문대 공대를 들어갔다. 공대 아름이(당시 우리 과에 여자는 나 하나였다.)가 되어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학교를 다녔고, 부모님의 참된(?) 경제교육 덕분에 대학생이 되자마자 학교가 끝나면 알바를 했다.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오빠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힘들게 돈 좀 벌고 왔다는 우쭐함을 드러내며 나는 물었다.
"그림 그리는 거 안 지겹냐? 그거 돈도 안되잖아"
"그러는 넌, 그런 대학 나와서 뭐할 건데?"
'그런' 대학? 우리 학교가 어때서? 이번엔 집안의 지능적 분노 유발 만렙, 친오빠가 직설적으로 깐다. 사실 대학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면 열이 받지도 않았을 터. 이 대학은 별로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속상했다. 애초에 좋은 능력 다 갖고 태어난 주제에, 네가 뭘 알아!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가 단순히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권 4년제를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 '청년실업' 문제가 부각되고 있었다. 오빠처럼 할 줄 아는 게 있으면 모를까 딱히 특출 난 능력이 없는 나는 미래가 불안했다. 그래서 편입을 준비했다. 오빠가 무시한 것 때문도 있었지만 4년제 대학 졸업장을 갖고 싶었다. 그렇게 편입 준비 1년 후, 인서울 4년제에 입성했다. 합격소식을 들은 오빠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잘났는데 착하기까지 하다. 왠지 모르게 분해.
전교 등수에 든 것도, 편입 성공도 내가 가진 능력치만으로는 불가능한 결과들이었다. 나는 두뇌 회전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끈기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하고 싶을 때' 했던 것이다. 하려는 의지가 생기거나 하고 싶어 졌을 때 그 능력을 키우면 시간 대비 고성능을 획득할 수 있다. 상당히 효율적이고 시간비용을 따져 봤을 때 가성비가 좋다. 정말이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회사원들은 상사에게 동료에게 하물며 후배에게도 알게 모르게 자기 계발을 강요받는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시작은 했는데 맘처럼 안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자. 대부분의 목표가 실패한 것은 그대가 잘못된 방식으로 해서도 노력을 덜 해서도 아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뿐.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핑계 아니다!
나는 언어를 습득하는 기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놈의 영어실력 키우겠다고 수년간 엉덩이 붙이고 노오력 해봐야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애초에 이 능력은 신이 정해놓았고 없는 사람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엄청난 양의 시간과 집중력을 쏟아야 그나마 조금 습득하게 된다.
그럼 나는 평생 영어를 못하고 마는 걸까? 아니, 할 수 있다! 나도, 당신도 할 수 있다. 다만 하고 싶을 때 해야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게 열등감에 의한 것이든 타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하고 싶은 때가 되어야 한다. 영어 외의 자기 계발을 강요받는다 해도 하고 싶지 않으면 가볍게 흘려보내자. 없는 시간 쪼개며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의심되면 정말 안되는지 시도해봐도 좋다. 시간 낭비할 것 뻔하지만, 내 시간인가 뭐.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 단지 지금이 할 때가 아닐 뿐이다. 어떻게 해도 맘같이 안 잡히는 영어, 어차피 지금 해도 안될 거 구질구질하게 붙잡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잡히겠지, 좀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회사에서 압박은 있겠지만 영어 못한다고 설마 자르겠어. 노력이 능력으로 바뀌는 때, 그 기회는 올 것이고 그때 하면 된다. 오늘부터 나는 나에게 출퇴근 시간은 충분히 숙면할 것을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