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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바다를 선물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선물

by 달하
이런 날이 필요했다.


엄마, 회사원, 딸, 아내. 한 명에게 붙는 여러 수식어를 내려놓고 온전하게 쉼이 필요할 때가 있다. 출근을 하기 위해,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미처 다 깨지 못한 졸음을 깨며 겨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담담하고 잔잔하게 가벼이 눈이 떠지는 날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생각할 요소를 제거하기로 한다. 엄마로서 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일일이 챙기거나 회사원으로써 생각해야 될 보고서는 잊기로 한다. 딸로서 엄마 잔소리 긴장도를 유지할 필요도 없고 아내로서 집안 살림을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한 명의 인간에게 여러 역할이 생기는 순간, 혼란은 올 수밖에 없고 집중하는 역할은 지속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집중하지 못한 역할에 대해 좌절을 하게 되고, 이런 순환이 지속되면 스스로의 에너지는 계속 사용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가끔은 수많은 역할들을 잊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여 에너지를 충전시켜야 한다. 잠시 쉴틈이 생긴다 해도 또다시 여러 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에너지를 꾹꾹 채워 넣어야만 한다.


출근 버스를 기다리는 차가운 공기, 출근 준비에 복작거리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사고들이 즐비한 회사, 맥주의 도움 없이 온전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없는 퇴근길, 주변인들의 잡음과 심란함을 극대화시키는 언론까지. 어차피 다시 반복되는 하루겠지만, 오늘만큼은 과감하게 잊기로 한다.


20대는 그랬다. 떠나기 전부터 마치 소녀가 된 것처럼 설레는 마음에 잠도 못 이루고 혹시나 빠진 게 없는지 체크하고 또 체크를 했었더랬다. 동행자와 계획 짜느라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벌써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기대감에 부풀어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것의 기대도 없다. 온전하게 나의 쉴틈 없는 뇌에게 쉼이 필요하고 바삐 움직이는 심호흡에게 안정을 되찾아주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잠시 멈추고 조금은 여유롭게 생각하고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관대함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렇게 나는, 바다에 도착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광활한 바다가 무섭기도 하지만 푸르르고 맑은 바다가 주는 순박함을 충만하게 즐기기 위해 이 어려운 시국에 나는 바다를 찾았다. 결심까지는 쉽지 않았다. 혹자는 요즘 여행을 가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가치 있는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바다를 찾았다.


동행자와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오랜만에 거짓 없는 웃음을 내비쳤고 바다를 보며 옛 추억에 잠시 잠기기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며 흐뭇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앞으로의 미래도 나름대로 다잡는 시간이 되었다. 바다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나는 바다로 인해 많은 것을 얻어간다.


수많은 역할로 힘에 겨울 때, 자신의 역할과 분리된 시간을 선물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용기임을, 의무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렇게 오늘, 나에게 바다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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