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성 인간의 조율하는 삶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MBTI로 행동 분석을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너도나도 MBTI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란?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가 융(Jung)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검사
나 역시 소극적 관종끼(?)가 있기 때문에 남들 다 하는 건 대체로 따라 해 본다. 인터넷에 떠도는 12분짜리 짤막한 MBTI검사를 했고, 나의 성격 유형은 ENFJ로 '정의로운 사회운동가' 타입이란다. 정의롭다니, 벌써부터 결과가 의심스럽다.
MBTI의 성격 유형보다 눈이 갔던 것은 각 요소별 '비율'이었다. MBTI는 4개의 알파벳이 뜻하는 '선호경향'이라는 요소들이 있는데 어느 성향에 더 가까운지 판단해서 알파벳이 완성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선호경향 항목이 51:49와 같은 형태의 비율로 분포된 것이 눈에 보였다. 외향도 내향도 아닌 나 같은 어중간한 인간의 성향을 '양향성(Ambiversion)'이라고 부른다 하더라.
양향성의 소유자들은 이 모든 특성(내향, 외향)을 가지지만, 어느 한쪽이 더 지배적이지도 않다. 이들은 더 균형 잡히고 미묘하며, 개성적인 성격을 보인다. - 네이버의 어느 기사에서 발췌함.
양향성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내향과 외향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사람보다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성향은 매우 무난하고 유연한 성격처럼 보인다. 삶에 큰 동요 없이 살아갈 것만 같은 성향이다.
좋은 것만 갖다 붙여 놓으니 나이스한 성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흔해빠진 성격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누구나 하나쯤 있을 것 같은, 나는 그렇게 세상 흔한 양향성 인간이다.
태초부터 양향성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활달하고 감정에 솔직한 외향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아마도 나의 양향성은 아빠사건 이후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만큼의 충격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도 크게 다가오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상황을 너그럽게 바라보게 됐고 내 감정에 여유롭게 대처하게 된 것 같다.
특정 사건 이후로 '만들어진' 후천적 성격이기 때문에 이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내면에서 제법 써야 한다. 최대한 감정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매일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을 조율을 한다. 이로 인해 하루를 마무리할 때가 되면 피로도가 상당하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생각처럼 안되더라. 특정 사건 이후로 인지행동이 바뀐 것이라 예전같이 모든 상황에서 마음에 솔직해지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게 된 거다. 사실 이전에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 성향이 굳어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양향성, 이 성향에 대해 조금 더 파헤쳐본다.
종종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때면 나사 빠진 인간처럼 굴거나 각성상태가 장시간 유지될 때가 있다. 주변인들의 시선이 따갑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에 비정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때문에 정상인(?) 범주에 들기 위해서는 항상 내면의 감정을 주의 깊게 신경 쓰고 주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출근을 하자마자 팀장님이 나를 찾는다. 그러더니 대뜸 네가 쓴 기획서가 쓰레기인지 기획서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하며 출력해놓은 기획서를 내 얼굴에 뿌린다.
극내향이라면 당장은 아무 말 않고 나왔을 것이고 극외향이라면 분에 못 이겨 한 소리라고 던지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양향은 다르다. 내면에서 A4용지에 맞은 노여움은 30% 줄이고, 쓰레기 기획서에 대한 슬픔은 13% 정도 줄인다. 팀장님이 기획서를 꼼꼼히도 봐주셨구나 하는 말 같지도 않은 기쁨과 즐거움을 45% 정도 확 늘려본다. 감정 조율을 끝내고 Submit.
A4용지를 주우며 한 마디를 건넨다.
"팀장님, 기획서에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아마도 현실세계면 팀장새끼에 대한 노여움이 2000% 상승하고 헤드샷을 날려야 하는데 싶겠지만, 예시일 뿐! 이런 식의 감정 조율을 통해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희로애락 하나하나 세밀하게 조율한다.
양향성은 좋게 보면 언제 어디든 조화로워 보이고 나쁘게 보면 약간 무신경하고 겉도는 스타일로 보일 수 있다. 내향이나 외향처럼 뚜렷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 친해지기에 유용하게 작용하는 성격이다. 극명하게 좋고 나쁨이 없기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괜찮다. 나에게 큰 불쾌감만 주지만 않으면 대부분의 성향을 수용한다.
다만, 혹시라도 양향성과 함께 쇼핑을 하게 된다면 다소 답답할 수 있음을 주의하라. "이건 어때?"라고 물어보면 "오 좋은데."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나올 확률이 약 90% 정도에 달한다. 절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상대가 좋으면 그것으로 됐다는 생각 때문에 좋다고 하는 것. 이 대답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요새 일부러 좀 외향성인 척을 할 때도 있다. "다른 컬러도 입어봐" 사실, 그게 그거다.
혹시나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파기되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약속에 크게 기대하는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잡아뒀던 여행을 파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당연히 누구든 일이 있을 수 있고 대체안을 찾으면 된다. 크게 마음 다치지 않으니 걱정은 노노. (개인차 있을 수 있음 주의)
가끔 양향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로 인해 상대가 뜻하지 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외향성이 짙은 사람들은 쿨하게 넘길 수 있겠지만 내향인 사람에게 잘못 꺼냈다가는 큰 상처를 주고 만다.
연인 사이에 양향과 내향이 함께라면 특히 많이 발현될 수 있다. 대화를 하다가 양향이 "아, 좀 마음 편히 쉬고 싶다."라고 하면 내향은 둘만의 여행을 제안한다. 아니, 마음 편하게 '나 혼자' 떠났다가 오고 싶다고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표정이나 대화가 단절이 되는 오싹함을 느낀다. 상대는 상처를 받는다.
친구 간에도 있을 수 있다. 이번에는 외향이 단체로 가는 여행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양향은 멤버를 물어보고 본인이 갈만한 자리인지 판단한다. 외향은 멤버를 물어보는 것 자체에 약간 화가 난다. 어차피 다 같이 친한데 같이 가서 그냥 편히 쉬다 오면 되지 않냐고 윽박지른다. 상대는 상처를 또 받는다.
양향성은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공간 자체가 결코 편한 공간이 아니다. 그게 연인일지라도 친구일지라도 그 공간 안에서의 상대의 반응, 대화의 양과 질 등 챙겨야 될 감정이 많기 때문이다. '편하게 쉰다'는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오롯한 '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혹시 나랑 있는 게 불편한가?라는 생각으로 괜한 상처 받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매일 여러 사람들과 일을 하고 예상치 못한 이슈가 봇물처럼 터지는 지루할 틈이 없는 회사원이다. 항상 주변의 상황과 감정, 표정을 살피고 대화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좀 더 기민하고 민첩하게 감정을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에 빠르게 감정을 조율하기 위해 이용하는 몇 가지 도구가 있다.
유난히 분노지수가 높은 날, 이 감정을 그대로 유지하면 상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설 때가 있다. 이럴 땐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같은데 심어진 심호흡 기능을 활용하면 도움이 된다. 심호흡은 감정을 조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주기적인 심호흡을 통해 노여움의 수치를 조금 낮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사람 관계에 치여 아무런 의지가 없고 지치는 경우는 법정스님의 책을 이용한다. 법문집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내면을 다진다. 그렇게 내면에 평화가 찾아오면 사람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는 티끌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지친 감정은 자연스럽게 차분해진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난 정말 종교인이 아니다.
오랜 기간 조율하다 보면 결국 뻗는 날도 온다. 이런 날은 몸이 아프거나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혼자 치열하게 외로움을 즐기는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 그 순간만큼은 내면을 OFF 시켜두고 남 눈치 안 보고 휴식을 즐긴다. 그렇게 감정을 회복하고 나면 또 정상 조율 시스템 가동!
이제 양향성 인간이 어떤지 대략 봤으니 양향성 인간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주변에 양향성이 탐지되면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 잘 써먹길 바란다.
1) 의견 조율이 필요할 때
제3자가 되어 상황을 바라봐야 할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양향성은 주관적인 의견도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주의다. 어느 쪽으로도 편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관계의 문제 해결이나 조직 간의 의견 조율을 하는데 능한 편이다. 또한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남녀의 연애상담에도 꽤 쓸만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하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참 별난 성격이다.
2) 공감이 필요할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 공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고개를 끄덕여줄 사람이 필요할 때 만나면 좋다. 대체로 어떤 현상에 대해 크게 치우쳐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
양향성은 경청하기보다 맞장구를 치는 편이 편하다. 상대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엄청난 기쁨이든 깊은 슬픔이든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 만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3) 여행 메이트
대체로 뭐든 잘 맞추는 성격이라 어지간히 싫은 게 아니면 원하는 계획한 대로 여행을 평탄하게 즐길 수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많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즐긴다.
특히 게스트하우스는 가고 싶은데 혼자 가지 못할 때 데려가면 정말 적합하다. 중간에서 조율하면서 분위기도 이끌고 개인적인 영역은 침범하지 않으며 개개인들이 물들어 대화하도록 환경을 제공한다.
주변의 양향성을 만나게 됐을 때, 질문에 대한 답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조급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면에서는 열심히 감정을 조율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노여움 13% 감소, 기쁨을 27% 높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