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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올 것 같았던 그 날이 왔다.

지난 프로젝트를 돌이켜보며

by 달하


프로젝트의 대장정을 끝냈다.
즐거웠다!


장기 프로젝트를 할 때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내 상황이 어떻든 시간 흐르는 것을 보고 있자면 참 얄밉다. 언제 끝나나 싶을 때는 찬찬히 다가오더니 오픈일이 다가올 쯤에는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온다. 밀당의 고수다.


최근 회사에서 대규모 프로젝트가 막을 내렸다. 프로젝트 실무야 팀원들이 다 했지만 나 역시 여기저기서 오는 문의에 대한 답변, 상사와 대표님께 보고해야 할 로드맵 계획, 변화된 서비스의 브리핑과 교육 등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실무자도 팀장도 함께 정신없기는 매한가지.


참 즐겁게 일했다. 물론, 항상은 아니었지. 초반에 잡아뒀던 컨셉이 전부 뒤엎는 일도 겪었고 타 팀과의 불화, 일정에 쫓겨 공들여 기획한 것들을 걷어내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프로젝트는 가장 가깝게 일하는 사람들 덕분에 참 즐거웠다. 힘들 때마다 시답잖은 농담도 하고 담소도 나누면서 힘듦을 함께 이겨냈다. 즐거웠던 만큼 결과도 좋았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은 멋진 프로젝트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다 끝내고 나니 오래전 회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팀에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던,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못하는 캔디가 되어 홀로 쓸쓸히 끝내야만 했던 약 7개월 간의 프로젝트. 나의 첫 장기 프로젝트였다.






입사 3개월 차, 팀장은 대규모 사이트 개편 프로젝트를 내게 맡겼다. 내가 PM 겸 기획을 함께 맡고 개발자 4명, QA 3명, 디자이너 2명, 퍼블리셔 2명이 붙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프로젝트겠지만 이제 입사한 지 갓 3개월 차에게 7개월이라는 장기간을, 그것도 아직 서먹한 타 팀 사람들과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잘 해내고 싶었다.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 까짓 거, 해보자.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었다.

개편해야 하는 사이트는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쇼핑몰이었다. 그런데 쇼핑몰이라고 하기엔 메인 페이지에 광고 배너 영역이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때문에 고객들이 진정 보고 싶고 봐야 하는 상품 리스트는 최하단에 텍스트로 조그맣게 있었고, 필요한 게 있어서 보려고 들어왔는데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문의가 자주 유입됐었다. 나름대로 쇼핑 포털 성격을 갖고 있는데 검색창이 우측에 조그맣게 달려있어 검색부터 어려운 사이트였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하던 찰나, 이 사이트를 개발했던 개발 차장님께 과거에 이 사이트가 제휴나 영업을 통해 연명하던 페이지라는 것을 듣게 됐다. 그랬기 때문에 마케팅팀에서는 제휴 위주의 페이지 구상을 원했고, 당시 마케팅 팀장과 친분이 가장 두터웠던 우리 팀장이 아래 직원을 시켜 제멋대로 만들어둔 사이트였다고. 어쩐지, 기획자가 원해서 만들었다기에는 마트 전단지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토록 엉망인 사이트임에도 사용자들은 후기를 자발적으로 많이 남겨주었고, 바라는 모습을 메일로 꽤 많이 보내주었다. 이런 사용자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곳곳에 즐길 수 있는 콘텐츠들을 담아 락인 요소들을 배치하고자 했다. 제휴기반이 아닌 사용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커머스 사이트로 변화시키고 싶었다.


나는 프로젝트 일원들의 브레인스토밍을 기반으로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디자인팀은 최신 디자인 트렌드를 서칭 해갔다. 개발팀도 가능한 의미 있는 데이터를 빠르게 추출해주었다. 덕분에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용 동선과 실제 자주 사용되는 페이지를 추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팀이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가며 열심히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내가 PM이 된 이유

팀장은 워낙 어제와 오늘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페이지가 하나 완성될 때마다 팀장에게 보고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같이 바쁜 사람이 그걸 언제 그런 걸 다 하나씩 보겠냐고, 네가 알아서 하고 나중에 한 번에 보고하란다. 분명 나중에 딴소리할게 뻔했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하라는 대로 프로젝트 일원들끼리 합을 맞춰가며 스토리를 짰다. 기획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될 때쯤, 팀장이 부른다.


"거, 어느 정도 됐나 기획은?"

"내일 전체 페이지 리뷰 드릴 예정입니다."

"그래? 스토리보드 보내봐"


보낸 지 5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회사가 떠나가라 크게 내 이름을 여러 번 우렁차게 호명한다. 목소리부터 화가 잔뜩 났다.



야!! 너 기획자 맞아?


"메인이 아주 개판이 됐어!"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
(말 자르고) "됐고, 이거 기존 광고 배너로 교체해"
"팀장님, 저희 사용자들이 커뮤니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요. 구매 전환율도 여기를 통해 클릭됐을 때 가장 많은 매출을 내고 있고요.. 그래서"
"야, 내 경험이 얼만데.. 너 지금 내 말 무시하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확 물어버렸어야 했는데



단순히 메인 페이지 디자인만 딸랑 바꾸고 싶어 하는 팀장. 사이트의 반을 차지했던 광고판을 다시 살리라 명했다. 평소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일하는 기획자를 프로젝트에 배치해놨으니 디자인만 바뀐 새로운 예쁜 전단지가 만들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가 이 프로젝트 PM에 나를 픽한 것은 원하는 그림을 그려줄 화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내부의 적이 하필 팀장

그렇게 프로젝트가 꼬여갈 때쯤, 동종업계 경쟁사에 있던 과장님이 새로 입사했다. 연차는 팀장보다 낮았지만 그 당시 생소했던 개념인 UX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었고 대표님이 몸소 모셔온 인물이었다. 그가 오고 나서 처음 맡은 업무는 우리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방향 검토였다.


아무래도 이제 3년 차 병아리 기획자가 짜 놓은 기획안이 그의 맘에 쏙 들리 없겠지 싶어 자신감 없이 기획안을 과장님께 내보였다. 그런데 웬일, 아이디어나 스토리가 너무 좋다고 조금만 손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서비스가 될 것 같다고 하는 것이다. 대표님은 그의 말에 우리 아이디어에 손을 들어주었고 팀장은 얼굴이 빨개지며 화를 삭이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날 팀장이 아니었다. 그는 본인의 거래처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박박 우기기 시작했고 기어코 대표님께 징징거렸다. 대표님은 나를 따로 불러 팀장이 원하는 일부분을 반영할 수 없겠냐고 부탁하셨고 나는 과장님의 도움을 받아 서비스의 흐름에 해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절충안이 나왔다. 이 절충안을 만들기까지 팀장과 수십 차례 부딪히고 싸워야만 했다. 왜 팀 내에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기획만 두 달 이상 걸렸다. 다른 팀의 실무 시간이 확보가 안됐다. 제휴사와 약속된 오픈 일정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일정은 맞춰야 했고 결국 나는 QA팀의 일부 테스트 영역을 받아 같이 밤을 꼬박 새우며 테스트를 진행했다. 내 전문분야는 아니었지만 QA팀의 TC(Test case)가 워낙 잘 갖춰져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테스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순번 케이스를 끝내고 버그가 0이 된 순간, 테스트는 마무리됐다. 오픈만 남았다.



배포합니다!


개발자가 배포 완료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모두가 숨죽여 모니터링을 시작했고, 2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팀은 서로서로 어깨를 도닥이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제야 얼굴이 미소를 띠고 정말 고생했다며 서로를 응원했다. 그리고는 각자 팀에 가서 다들 고생했다고 삼삼오오 모여 뿌듯하게 결과물을 관찰하곤 했다.


나도 7개월 만에 우리 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홀로 앉아 잘 갖춰진 사이트를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팀장이 아무리 지랄을 했어도 고생했다는 한마디는 해주겠지 내심 기대했다. 그렇게 싸웠어도 나의 팀장인데, 그토록 장기간 고생했는데 수고했다는 한마디는 해주겠지. 그러나, 그는 외근 간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나갔다. 그 어떤 응원도 격려도 없었다.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는 그 어떤 가족도 없었다.


그날 밤, 타 팀에서 프로젝트 일원끼리 한잔하자고 제안을 했다. 시끌벅적함 속에 홀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갑자기 너무 외로운 마음에 엉엉 울어버렸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곳이 없어서 너무 외로웠다고, 그렇게 잘 견디고 힘들게 팀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그렇게 몇 분을 펑펑 울었다. 타 팀에서 어깨를 토닥이며 넌 좋은 기획자였다고 팀장에게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나를 응원해주었다.


그러나 난 연연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 주, 퇴사 의사를 밝혔다. 팀장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지금 자기더러 네가 싸놓은 똥 치우라는 거냐고, 너 동종업계에 다닐 거면 자기가 입 한번 놀리면 이 업계에 다시는 발들이기 힘들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겁나고 무서웠지만 상관없었다. 여기만 아니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그가 입을 안 놀린(?) 덕분인가 그 동종업계에서 나는 참 잘 먹고 잘살고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고, 퇴사


잔인하게 참아냈던 캔디는 그렇게 퇴사라는 최후의 선택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비슷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팀장의 위치에서 진행해왔다. 그렇기에 더욱이 우리 팀의 그 누구도 나처럼 캔디가 되지 않도록, 참으면 병 된다고 외롭고 슬프면 울어도 된다고 옆에서 독려하고 응원했다. 적군들의 방어막이 되려 했고 힘들어할 때 공감하고 일이 잘 풀리면 누구보다 더 많이 기뻐했다.


돌이켜 봤을 때 이 프로젝트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외롭고 쓸쓸했던 나와는 다르길 바랐다. 프로젝트를 힘겹게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던 그 외로움. 이들은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팀원들에게 정말 고생 많았다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모자라지 않을 만큼 전하고 반겼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팀원들의 피땀 흘린 고생을 알렸다. 우리 팀원들 보라고,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그렇게 팔불출처럼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녔다.


팀워크에 이 짤이 빠지면 섭하지


모든 여정을 힘들게 끝내고 돌아온 제자리에 나를 반기는 누군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피와 땀을 서로서로가 알아주는 것. 진정한 팀워크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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