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소독하는 거예요.
8시 출근을 한 날이면 오후 5시에 퇴근해야 정상이지만 단 한 번도 5시 정시에 퇴근을 해본 적이 없다. 5시만 됐다 하면 다른 팀에서 꼭 뒤늦게 찾는다. 분명 사내 메신저에 퇴근시간이 17시로 표기되어 있는데, 왜 꼭 5시에 찾을까? 사실 딱히 할 것도 없지만 그냥 기분이 더러워진다.
겨우 더러워진 기분을 다잡고 퇴근을 준비할 무렵 동료가 메신저에 사람들을 소집한다. "오늘 날씨가 소주를 부르고 있습니다~" 빠질 수 없지, 오늘은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날이다. 참석!
마음 맞는 소수 정예 멤버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잠시 나사를 풀어두고 들어가는 대로 마신다.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모를 지경이 되면 한껏 상기되어 모두가 한 곳만을 바라보고 발걸음을 옮긴다.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맥주를 주문한 뒤, 주옥같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냅다 질러댄다. 그렇게 회식의 마지막은 손에 늘 마이크가 잡혀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회식은 대체로 즐거운 기억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회식이 이토록 즐겁고 신나는 일이기만 했을까. 돌이켜보면 회식은 회사를 안전하게 다니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 지긋지긋한 사회생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에게 첫 회식은 로망과도 같았다. 드라마에서 보면 회사원들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치맥으로 풀면서 멋지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멋져 보였거든. 친구들하고 술을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첫 회식부터 내 로망은 산산조각.
첫 회사는 모든 회식에 항상 이사님들이 꼈다. 이사님들은 신입사원만 들어왔다 하면 관례처럼 19금 질문들을 던졌다. 요새 같으면 성희롱으로 벌금 좀 물었을 듯.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내게는 상당한 문화 충격이었고 19금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신입인 나와는 달리 경력직들은 그 질문에 천연덕스럽게 잘도 대답하더라. 그렇게 어른들의(?) 대화를 힘겹게 견뎌냈다.
회식뿐 아니라 업무도 이 회사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 퇴사를 결심했고 회사는 예의상 퇴사 회식을 열어줬다. (필요 없는데..) 다들 회사 돈으로 먹는 꽁술에 신이 났는지 잘도 들이키더니 결국 술에 취한 꼰대 과장이 한 잔 더 들이켜고 잔을 탁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한마디 건넨다. "야, 회사 다~ 똑같아. 발전? 발전 같은 소리 하네... 회사에서 무슨.." 발전 없는 과장이 나를 훈계했던 나의 첫 회사는 지금 우리 회사의 '을'회사다. 인생 참 재밌다.
그렇게 호기롭게 옮겼는데 두 번째 회사 회식도 거기서 거기였다. 꽁한 것으로는 제일가는 부장님과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난 차장님, 딸랑이를 온몸에 장착한 과장님, 말없이 술만 들이켜는 대리님들. 정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주도 마셔댔다. 왜 이 모임을 계속 갖는지 의문이었지만 말단 사원인 나는 아, 이게 회사생활이구나 하며 참아냈다. 그냥 업무가 술 먹는 것일 뿐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갑회사에서 초대한 회식을 가면 더 처참했다. 회사에서는 그렇게 기세등등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기획자는 말이야~" 하면서 나를 가르치던 사수는 이 회식만 가면 거의 술 먹는 노예가 됐다. 사수가 노예가 되니 나도 당연히 말단 노예. 술만 먹으면 괜찮다. 물 떠오랴 반찬 리필하랴 알바인지 회식인지 구분이 안됐다. 덕분에 사수에 대한 후광 같은 것은 빠르게 사라지고 쟤도 그냥 별 볼일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동료 중에 사수를 좋아했던 여직원이 있는데 술이 좀 들어가면 회식자리에서 사수에게 듣기 힘든 애교를 피우곤 했다. 아, 지금도 상상만으로도 곤욕스럽다. 차라리 철야든 야근이든 하고 싶었다. 그 좋아하는 술 먹는 게 매번 그리도 힘든걸 보니 회식은 업무가 확실했다.
혹시나 대기업 회식은 좀 매너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접어두는 게 좋다. 회사가 클수록 기고만장하는 인간들은 수두룩 빽빽하고 그들의 자랑질과 딸랑 질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모두 내 몫이다. 회사 이름이 좋으니 예약했던 회식장소 입구에서는 모두가 대접을 받지만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상명하복. 직급이 낮은 사람이 입구 쪽에 앉아 알바생이 된다.
대리 진급을 하고 승진턱을 팀에 시원하게 - 문화라는 예쁜 포장에 쌓인 강요 - 쏘는 날이었다. 평소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덩치 큰 남자 대리가 나를 향해 네 기획은 맥락이 없다는 둥 선배들한테 꼬리를 친다는 둥 주둥이를 제멋대로 나불거린다. 대리 진급해도 지가 선배는 선배니까 까불지 말란다. 다음날, 기억이 안 난다는 아주 기막힌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한다. 술은 먹었는데 음주운전은 안 했어 그렇지?
집에 가는 길, 여의도를 거쳐가는데 회식에서 술을 얼큰하게 드신 부장님 급으로 보이는 나이 지그시 드신 으르신과 과장 정도로 보이는 남자 셋이 머리에는 넥타이를 매고 어깨동무를 하고 횡단보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그러더니 부장급이 얘기한다.
"너는 개하고 너는 새하고 너는 끼해. 너네 셋은 개 새 끼 . 하하하하하핳!!!"
"크~ 너무 유머러스하셔!! 깔깔."
개목걸이(사원증)에는 대기업 L로고가 박혀있다. 그래. 회사 이름 지켜내느라 니들도 고생이 많다.
회식은 나에게 늘 피곤하거나 귀찮거나 회사생활을 잘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필요악 정도로 인지되곤 했다. 술을 먹으면 화만 났을 뿐, 웃고 즐기는 건 아주 아주 드문 일이었다. 정말 간간히 좋은 사람들만 남았을 때를 제외하고 항상 불편함, 괴로움, 지겨움 그 자체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회식은 회사사람과 먹어야 제맛이다. 회사의 돌아가는 상황을 회사사람이 제일 잘 알지 암만 남편이나 친구에게 디테일하게 설명해도 그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욕을 해도 칭찬을 해도 회사 얘기는 회사사람하고 하는 게 국룰이다.
회식이 힘든 이유는 회사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문제다. 공동체의 근본인 '다 함께'라는 명목하에 마음이 맞든 안 맞든 불특정 다수의 회식이라 힘든 것일 뿐. 좋아하는 일부 회사사람과 전우애를 다지는 회식은 다르다. 단체회식은 적당히 사회생활 좀 하다가 일부 멤버와 2차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안타깝게도 청춘 바쳐 일한 수많은 회사의 회식들은 상처로 남아있지만 지금이라도 회식의 제맛을 알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알콜 치료하는 날이 오기를. 회사에서 다친 마음 회사에서 깨끗이 치료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