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내가 안 질 거니까
살다 보면 너무나 사사로운 감정들에 갈대같이 휘날릴 때가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을 하다 보면 아주아주 먼지 같은 것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될 때가 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지만, 과거 나의 팀장은 그 누구보다 매번 티끌에 관심이 많았다.
웹서비스를 운영하거나 기능에 대한 개선들을 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당시에 해내지 못한 아주 잔잔한 버그나 부족한 가이드들이 눈에 매번 밟힌다. 큰 프로젝트를 하지 않을 때는 이런 잔잔한 일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내가 생각할 때 큰 변화를 주지 않았음에도 고객들이 만족하면서 사용하면 그것으로 뿌듯했다. 그렇게 일의 의미를 찾곤 했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을 즐기고 있자면 행여 불씨가 번져 더 버닝할까 싶어 불안했던 것인지 찬물을 양동이에 잔뜩 싣고 와서는 정수리에 쏟아부었던 상사가 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외적으로 피지컬이 참 멋지고 잘생겼고 개발자 출신이라 말도 전문성 철철 넘치게 개발자들과 소통할 때 보면 참 존경스러웠다. 보통 하나 정도 결함이 있게 마련인데 초기에는 결함이 눈에 딱히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너무 잘나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아주 큰 오산이었다.
그는 그 어떤 팀원에게도 '신뢰'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충성을 원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결단을 내릴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개발적 지식을 기반으로 팀원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참견했다. 시켜놓은 일을 믿지 못해 하나하나 일일이 체크하며 신경 쓰게 만드는 일명, 마이크로 매니징이다.
팀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팀장과 팀원 서로는 '신뢰'가 바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신뢰가 생기는 근원은 '믿음'이다. 조금 못하더라도, 결과물이 다소 예상과 다르더라도 우선 믿고 맡겨주고 기다리면 결국 좋아지게 마련이다. 그 시간이 좀 짧고 길고의 차이일 뿐, 믿음을 통한 업무적 관계가 팀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모습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팀장은 달랐다. 자신의 팀이 최고의 팀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실력'에서 기인한다고 믿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팀장은 실력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팀원들을 타 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고, 때로는 가이드 역할을 해주며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실력만 믿고 팀을 이끌어서는 안 됐다. 그의 마이크로 매니징은 모두를 힘들게 했고, 지켜져야 할 기획팀 내 신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의 마이크로 매니징 덕분에 개발팀과 협업하기에는 참 수월했다. 개발팀이 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개발 문서의 정리나 중간 정리 등을 팀장은 기획팀이 나서서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기능 개선을 위한 문서는 기획서와 프로토타입, 개발적 요소가 담긴 문서(가령, API항목 정의와 필수 값 여부, 예외사항 정의, 로직을 가시화하는 순서도 등)를 모두 작성해야 했고 기존보다 시간은 배로 들었지만 개발팀은 그 귀찮은 문서작성 필요 없이 개발만 하면 됐으니 우리 팀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것이 협업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기는 하지만.. 무튼, 그러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 회사에서 누구에게든 배울 것은 있다. 그러나 내가 위태위태하게 잡고 있던 그에 대한 신뢰에 완벽히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주 사소하지만 강력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느 날, 어김없이 개발 문서들을 정리하고 난 뒤 프로토타입을 그려 팀장에게 리뷰를 하는 날이었다. 회원가입부터 결제까지의 허들을 낮추기 위해 흩어진 항목들을 한데 모아 필요한 정보를 먼저 받고 이후 결제까지 흐름 안에 적절하게 정보를 배치하는 내용이었는데 팀장이 갑자기 가입단 화면을 뚫어지게 보더니 특정 항목 하단에 빨갛게 도움말을 적으라는 것이다.
그 항목은 회원가입을 할 때, 크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입력 가능한 정보였다. 가령,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 택배를 '선불'로 받을 것인지 '착불'로 받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 정도의 항목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팀장의 마이크로 매니징을 받았지만 의견이 딱히 충돌 날 일이 없었다. 워낙 개발적으로 이슈를 들이밀어버리니 상대적으로 개발지식이 부족한 내게는 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 날은 달랐다. 그냥 내가 작성한 프로토타입에 뭐든 까고 싶었던 날인 것 같았다.
팀장은 착불이 뭐고 선불이 뭔지를 강력하게 하단에 가이드해서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항목명과 값만으로 충분히 인지가 가능한 항목에는 오히려 가이드들이 더 화면을 복잡하게 만들어 기능 자체가 어려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전달했다. 우리의 목표가 지저분하고 난잡한 UI를 필수항목 위주로 개선해내는 작업이었기에 꼭 가이드가 필요한 내용이 아니고서는 다 걷어냈었다.
처음에는 이걸로 CS가 접수됐었거나 혹은 다른 사유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팀장은 그의 상사인 총괄이 이렇게 과할 정도의 가이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신경 쓸 포인트를 찍어서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 총괄은 관심 없고, 이 개선의 목적과 사용자들은 충분히 인지할 항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처음에는 총괄을 들먹이더니 이제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라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한다.
사실 도움말 그거 뭐라고 넣는 게 어렵겠는가. 하지만 굳이, 꼭 반드시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과한 친절은 오히려 불편함을 줄 수 있다. 팀장의 말에 반박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프로토타입을 고민했던 한 명의 기획자로서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를 설명하려 했었다. 그런데, 팀장은 이깟 도움말 넣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며 포인트를 달리 잡고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의 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팀장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ㄱ... 하는 중에 그는 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재수 없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팀장이 시킨다고 일을 무작정 따르는 편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 너무 반대되는 생각이 아니라면 따르는 편이지만 팀장 말이어도 내 생각과 다르면 한 번쯤 얘기하고 서로가 충분히 토론을 통해 설득이 되어가는 과정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거 팀장들은 성격이 더럽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맞든 내가 맞든, 그들과 벌인 언쟁은 언제나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수동적으로 일할 것을 권한다. 나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일을 하면서 일의 의미를 찾는 사람인데, 시키는 것만을 하라고 지시한다. 명령을 내리는 것 까지는 괜찮다. 수행하다가 물음표가 떴을 때 물어보고 그것을 내게 설득한다면 나는 적극 그들의 명령에 충성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다르다. 물음표가 떠도 묻지 말고 따지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였다.
나에게는 당시 너무 큰 충격이었다. 이게 뭐 그리 충격스럽냐 생각할 수 있다. 인격모독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냐고 생각할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거나 이럴 거면 기획자 때려치우라고 하거나 뇌가 있는 거냐 등 감정적으로 화내는 것에는 크게 충격받지 않는다. 열은 받지만 그냥 또 지랄이네 하고 흘려버리는 편이다.
그런데 팀장은 달랐다. 나는 그를 '신뢰'했고 그도 나를 신뢰한다고 생각했다. 마이크로 매니징도 그가 우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성장을 도모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불만을 품지도 않았고, 일의 강도가 점점 세지더라도 우직하게 참아내면서 일을 했다. 그보다 더 위에 총괄이 있었지만 총괄보다는 팀장을 위해 더 잘하려고 애를 썼다. 그만큼 내게 그는 특별했다.
충격을 받고 자리에 앉아서 친한 팀 동료에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쌓았던 그와의 신뢰가 한순간 무너진 기분이 들었다고. 동료는 내게 이 팀에서 지금까지 그 신뢰가 있다고 믿은 건 너 하나뿐일 거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수십 번 제발 시키는 거만 해라 딴지 걸지 말라는 말을 밥먹듯이 했다는 것이다. 개발자 출신이라 부족한 모습이 있는 것은 당연한데 드러내는 게 아니라 숨기느라 급급했다고 했다.
동료는 더불어 긴 시간 참 잘 참아내는 걸 보고 적어도 나는 다른 줄 알았다고 했다. 적어도 둘 관계에서는 수동적일 것을 권하지 않는구나, 팀장이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믿나 보네 싶었다고 했다. 나는 팀장이 한 번도 수동적으로 일할 것을 권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한 지 딱 1년이 지난날이었다.
그 말의 의미에 대해 묻기 위해 팀장에게 면담 신청을 했다. 누군가는 참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인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고, 이 회사의 존재 여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를 찾아갔을 때는 바쁘다며 회피하기 바빴고, 우연찮게 회식자리에서 옆에 앉게 되어 물었다. 정말 제가 팀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시길 바라시냐고.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랐다. 지금까지 내가 신뢰한 당신이 그냥 화가 나서 던진 말이길 바랐다. 그의 대답은 "어, 제발"이었다.
그 날 이후, 여느 직원들과 다르지 않게 퇴사를 품고 살았다. 앞서 얘기했던 그 '도움말'은 결국 총괄이 보기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였고 그는 총괄에게 아무래도 그렇죠? 라며 기획자가 누구냐는 말에 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서 넌 기획자가 맞냐며 글러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늘 그랬듯,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생활소음일 뿐이었다.
이후 아무런 감정도 없이 팀장이 시키는 일만 했다. 시키는 대로 하다가 총괄에게 깨지는 날에는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하다가 그냥 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참 신기하게 자르지도 않는다. 데리고 있는 것도, 자르지 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남아있는 나도 참 이상했다. 모든 게 이상했던 이 회사는, 지금의 우리 회사다.
그걸 견뎌내고 리더가 바뀌고 나니 삶이 달라졌다. 지금 나의 상사와 신뢰가 생긴 뒤 나는 충성은 당연했고 누구보다 즐겁게 일을 해왔다. 지금 나의 상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고 자신의 의견과 다를 때 내 말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따를 것을 권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한 번 생각해보고 알려달라 그럼에도 네 생각이 그게 맞는 것 같으면 한 번 가보자. 잘못되면 내가 막아줄게 걱정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리더가 이렇게 중요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고 실패하면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말을 해주는 상사가 있다면 어떤 일을 못하겠는가. (물론 그렇게 열정에 타버리면 일이 과몰입되어 스스로 일을 늘리는 단점은 좀 있지만..)
과거 나의 팀장이 했던 말이 내포하는 최종 완성 문장을 소개한다. 어디서든 이런 상사를 만나거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떠나라. 개고생 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책임은 내가 안 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