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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이 아니라 다행이다.

워킹맘의 시선에서 바라본 [82년생 김지영]

by 달하

친한 동생이 '82년생 김지영'을 봤다며 물었다. 결혼하면 힘들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공유같이 아내만 지극히 바라보고 걱정하는 남편이 있어서 부러웠다고, 그런 남편이 실제로 존재하냐고. 사실 따져보면 그리 완벽한 남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공유라고 생각하니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없으니까 영화지"라는 대답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봤다. 나에게 이 영화는 어떤 영화로 기억되고 있을까.






고단한 워킹맘의 하루를 살던 어느 날,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놀아주고 겨우 재운 뒤 남편에게 물었다. "영화 좀 보고와도 돼?"


오밤중에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흔쾌히 혼자 시간을 허락해 준 남편 덕에 봤던 영화 '82년생 김지영'


페미니즘이다 여성편향이다 등 말 많고 탈 많던 영화였기 때문에 나도 약간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됐지만 결론은 그저 한 편의 영화일 뿐이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사실도 약간은 가미된, 과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돌이켜보면 나도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던 그런 영화였다. 너무 아름다운 두 배우가 망가져도 예뻐서 약간 몰입도가 떨어진 게 단점이라면 단점.


영화를 보러 갔던 당시 시간은 밤 11시 정도. 나를 비롯해 총 3명이 영화를 관람했다. 관람객은 감히 예상하건대 '엄마'의 존재들이었다. 나를 비롯해 차림새나 영화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이를 재우고 남는 시간에 영화를 보러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영화관에 입장하고 자리에 앉으니 같은 줄 왼쪽 끝에 한 명, 앞줄 라인 오른쪽 끝에 한 명 이렇게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됐다. 사실 영화관에 누가 오는 것에 신경 쓴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이 늦은 시간에 서로 모르는 엄마 셋이 영화를 나란히 보는 상황이 조금 재밌어서 꽤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에 앉았던 분이 먼저 울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크게 눈물 날 장면이 없는데 육아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게 눈물이 났나 보다. 영화 중간 김지영이 엄마를 빙의하는 모습에서 오른쪽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빙의라는 것 자체가 조금 생소했던 내게는 눈물 포인트보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쌓여야 저렇게 되는 걸까에 대한 궁금함 정도만 있었지 슬픈 느낌은 없었다. 나는 막바지에 김지영이 상담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습에서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그렇게 세명의 관람객은 민망할 정도로 눈이 부어서 혹시라도 마주칠까 영화관을 바쁘게 빠져나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 두 모습의 김지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는 딸로서의 김지영 그리고 하나는 며느리로서의 김지영. 그렇게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마주하며 그 모습에 나를 대입해보게 됐다.






사랑받는 딸, 김지영

딸로서의 김지영을 대입해보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러움'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있음에 특히 오미숙 같은 엄마가 있음에 부러웠다. 물론 우리 가족도 정말 화목한 편이다. 다사다난한 집안들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이고 왕래도 잦은 사이좋은 가족이다. 다만, 엄마가 생각하는 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다르게 느껴졌다.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지영의 엄마만큼 내가 뭘 해도 인정해주는 엄마는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극 중의 고모나 친할머니처럼 '남아선호사상'이 있는 편인 데다 '자고로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고 남자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라는 기저가 깔려있는 사람이다. 엄마가 바라보는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여성스러운 성향은 아니었기에 독특하다, 별나다, 이상하다 등 부정적인 형용사가 늘 꼬리표처럼 달렸었다. 어찌 보면 극 중의 첫째 언니, 김영은과 약간 유사했다.(물론, 첫째 언니처럼 멋진 사람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영이든 김영은이든 딸이 어떤 모습이나 행동을 하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는 엄마 오미숙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이 밥 먹는 자리에서 '시집이나 가'라는 아빠의 말에 화를 버럭 내주는 모습, 지영이 옆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딸의 미래를 응원하는 모습, 능력이 되면 혼자 살아도 되지 않냐고 당당하게 얘기해주는 모습 등 확실히 우리 엄마와는 다른 엄마의 모습을 봤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도 엄마에게 딸의 틀에 갇혀서 평가되지 않고 나의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던 갈망이 아주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운도 없는 며느리, 김지영

며느리로의 지영은 오히로 반대로 내쪽이 훨씬 괜찮다고 생각했다. 기혼자가 되고 나서 느낀 거지만 시댁은 정말 운이다. 내 남자친구가 성격도 좋고 온화하다고 해서 시댁이 남자친구 같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결혼은 둘이 아닌 가족대 가족이 하는 거라는 소리를 하는 거다. 나는 시댁에서 '너희만 잘살면 됐다'를 몸소 실천하시기에 불편함 없이 지내지만 지영은 그런 면에서 운이 참 없었다. 남편인 공유만 놓고 보면 비현실을 그대로 담은 영화 속 주인공 남편이지만 시댁은 어찌 보면 일부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 보였다.


며느리의 상황에도 남아선호의 장면이 나온다. 지영을 믿어주던 팀장이 자리를 제안해온 날, 같이 해보자는 말에 양껏 들떠있는 지영은 기쁜 마음에 시어머니에게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고 일을 하라고 하더라는 말을 건넨다. 시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격분하며 '남자 앞길을 막는다'라고 말한다. 시어머니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막말로 취업은 다시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도 나오지만 한국의 일부 회사는 여전히 남자만 승진이 가능하거나 급여 차이가 있는 곳이 존재한다. 그토록 남자를 선호하는 회사가 많은데 육아휴직 좀 썼다고 남자 앞길, 막히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아선호를 중시하는 부모님들은 건재하고 실제로 피해를 보는 며느리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가까운 친구가 시집을 가서 첫 명절 때 남편 옆에 붙어있었다가 시어머니에게 따로 불려 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가, 여자는 자고로 쉬더라도 주방에서 쉬어야 한다." 현실판 김지영이 그토록 예쁜 내 친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시댁은 운이 맞다.






김지영이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워킹맘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마음은 '김지영이 아니라 다행이다'였다. 김지영만큼의 스트레스로 빙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극도의 외로움과 무기력함, 쓸쓸하고 고립된 겹겹이 쌓인 그 벽의 느낌을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출산 직후 친정엄마 집에서 약 2개월간 도움을 받고 3개월 차부터 본격적으로 독박 육아를 했다. 말도 못 하는 조그마한 아이와 둘이 남겨져 하루 종일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다. 남편이 회식이나 야근이라도 하는 날은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기도 했다.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올 일이 없으니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극 중 김지영이 손목 보호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아이 밥을 먹이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 목욕을 시키던 장면. 정확히 육아휴직을 하던 내 모습이었다. 하나씩 퀘스트를 끝내듯 처리를 하고 나면 하루의 끝은 고단함과 피곤함 뿐이었다. 그토록 힘들게 육아를 해도 돌아오는 보상은 아이가 웃어주는 미소 하나였다.


나는 비효율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는 그 자체로 상당히 힘든 일이었고 스트레스가 상당한 일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미소 한 번, 그걸로 됐다'라고 하면 참 좋겠지만 나는 당시 그러지 못했다. 나쁜 엄마라고 욕해도 좋다. 그러나 나의 그 고된 육아가 미소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니, 내 기준에서 상당히 불합리한 처사였다.


누군가는 육아휴직을 지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아이를 하루 종일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냐고, 육아휴직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아이가 무작정 사랑스럽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로 인해 나 자신을 잃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나는 그때가 산후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육아휴직은 10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회사에 복직을 했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없었지만 만약 영화를 봤다면 '김지영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강렬하게 했을 것 같다. 아이가 제법 큰 지금이라면 상황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 빠른 복직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도 김지영과 같이 빙의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대 김지영을 응원한다.

이 영화는 전업으로 육아를 한다는 결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수없이 변하는 내면의 갈등과 외부의 잡음을 견뎌내야만 가능한 것이 전업 육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임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전업으로 육아를 선택한 부모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응원한다.


시대가 변해서 외벌이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족이 맞벌이보다는 외벌이로 살아간다. 불가피한 상황이든 선택이든 이 시대 김지영으로 살아가는 부모들은 격려받고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영화에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한 번 살아봐라. 생각만큼 여유롭지 않다. 벌어다준 소중한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커피 한잔 사치를 부리는 것은 여유가 아니라 당연한 보상이다. 벌어오는 사람도 그 돈으로 집안을 꾸리는 사람도 둘 중에 그 누구도 여유롭지 않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여성과 남성, 부모와 자식 간 내면의 다양한 갈등을 잘 표현한 우리 시대 인생을 그린 영화 [82년생 김지영]. 올 추석(10월 3일, 오후 8:30)에 SBS에서 한다고 하니 아이 키우느라 영화관에 못 나갔던 부모나 결혼, 출산에 관심 있는 그 누구든 한 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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