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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악을 이길 수 없다.

악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by 달하

다음 중 어떤 것이 가장 악한 행위인가?

-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어본 것
- 끓어오르는 신앙심으로 최선을 다해 나의 신에게 기대어 본 것
-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들은 제거하는 것


행위 자체로 놓고 봤을 때 그 어떤 행위도 악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전제를 깔면 어떨까. 행위의 마지막에 '때문에 생명을 죽여야 한다'라고 가정하면? 그보다 더 악한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나에게 일어날 최악의 순간에 대한 방어를 했을 뿐, 정당방위였을 뿐이라고.

주관적 정당방위는 그렇듯 자신의 주관에서 사건을 놓고 보게 된다. 그 행위의 진실이 선이든 악이든 결국 나의 주관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결과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자유다. 애초에 주관으로 시작됐으니 말이다.

때문에 나는 결과론적 의미인 권선징악을 신뢰하지 않는다. 선함을 장려해야 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주관이 존재하는 한 악한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말이다.





나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8남매인 외가와 가까이 살아가면서 가족이 많았기에 예의범절이 늘 중요했고, 어려서부터 공부는 못해도 되니 남을 배려하고 베풀며 살라는 부모님 아래서 선하게 사는 법만 배워왔다. 선한 성격 덕분에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즐거운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행복했던 초등학교 기억을 안고 기대에 부풀어 가게 된 중학교.


중학생이 되고도 나는 여전히 밝고 선한 아이였다. 모나지 않은 성격 덕분에 학기 초 친구들이 제법 생겼고 특히나 행복했던 초등학교에서 같은 중학교로 가게 된 한 명의 친구와 단짝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 또한 나를 신뢰하고 좋아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뿔테 안경 여자애가 나에게 다가왔고 함께 잘 지내자며 호의를 보였다. 그렇게 나와 초등학교 친구는 뿔테를 비롯해 여러 명과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됐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감히 내게 드리워질 어둠은 상상할 수 없었다.


뿔테는 누구에게나 인기를 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주변에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싶어 했다. 초반에 길을 잘 들여놔야 한다는 말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서 이기고 싶어 했다. 때문에 자기 성에 안차거나 자신보다 인기가 좋아 보이는 친구들은 가차 없이 욕을 했다.


나에게도 몇 번이고 이야기를 했었지만 나는 크게 동요하지 못했다. 나와도 친한 친구들의 이야기였고 그 친구도 나쁜 마음은 아닐 거라고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뿔테가 아무리 나쁘게 얘기하지만 친구가 잠시 미울 뿐 다시 잘 지낼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순진했다. 자기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나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고 누구에게도 어떤 말이든 실어다 나르지 않기 때문에 여러 명을 몰래 섭렵해 잡아먹기에 아주 안전한 먹잇감이었다. 가장 친했다고 믿었던 초등학교 친구마저 강해 보이는 뿔테의 무리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결국 그녀도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리에 앉자마자 느낌이 싸했다. 반에는 몇몇 친구들이 앉아있었지만 귓속말을 하며 나를 째려보고 있었고 짝꿍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이내 피해버렸다. 무슨 일일까. 무엇이 이 상황을 만든 것일까.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주변은 싸늘했고, 두렵고 무서웠다.

혼자 앉아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 뿔테가 교실 뒷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왔다. 초등학교 친구를 비롯한 낯익은 측근을 데리고. 드디어, 뿔테는 자신이 원하던 구역을 점령한 것이다. 적어도 이 반에 있는 사람 중 나의 아군은 없었다.

교실문을 열자마자 뿔테는 기세 등등하게 내게 다가왔고 내 뒤에 잠시 서있더니 내 책상을 발로 세게 걷어찬다. 책상 위에 있던 책이며 필통들은 바닥에 흩어졌고 나는 놀란 마음에 몸이 굳어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바들바들 몸은 떨렸고 눈물은 뚝뚝 떨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괴롭힘에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대역죄인의 목을 치려 준비하는 망나니처럼 모두에게 잘 들으라는 듯 자기 앞에 놓인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왕따로 명명한다며, 어울리는 자는 함께 처단하겠다고 공표한다. 왕따의 시작이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선함이 죄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반에 도착하니 뿔테와 무리들이 창가 끝쪽에 앉아 깔깔거리며 앉아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를 향한 눈빛은 따가웠고 나는 고객을 숙인 채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꺼낸다. 뿔테와 무리들이 못마땅한 듯 나를 둘러싼다. 왜 인사를 안 하냐고 한다. 마지못해 두 입을 떨며 꺼낸다. "아.. 안녕.."


뿔테와 무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더니 이내 무표정으로 내가 꺼내 둔 책과 걸어둔 가방을 칠판을 향해 내던진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내게 말을 건넨다. "주워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잡고 앞으로 나가 책과 가방, 필통을 몸으로 안아 겨우 자리로 돌아왔다. 뿔테와 무리들이 나간 뒤 펑펑 울었지만 곁에 누구도 없었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가 세수를 하고 돌아와 첫 수업인 영어시간을 준비하려 했는데 책상 서랍에 있던 영어책이 없다. 이상하다. 옆을 돌아봤더니 뿔테가 나를 보며 내 영어책을 흔든다. 영어선생님은 이내 얘기한다. "책 없는 사람 나와"


두툼한 드럼채 같은 나무 막대기로 손바닥을 수차례 맞았다. 눈물이 터져버렸다. 선생님은 뭘 잘했다고 우냐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눈물을 멈추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영어책은 내 자리로 던져졌다. 잘 썼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씹다 붙여놓은 껌과 함께.



며칠간 왕따의 시간이 계속됐다. 사물함에 책을 넣기 위해 책을 넣고 있으면 발로 세게 문을 닫는다. 손목이 끼어 아파해도 개의치 않았다. "에구 어째? 아프겠다"하고는 비아냥 거리고 떠날 뿐이었다.


중학교에 간다고 신난 마음에 책을 감싸 두었던 아스테이지 책 표지는 갈기갈기 찢어진 지 오래다. 새로 마련했던 노트나 필통, 필기구 역시 빼앗긴 지 오래고 책의 존재에 유난히 목숨 거는 영어시간에는 늘 손바닥을 맞았다. 점점 굳은살이 생겼고 덕분에 맷집이 생긴 건지 나중에는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짝꿍이 두리번거리더니 나에게 작은 화분을 건네 왔다. 놀란 눈에 쳐다봤더니 힘내라고 숨 쉬듯 작게 이야기한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왕따 생활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받은 따뜻함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찰나 뿔테가 들어오더니 내 자리에 놓인 화분을 목격한다. 분노에 가득 찬 눈빛과 발걸음으로 내 자리에 다가오더니 이내 화분을 잡고 바닥으로 내던진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모두에게 들으라며 내 짝꿍에게 소리를 친다.


"야, 너 얘 왕따인 거 몰라? 아니, 얘 전교에서 왕따야. 전따. 알아들어?"


지금의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그때만큼의 분노를 느껴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마저 악하지 못했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바보같이 아무 행동도 말도 못 했다. 짝꿍은 그녀가 무서워 자리를 피했고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나보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다. 너 따위가 친구 같은 거 사귈 생각 하지 말라고.



어린 나이었지만 자살을 생각했다. 아마, 뉴스에 나오는 끝내 참아내지 못한 아이들이 자신을 버리는 모습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정도로 그 아이들의 모든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신체만 살았지 영혼은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정말이지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뿔테와 무리들도 싫지만 방관하는 반 친구들도 치가 떨리도록 싫었고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의 연락도 일체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은 그저 사춘기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홀로 외롭게 왕따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그 어린 나이, 14살의 일이었다.


왕따 생활은 더 강해지기 시작했고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해 결국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워낙 성격이 강한 엄마와 이모는 학교에 찾아가 당장 전학을 요구했고 더불어 그 아이들을 처단하려 했다. 엄마와 이모는 뿔테와 무리에게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녀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나는 엄마 뒤에 숨어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데, 이유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내 속에 그렇게 악마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왕따사건 이후 그녀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얼굴이 하얗고 귀여웠던 같은 반 여자아이였다. 선생님에게 내 주소를 물어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녔고 자신은 나 다음 타겟이 됐다고 했다. 다행히 내 사건 이후로 선생님들의 보호관찰이 생겼고 신고함도 생겨 그 생활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고.


동네가 좁다 보니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서도 그 아이들의 소식을 계속 접하게 됐다. 여전히 그녀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무리 지어 잘 다녔고 왕따를 시키더라도 선생님 눈을 잘 피해 가며 징계 한 번 받지 않고 악랄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그 분야에서 만큼은 더 영리해지고 똑똑해졌겠지.


앞서 말한 것처럼 악한 사람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악마에 대해 방어를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선'이 아닌 '악'으로 말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런 사건을 겪었던 내게 꽤 의미 있는 영화다. 아빈이 마지막에 모두를 처단하는 것을 보며 권선징악을 실현한 것, 그러나 돌이켜봤을 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상황에 최선을 위한 정당방위였을 뿐이었다는 것. 복잡 미묘하게 얽힌 아빈 주변의 사건을 통해 악마가 죗값을 치렀다는 느낌보다 악함을 이기는 방법은 더한 악으로 대처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자라나는 악함 속에서 선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영화에서도 악마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움직이고 사람답게 살게 한 것은 누군가가 베푸는 선한 친절함이었다. 아빈이 악에 받쳐 악마들을 처단하고도 히치하이킹을 했던 이름 모를 사람의 친절함 속에 안도를 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선이 악을 이길 수는 없다. 다만, 선함은 스스로 악해지는 것을 제어함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악해지는 것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다. 나 역시 전학 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가서는 좋은 친구들이 손을 먼저 내밀어 주었고, 덕분에 악한 마음을 누르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선함이 내면의 악을 방어해준 것이다.


내게 악마를 키워준 그녀는 자신이 당할 것이 두려워 사전에 방어한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통해 혹시라도 있을 위험을 미리 대처한 것뿐이다. 그것이 그녀 주관에서 악한 짓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아주 처참하게 한 명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긴 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정당방위였던 것이다.


바라지는 않지만 혹시나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매 순간 그려본다. 뭐, 마주친다고 해도 영화처럼 죽이기야 하겠는가. 단지 말을 건네겠지. 2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 장면 한 장면 너무 생생해서 잊으며 살아갈 수 없었다고,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나에게는 그때 사건을 되돌리지 않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말이다.



악함은 주관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악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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