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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n 17. 2019

한밤의 식물 구조 대소동

식물 키우기에 자만은 금물!

아침해가 밝아오기 전 새벽, 겉흙이 말라 보이는 식물들을 대거 싱크대로 옮겨 액비가 소량 섞인 시원한 물을 줬다. 물을 주면서 자세히 보니 매일 햇빛 쪽으로 돌려놓아서 막상 나는 자주 마주하지 못했던 앞모습이 보인다. 아니, 너 언제 이렇게 예뻐졌냐! 햇빛을 향해 잎을 맘껏 펼쳐 반짝이는 잎을 보니 기분이 좋다. 물을 주고는  찰칵찰칵 증명사진도 찍어준다. 처음에 데려올 땐 수형이 안 예뻤던 식물들이 점점 새잎을 내며 포동포동 예뻐지는 걸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이만큼 식물 잘 키우는 여자야! 훗! 


하루 종일 창가에서 햇살 가득 받고 있는 식물들을 보면 내 마음도 뽀송뽀송 광합성이 되는 것 같다. 햇살이 이렇게 고마운 애였어! 고맙다, 태양아! 



자, 즐거운 식물 갬성타임은 여기까지! 

나의 자만심을 다시 훅 깨뜨리는 사건이 밤에 일어났다. 자기 전에 식물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나의

핑크 싱고니움의 잎이 이상함을 느낀다. 그 탐스럽던 핑크 잎에 여기저기 초록색 얼룩무늬가 생겨있다. 이게 뭐지? 얼른 남편을 부른다. 


오빠, 이거 왜 이래? 얘 갑자기 왜 초록색 무늬가 생긴 걸까? 
헉, 이거 잎이 무른 거 같은데? 너 속 흙 마른 거 확인 안 하고 물 준거야? 
움, 그게.. 저기...... 
뿌리 상하기 전에 얼른 바람 잘 통하는데 내놔서 말리자


그렇게 한참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야외 베란다에 핑크 싱고니움을 내놓고 말린다. 그리고 다른 식물들을 보다가 뭔가가 이상함을 느낀다. 새벽에 같이 물을 줬던 다른 식물들의 잎들도 다 같이 살짝 무름 증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몬스테라 카스테니얀, 트루비 스킨, 몬스테라 오블리쿠아, 다 내가 아끼는 아이들인데ㅠㅠ 하루 종일 바람 잘 통하고 햇빛도 잘 받는 곳에 있는 화분들이라 단체로 과습이 온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이유가 뭘까. 그러다 문득 이유가 떠올랐다. 

혹시 액비?!?!


봄에는 식물들이 폭풍 성장하는 시기니 액비 먹고 무럭무럭 크라고 요즘 들어 식물에 물을 줄 때마다 거의 항상 액비를 섞어줬다. 영양이 과다해도 식물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알았기에 줄 때마다 1000배, 2000배 희석하는 건 꼭 지켰는데, 아뿔싸 액비를 주는 주기를 무시하고 있었구나! 부랴부랴 액비 뒷면 설명서를 읽어보니 2주에 한번 정도 주기로 시비하라고 한다. 요즘 나는 거의 3,4일에 한 번꼴로 매번 액비 섞은 물을 줬던 것이다. 오, 마이 갓! 

식물들이 참다 참다 이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거구나 싶었다. 내 식물들 이렇게 다 죽는 거야? 순간 앞이 캄캄했다. 내 식물 키우는 취미는 여기서 접어야 하는 건가 하는 오만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남편이 말한다. 


영양이 과해서 문제 생긴 거니까 다시 물을 흠뻑 줘서 흘려보내면 괜찮을 거야. 지금 화장실로 다 옮겨서 깨끗한 물을 다시 흠뻑 주자. 
괜찮을까? 오늘 아침에 물을 줬는데 또 주면 과습이 오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가만히 앉아서 식물이 서서히 죽어가는 걸 지켜보느니 한번 해보기로 했다. 최근에 액비로만 키우다시피 한 식물들을 화장실에 모아놓고 하나하나 샤워기로 깨끗한 물을 흠뻑 줘서 흙에 남아있는 액비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식물들이 이제야 살 것 같다며 기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봐, 사람도 음료수가 아무리 맛있어도 맨날 음료수만 먹고 어떻게 살겠니? 맹물도 마셔야지. 
그러네. 얘들아, 미안하다. 내가 그새 또 자만에 빠져서 그만ㅠㅠ 


식물들을 다 씻어서 자리에 갖다 놓고 나니 슬며시 아침 해가 밝아온다. 

아놔, 또 밤샌 거야? 여름엔 해가 너무 빨리 떠;

다시 물을 흠뻑 준 식물들을 바람 잘 통하는 창가에 놔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들었다. 



내 식물들은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핑크 싱고니움부터 확인한다. 


엇, 오빠! 초록 얼룩이 사라졌어! 다시 핑크색으로 돌아왔어!!! 


@다림 | 과한 액비를 물로 씻어내렸더니 하룻밤 사이에 다시 잎이 깨끗해졌다!


이럴 수가. 액비를 깨끗하게 씻어내려 준 식물들은 잎무름을 그새 스스로 치료했는지 잎이 깨끗해졌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미 무른 잎은 되돌릴 수 없는 줄 알고, 상태가 나아지더라도 새잎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자가 치유라니! 아직 모자란 철부지 가드너의 노력을 식물들이 알아주었나 보다. 빨리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이미 시들고 발견했음 어쩔뻔했어. 


나 혼자 키우다가 이런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나 발만 동동 구르다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든든한 가드닝 친구가 옆에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고마워, 남편!) 이렇게 오늘도 우리 집 식물은 마음만 앞서는 초보 가드너의  손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다시 예쁨을 뿜고 있다. 니 상태를 빨리 알려줘서 고맙다. 핑크 싱고니움아! 


이래서 식물 키우기에 자만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더 좋은 액비를 사야겠다며 인터넷을 뒤지던 손을 슬며시 내려놓고 물이랑 햇빛부터 제대로 잘 줘야지 하고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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