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ure 시리즈 열세 번째, 영화 [가여운 것들]
*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혼자 영화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요즘엔 영화값이 너무 비싸 못 가지만..) 혼자 관람한 영화 중 재밌었던 것을 하나 꼽으라 하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습니다. 상영 끝물에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부랴부랴 늦지 않게 겨우 상영하는 곳을 찾아가서 관람했었습니다. 사전 정보 하나 없이 관람하게 된 영화는 정말 놀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예술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거든요. 액션, 오락, 코미디, 호러, 스릴러 등의 영화만 보다 이런 감각적인 영화를 보니 센세이션이었습니다. 분홍분홍한 그 색감은 아직도 뇌리에 박힌 거 같아요. 아마 그 뒤로 영화에 대한 미장센을 좀 더 관찰하면서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영화를 관람하는 법을 알려준 영화네요.
이번에 제가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아름다운 미장센을 갖고 있지만, 내포하고 있는 스토리는 다소 묵직한데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동화 같은 색감으로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가여운 것들>입니다.
천재적이지만 특이한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
갓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던 벨라는 날이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넘쳐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짓궂고 불손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자는 제안을 하자,
벨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나고
처음 보는 광경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되는데….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놀라운 반전과 유머로 가득한 벨라의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영화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강으로 몸을 던지고 스크린 전반에 'POOR THINGS'라는 문구가 뜹니다. 이후 누군가가 피아노를 손과 발로 엉망진창으로 연주하는 장면으로 전환돼요. 곧이어 얼굴이 마치 천을 덧댄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걸어 들어오고, 피아노를 치던 사람은 그를 보며 씩 웃습니다.
이후 둘은 같이 식사를 나누는데 남성은 정갈하게 식기를 이용해 먹고, 피아노를 치던 여성은 그저 손으로 우왁스럽게 입에 '집어넣'어요. 식사를 마친 남성이 나갈 채비를 하고, 여자가 뒤뚱뒤뚱 걸어오며 말을 웅얼거리는데 남성이 "안녕"이라고 말을 하자 똑같이 "안녕"이라고 발음합니다.
의료 대학 강연장에서 실습을 보이던 중년 남성은 수업이 끝난 후 한 청년을 부릅니다. 맥스(라미 유세프)라고 불리는 이 청년은 조금 전에 강연을 한 교수를 굉장히 존경하던 사람으로,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 핀잔을 줘도 아무 문제가 없는지 그의 호출에 굉장히 기뻐해요. 교수는 그런 맥스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까 피아노를 치고 같이 밥을 먹은 여성이 '하느님(GOD)!'이라 외치며 달려와 안기는데요. 사실 교수의 이름이 갓(GOD)윈(월렘 대포)입니다. 갓윈은 조금 전 자신에게 달려온 여성 '벨라(엠마 스톤)'를 맥스에게 소개하며(와중에 벨라가 맥스의 콧잔등에 주먹을 꽂은 건 넘어갑시다), 벨라가 뇌를 다쳐 자기가 치료했으나 정신 연령과 신체가 크게 어긋나 있어, 그녀의 성장 과정을 꼼꼼히 기록해 주는 역할을 맡아달라 합니다. 맥스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받아들였고요.
벨라를 관찰하던 맥스는 묘한 벨라에게 점차 매료됐고, 이를 눈치챈 갓윈이 맥스에게 벨라와 결혼할 것을 제안합니다. 맥스를 집에 붙들어 벨라를 계속 관찰할 수 있게 할 생각이었는데요. 이를 위한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갓윈은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라는 변호사를 부릅니다. 갓윈이 계약서를 보는 동안 던컨은 몰래 방을 빠져나와서는 벨라를 마주하고, 던컨 역시 벨라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맙니다.
이후 던컨은 벨라에게 바깥세상을 알려줄 테니 자신과 함께 몰래 떠나자고 꼬시고, 가뜩이나 호기심이 극대화되기 시작하고 있던 벨라는 갓윈에게 여행을 허락해달라 합니다. 갓윈은 처음에 반대하지만, 보내주지 않으면 자신을 원망할 거라는 벨라를 못 이겨 결국 보내주기로 해요. 과연 벨라는 갇혀있던 집을 떠나 어떤 세상을 맞닥뜨리게 될까요?
사실 벨라는, 영화 첫 장면에서 나온 강에 몸을 던진 여성이었습니다. 투신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강가로 떠내려온 벨라-원래는 빅토리아 블레싱턴이었던-를 갓윈이 발견-정확히는 다른 남자가 발견하고 갓윈에게 시신을 판매-한 거였어요. 그런데 벨라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죽음을 원했으나 아직 살아있는 자의 생명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갓윈은 이전부터 자신이 하고자 했던 실험을 자행합니다. 바로 뱃속의 아기의 뇌를 성인의 머리에 이식하는 실험이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렇게 해서 '벨라'라는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 거죠.
그래서 영화 전반에서 보여지는 벨라의 유아스러운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인 거였어요. 언어며 인지며 아무것도 발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몸만 어른이니, 말도 어눌하고 걸음걸이도 이상한 거죠. 하지만 주인공답게 벨라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발달하는 과정이 꽤 빨랐거든요. 벨라가 떠난 이후, 갓윈이 같은 실험을 통해 탄생시킨 펠리시티는 생각보다 벨라만큼 성장이 빠르지 않았거든요.
벨라가 여행을 떠나기 전, 갓윈의 집에서 생활할 때는 마치 옛날 영상을 보듯 영화가 흑백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후 던컨을 따라나서면서 영상에 색이 입혀져요. 그것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쁘고 화려한 색감으로요. 저는 이 장면, 안개 같은 회색빛이 걷어지면서 더 이상 벨라가 타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한 명의 모험가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라 생각해요.
영화는 벨라가 살던 집(런던)에서 리스본 > 배(ship) > 알렉산드리아 > 파리를 거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요. 각각의 장소에서 벨라는 어린아이가 새로운 경험을 몸에 빠르게 흡수하듯 깨달음을 점차 알아갑니다. 리스본에서는 던컨 몰래 방을 빠져나와 혼자 길거리를 탐험하고, 배 위에서는 또 다른 자아를 심어줄 인물 마담 마사와 해리 애슬리를 만납니다. 당시에만 해도 육체적인 쾌락이 가장 즐겁다고 느끼던 벨라는 이때부터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게 돼요.
마사 : 나이가 들면 머릿속에 뭘 넣을지를 더 신경 쓰게 되죠.
이후 해리가 벨라에게 현실을 보여주겠다고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가고, 자신이 근사하게 지내던 곳 바닥에 빈민가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꽤나 인상 깊었어요. 벨라가 아직도 어린아이-걷는 모습으로 짐작건대-여서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굶어 죽는 아이들을 보며 꺼이꺼이 오열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성장했다는 걸 느꼈거든요.
벨라는 줄곧 소위 공주풍인 귀족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귀한 집 딸내미라는 걸 단 번에 알 수 있듯이요. 하지만 서럽게 우는 벨라와 황량한 배경 속 이 풍성하고 예쁜 옷은 정말, 정말 이질적이었어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배에 온 뒤로 진상 짓을 일삼던(..) 던컨이 카지노에서 딴 돈을 한데 모아 선원에게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주세요."하고 넘겨버리는 웃음 포인트도 있고요.
벨라 : 우리는 결혼하면 안 되겠네요.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심성이 너그러운 남편이 필요하거든요.
웨더번 : 걸레 같은 년.
벨라 : 당신은 그런 남편감이 아니죠. 우리 모험은 여기까지예요.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파리라고 생각해요. 파리에서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벨라가 매춘을 시작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무작정 벨라를 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매매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벨라는 모르거든요. 평소 덩컨과 관계를 맺듯이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뿐인데 돈까지 준다? '사랑'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윤리와 도덕이란 관념이 명확히 발달되지 않은 벨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나쁠게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벨라는 이 매춘을 통해서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상을 넓혀나갑니다.
벨라 : 스와이니 부인, 내 상황을 설명하죠. 난 섹스와 돈이 필요해요. 애인을 구해서 웨더번에게 그랬듯 의지해도 되지만 그러면 많이 피곤할 듯 해서요. 대신 20분만 일하고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발전하는지 남은 시간에 배울래요. 그래서 말인데 날 고용해줘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당신의 매음굴에서 일할래요.
스와이니 부인 :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여성이라. 멋지구나. 따라와.
우스꽝스럽게도 벨라의 뛰어난 면모가 매춘에서 돋보여요. 기존에 남성이 여성을 고르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으니 여성이 관계 맺을 남성을 고르자고 제안도 해요. 이게 안되니 매춘을 하기 위해 온 남성과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놀이를 먼저 하기도 하고, 자식들 성교육을 위해(..) 방문한 남성과 꽤 진지하게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벨라는 쉬는 시간에 매음굴에서 만난 친구와 대학 강연도 보러 다니면서, 종국에는 올곧게 걸어 다녀요(!). 벨라가 매춘을 했다면서 가차 없이 욕을 내뱉으며 떠난 던컨이 찌질한 모습으로 벨라를 붙잡으나, 벨라는 매몰차게, 더 이상 아이 같은 말투가 아닌 어른스러운 어휘를 사용하여 내칩니다. 드디어 벨라의 뇌 연령과 신체 연령이 얼추 비슷해졌다는 걸 보여준 거겠죠. 벨라, 드디어 세상도 경험하고 어른이 됐구나! 싶었죠.
매춘이란 소재를 사용하여 한 사람의 성장을 다룬 것은 꽤나 께름칙하지만, 감독도 생각이 있어 이런 장면을 넣었을 것이고 벨라를 연기한 엠마 스톤 역시 영화 내 필요한 장면이기에 열심히 연기했다고 해요. 그저 매춘이 여성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방향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으로 비치지만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제목 <가여운 것들>에서 칭하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엄마와 자식이 하나가 되어버리게 된 괴상한 생명체 벨라를 말하는 걸까요? 그렇다기엔 제목은 복수형입니다. 그리고 벨라 자신도 이 삶이 꽤나 가엽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녀를 가엽다고 바라보는 관객, 우리들을 칭하는 게 아닐까 했어요.
영화 속 벨라의 모든 행동과 행위가 전부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예요. 어린 아이여도 어느 정도의 사리분별은 가능할 텐데, 그런 게 부족한 면도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저렇게 다시 태어나게 된 벨라가 너무나도 가여운 존재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간 벨라는 종국에 갓윈의 집을 물려받으며 꽤나 즐겁고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나를 가엽게 여기는 너희가 참 가엽구나-라는 듯 말이죠.
<가여운 것들> 영화를 보면서 예전에 봤던 <더 게임> 영화가 생각나더라고요. <더 게임> 영화에서도 사람의 뇌를 바꾸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제가 보았을 땐 스토리도 나쁘지 않았고, 노인의 인격이 들어간 청년 신하균과 젊은이의 인격이 들어간 노인 변희봉 배우의 연기가 정말 정말로 인상 깊었습니다. '저런 식으로 뇌만 갈아끼울 수 있다면 불사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이 실험을 통해 갓윈 자신도 다시 태어나고자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했고요.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미련 없이 떠나는 그의 모습은 그저 독실한(?) 과학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썩 재밌고 유쾌한 영화는 아니에요. "어른의 몸에 아기의 뇌를 이식하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까?"라는 1차원적인 궁금증만 가지고 갓윈이 행한 비인간적 실험으로 시작되는 영화니까요. 그럼에도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인데다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에서 시작되는 벨라의 이야기라 참 예쁘면서도 이질적이었어요.
저는 이 영화를 추후에 한 번 더 관람할 생각이에요. 미처 캐치하지 못한 영화 속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 같고, 나중에 다시 한번 더 봤을 땐 지금과 또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아서요. 엠마 스톤, 윌렘 대포, 마크 러팔로 등 대단한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니 지루하지도 않을 것 같고요. 오늘 하루 묘한 세계로 떠나보고 싶다면 <가여운 것들>을 한 번 고려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