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꿈은 있는가

26. 사회, 직업

by 삐딱한 나선생
승진이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


제가 들었던 승진을 하라고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생존과 만족에 있습니다.


생존- 남교사가 나이 들어서 살아남지 못한다. 후배가 교장이 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만족- 그래도 교장까지는 가야지. 교사로 퇴직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나.


만약 승진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존적인 이야기들을 했다면 저도 승진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존- 내가 가진 올바른 교육관으로 학교를 경영하고 싶다. 정말 옳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겠다.


물론 지금 승진을 생각하지 않을 뿐 승진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더 높은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지 승진 자체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니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떠한 사람인가, 나는 어떤 교사인가, 어떤 교장이 될 것인가겠죠.




승진안행


페이스북을 보다가 이런 단어를 보게 되었네요.


저 또한 관심이 갔지만 누군가의 가치가 다른 이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될까 조심스러웠습니다.


승진을 하는 사람들이 승진을 안 하는 사람을 나무랐듯, 반대로 승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승진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꼴이 될까 봐요.


그럼에도 오늘 페이스북 멤버로 가입을 했습니다.


교사를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을 펼쳐낸다는 움직임이 결국 교직 사회 전반의 욕구 수준의 상승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아닌, 교장이라는 직급이 아닌 교사 자신이 꿈을 꾸는 사람이 늘어나길 바랍니다.



생존에 갇혀 있는 개인


2014년도에 1정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때 논술 주제는 '작은 학교 희망 만들기' 였어요.

작은 학교가 갖고 있는 장점을 기술하고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랍니다.


저는 이 주제를 보고 지역 불균형이라는 단어밖에 생각이 안나더군요.


작은 학교의 좋은 점을 찾아 이 학교를 살리면 정말 문제가 해결되나요?

사람의 수 자체가 늘어나지 않는 한 주변의 몇 명을 데리고 오는 것뿐이에요.

어차피 아파트 단지만 하나 들어오면 큰 학교가 생기게 될 겁니다.


강원도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산골 마을들은 심각하죠.

부익부 빈익빈을 개개인의 문제로 놓으면 근본적인 시스템이 바뀌지 않아요.

사람들이 서울에 모이고, 작은 도시조차도 도심으로 모이는 문제를 한 학교의 장점을 살림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이 논술 문제가 원하는 답을 쓰면서 교사들은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못하고 반대로 장점을 찾게 됩니다.

또, 국가차원의 문제를 개별 학교의 문제로 본질을 흐리게 만듭니다.


물론 제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겠죠.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논술에 '자신의 생각을 쓸 수 있는가'입니다.


제 동기 친구는 그냥 문제가 원하는 답을 쓸 수밖에 없었다네요. 점수를 어떻게 줄지 뻔하니까요.

승진점수에 들어가는 이 시험에 문제가 원하는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시험이 원하는 대로, 제도가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면, 또는 다른 외적인 요인으로 꺼내지 못하게 된다면 교사 개인들은 그저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하게 되겠지요.



생존을 추구하는 사회


2014년, 상시평가를 한다고 갑자기 난리를 치더군요. 본래의 취지는 정말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하면 의미를 잃어버리지요.


같이 근무했던 교감선생님이 우리 반 평가지에 100점으로 적힌 것을 보고 뭐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때 교감선생님이 제도의 취지가 이러니 지켜달라고 했으면 저도 따랐을 겁니다. 하지만 100점화 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다며 다그치더군요.

저는 100점을 '20분의 몇'으로 표시하나 무슨 본질의 차이가 있냐고 되물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평가가 아이들을 줄 세워 서열화하는 것이 아닌가요? 더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전인적인 평가를 하기 위함이지 숫자를 바꾸자는 게 목적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교감선생님께 대든 철없는 어린놈 밖에 되지 않았죠. 교육청에서 내리는 정책은 무조건 옳습니다. 위에서 내리는 정책에 토를 달면 안 돼요. 그 정책이 옳은지 그른지 인지적 욕구를 가지면 안 되는 거죠.

심지어 그걸 전하는 윗사람에게 대든다니.. 교직사회에 개념 없는 놈이 추가되는 거죠.


직급이나 나이, 주변 시선 등의 문제로 말 못 하는 개인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요.


전 말리는 시누이들이 더 밉더군요.

그냥 죄송합니다 하랍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잘못됐다 말하기도 힘들어요.

하지만 쉬쉬하는 사회는, 말하지 못하는 사회는 욕구 수준을 아래로 떨어뜨려요.


어떤 사회, 어떤 상황에서도 진보와 보수는 생기게 됩니다.

하고자 하는 자, 말고자 하는 자가 나뉠 테니까요.

진정한 진보와 보수라면 어떤 사안에 대해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만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논해야 할 거예요. 이 인지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어 양쪽의 좋은 의견을 모아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사회 자체가 보수화 되어 버리면 그 사회의 진보와 보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해요.

어차피 결론은 안전, 생존 욕구에서 결론이 날테니까요.

문제가 있어도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건드리는 문제아가 더 싫어지는 거예요. 모난 돌은 정을 맞는거죠.


하지만 이렇게 다들 안정적인 사회를 꿈꾸며 생존하면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생존을 전가하는 권력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서는 안전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교사는 2017년 말까지 안전교육 연수 15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아래는 연수 과제 내용이다.


세월호 사고를 시발점으로 하여 학교에서의 안전교육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그 동안의 학교안전교육은 특별한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 교사들에 의해, 그 효과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일회성 교육으로만 진행되어 온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학교안전교육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안전한 학교라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학교안전교육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제시한 내용에 부합되는 학교안전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을 3가지 이상 제시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작성하시오.


난 과제를 이렇게 냈다.


1. 위의 밑줄부터 취소하십시오.


교사의 전문성을 소방관만큼의 구조능력, 건축가만큼의 건물 이해, 선장만큼의 항해 이해를 요구합니까? 밑줄의 말은 지금까지 교사의 교육을 아주 하찮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말입니다. 교사의 무능한 교육으로 세월호에 갇혀 죽었습니까?


2. 개인의 탓으로 책임전가 하지 마십시오.


다리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으면 첫째, 다리를 만든 사람을 잡아서 책임을 물어야 하고 둘째,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관계부처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절대 다리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에게 ‘돌다리를 왜 안 두드려보냐’고 말해선 안 됩니다. 지금 안전교육이 진정 안전을 위해 하는 교육입니까? 이 교육을 하면 배가 안 가라앉습니까?

진정 안전교육을 위해선 학생의 탓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안전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모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안전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키우는 교육.


안전교육을 잘 하면 세상이 안전해집니까? 오히려 교육에 순종하고 잘 들으면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지 안전수칙을 잘 지키는 학생으로 키워서는 안 됩니다. 위험을 찾아 없애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안전교육 자체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안전교육만을 강조하면 세월호 안에서 '안내 방송'에 따르다 구명조끼를 입고 죽는 교사와 학생을 늘릴뿐이다.


안전교육을 한다고 세상이 안전해지지 않는다.

세상이 안전해 지는 것은 오로지 위험을 없애는 것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위험을 무릅쓰는 세상 앞에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다

나는 선하기보단 정의롭고자 한다



정의를 잃어버린 세상


이 사회에서 옳음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세 가지.

생존에 갇혀 있는 개인, 생존을 추구하는 사회, 생존을 전가하는 권력.


하지만 이 나라에서 정의는 패배한지 오래 입니다.

항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친일을 하던 자들은 권력자가 되었고, 평민의 편에 섰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죽임을 당했지요.

정의의 패배로 모든 초월자는 죽었고, 평민은 생존하고 있으며, 권력자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2단계 생존에 매여, 3단계의 애정욕 조차..



갈수록 제도는 생존자들을 더더욱 생존에서 허우덕 거리도록 몰아넣고 있어요.

요즘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대기업과 공무원밖에 없다고 말해요.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가도 계속 생존의 연속이예요.

월급이 많다고 부러워 할 수 없어요. 제 친형도 LG계열사에 있지만 지금 바짝 벌어야 된데요.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 속에서 생존하며 살고 있어요.

이들에게 승진은 선택이 아니예요.

승진이 안되면 바로 도태되어 회사를 나가야 합니다.


정규직이라는 자리도 이런데 보장 받지 못하는 기간제, 계약직은 오죽할까요.

기간제, 계약직을 늘리는 일은 집을 월세만 두려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주인에게 줘야 할 뿐 내 집을 가질 수는 없죠.

집을 갖지 못한,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불안 속에 생존을 걱정해야 되요.

우리도 만약 2년마다 다시 계약을 하고 잘릴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우리가 꿈을 꾸고 살 수 있을까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생존과 만족을 넘어선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전제는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원빈이 아니예요.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선 내일을 꿈꿀 수 없어요.


정의를 잃어버린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위 욕구를 가지고 살 수가 없어요.

다시 이 나라에 안중근 같은, 안중근의 어머니 같은 초월자가 나올 수 있을까요?


이 위대한 초월자들을 잃고..



기차 딜레마




당신은 지금 기차의 운전사이다.

저기 보이는 선로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서 있다. 이 기차를 멈추기에는 늦었고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기차를 틀어 이탈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차 안의 100명의 모든 승객이 사망한다. 당신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100명을 죽인다면 우리는 100배의 희생을 감수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희생은 이런데 쓰는 말이 아니다. 100명의 나와 상관없는 다른 목숨을 죽여 내 소중한 한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은 감수할 수 있으나 내 아이는 100명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가?


당신이 이미 세월호의 선장일지 모른다.

또, 그 아이를 세월호의 선장으로 키울지도..


이런 사람이 100명 중 한 명만 존재해도 확률적으로 인류는 전멸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기차의 선로에 보이는 당신의 아이를, 부모를, 자기 자신을 죽여 모두를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의가 죽은 세상에 미래는 없다.

적어도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좀 더 정의롭길 기대한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목숨은, 내 죽음은 정의를 향해 있기를..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을 확보하는 것만도 쉽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만족자들은 계속적인 만족을 위해 생존자 위에 군림하고 있죠.

생존을 확보하고 만족의 유혹을 넘어 실존에 이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아요.


이 세상이 안전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길은 내가 먼저 초월자가 되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을 초월자들로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가 더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 꿉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목소리들이 초월에 이르는 가치를 갖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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