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과 성장

by 삐딱한 나선생

적폐 청산..

쌓여있는 폐단은 해결해야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적폐 청산의 의지와 방향이다.



증오와 분노


중학생 시절, 1진이 있었다.

무정부 상태는 힘이 정의이다.

선생님들이 있어도 1진은 건재했다.

사각지대는 널렸고, 약자는 먹이가 된다.


여친과 100일이라며 삥을 뜯는 건 약과였다.

어떤 친구는 대들다 속된 말로 다굴빵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난 지속적으로, 심하게 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억울함과 더러움은 잊히지 않는다.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혔나 보다.

그놈은 다시 와서 날 밟고 갔다.

정말 죽이고 싶었다.

그런 놈들을 다 모아 폭탄을 터뜨리는 상상도 했다.


누군가에겐 이런 일이 학창 시절의 추억일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그런 사람은 그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

친일파에겐 일제시대가 좋았을지 모른다.


편하게 군생활 한 사람은 병영문화의 적폐를 모른다.

견뎌야 하고, 견딜만하고, 즐거움과 추억도 있는 곳이다.

여성인권, 노동자의 인권 등 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 해결의 간절함은 피해자, 또는 그와 같은 감정에 있다.

자신의 증오와 분노에 닿은 사람만이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해결의 방향


그러던 내가 교사가 되었다.

교실 곳곳에 그런 불량학생이 보인다.

당하는 아이들이 불쌍해 보인다.

난 불쌍한 학생이 되어, 불량학생을 처단해야 했을까.


내가 아직도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교사이다.

당한 아이의 마음과 함께 공격한 아이의 마음도 보인다.

그 모두가 나의 학생이다.


나와 함께한 학생 모두 눈부셨다

좋은 학생이어서
나쁜 학생이어서
적당한 학생이어서

모든 학생이 좋았다

도깨비 죄송합니다.. ㅠ



교사가 된 지금에야 이해할 수 있다.

문제학생의 원인, 가정과 사회의 책임을 알고 있다.

착한 학생, 나쁜 학생을 나누지 않고 공정하게 볼 수 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당하던 입장에서 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증오와 분노.. 의지는 잊지 않았다.

하지만 증오와 분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나 말고도 더 많은 것을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적폐의 청산


사회의 악을 없애려는 시도는 많았다.

'악'으로 규정되는 인간을 직접 제거하거나, 범죄를 일으키는 DNA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종기는 아무리 잘라내도 다시 자라난다.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 교실에서 나쁜 학생을 없애면 평화로운 교실이 될까.

암수술을 하듯, 잘라내 버리면 좋아질까.

처음엔 그랬을지 모르겠다.


이제는 교사로서 성장하면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부모와 함께 대화하며, 그 아이의 맘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특성을 알맞은 곳에 사용하여 친구와 지내는데 강점이 되도록.

내가 만든 교실의 정의 안에서,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적폐를, 적폐자를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적폐가 만들어지는 환경에선 계속 쌓인다.

삼겹살을 들고 탄 부위를 자르고 있으면, 나머지는 계속 타고 있다.


식민지배가 다시 된다면, 친일파는 또다시 생길 것이다.

썩은 곳엔 구더기가 꼬이는 법이다.

나의 목표는 적폐를 만드는 시스템을 청산하는 것이다.



성장과 중도


인정한다.

초등학생은 그래도 가볍다.

중학교만 가도 당하고 있는 교사가 많다.

당하는 입장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곳곳에 있다.


노동자의 말을 기업가가 잘 들어주지 않는다.

약자의 말을 들어주는 건, 강자에게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올바른 시스템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강자보다 더 강한 올바른 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나를 비롯한 약자들이 뭉쳐 이겼다고 하자.

그래도 권력의 이동일뿐 교실 문화와 정의는 '힘'일 뿐이다.

학생인권을 말함이 교사의 인권을 떨어뜨리는 것이 어선 안 된다.

여성, 남성을 대립 관계에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논해야 한다.

친구관계의 정의를 세워줄 교사, 수많은 정과 반을 합의 상위 가치로 이끌어줄 리더가 필요하다.


이번 대선 토론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재벌기업을 탓하기도, 반대로 강성 귀족노조를 탓하기도 했다.

나의 감정은 한 극단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성은 양쪽을 놓고 보아야 한다.

한쪽을 편드는 리더는 기울어진 세상을 만든다.


난 중도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다.

관계가 깨지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주관이 강해 날 답답하게 느끼던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 생각이 크면 클수록 가운데로 자리를 잡아간다.


각자가 갖고 있는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이 이해가 된다.

동시에 두 가치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난 그 둘을 연결하는 합의 대화를 열어간다.


우리 모두는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수화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의 가치를 열고 보는 진보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향점은 중도이다.


가운데에 서서 방관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무관심한 사람도 아니다.

위치적 중간이 아닌, 양쪽을 잡았기에 가운데에 서는 것이다.

두 가치를 함께 놓고 성장할 때, 제거하지 않고도 청산한다.

작가의 이전글관계와 업무, 이정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