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by 삐딱한 나선생

기다림은 지루하다.

기다릴 줄 아는 건 중요하지만.

기다리는 마음으론 인내심도 바닥난다.



군대


"어떻게 기다렸어요? 대단하다."

군대를 기다린 내 아내에게 묻는다.

"그냥 신나게 놀았어요."


정말 내 아내는 그 시기가 가장 자유롭게 맘 편히 놀았던 전성기라 말한다.

구속하고 집착하던 남친도 없어졌으니.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는 지금에 돌이켜보면 더더욱.


그런데 후속 질문이 이렇단다.

"그럼 다른 남자는 안 만났어요?"

한 남자만을 기다리는 건 불가능한, 또는 어리석은 일로 보는지 모른다.


군대를 기다린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걸 안다.

하지만 기다린다는 말은 상당히 모순적인 욕구를 드러낸다.

기다리고 싶은 대상과 함께 기다림의 괴로움도 전제하니 말이다.



외로움


사랑하던 존재의 빈자리는 크다.

그 사랑의 깊이가 클수록 허전함도 커진다.

이건 군대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애초에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을 논하고 싶진 않다.

기다림이 손해로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그 누굴 깊이 사랑하겠는가.

상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쉬이 떠날 사람이라면, 나를 만나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외로움을 견디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담담하게 홀로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아파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다.


사랑이 없어서 끝나는 건 처음부터 필요 없다.

하나, 너무 사랑해서, 기다리다 지쳐버리는 일은 안타깝다.

내가 기다리려고 했던 대상은 당신이었는데,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변질되는 순간.



잊기


어릴 적, 소풍 전날의 설렘을 기억한다.

어떤 친구는 한 주 전부터 들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왜 안 가냐고 하는 조바심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하루를 1초씩 세어본 적 있는가?

그런 지루함으로 하루를 산다면 죽느니만 못하다.

기다림을 세고 있다면, 그 매 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겠는가.


내 아내가 신나게 놀아주어 고마웠다.

다른 남자랑 놀아나지 않아 고마웠다.

기다림을 지루해하지 않아 고마웠다.


정말 기다리고 싶다면 기다림을 묻어두자.

기다리고 있는 당신을 당신의 뇌가 견디지 못한다.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당신의 자리를 잠시 잊어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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