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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Dec 14. 2023

내가 있을 자리

12월은 인사 시즌이다.

옮겨야 할 사람들은 벌써 난리다.

어디 학교에 몇 자리가 나는지 묻는다.



점수


벽지는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섰다.

운이 나쁘면 4년 점수로도 못 들어간다.

멀고 업무가 많아도 승진을 하려면 가야 한다.


연구학교는 또 다른 변수다.

인기 없던 시내 학교도 맛집이 된다.

남자가 몰리고 새로운 활력이 생기기도 한다.


교감 없는 교무자리도 있다.

승진을 앞둔 사람은 근평에 가산점을 노린다.

이젠 몇 자리 없는 귀한 곳이라 아무나 올 수 없다.


나도 벽지에 가보려 한 적이 있다.

점수를 떠나 남자들 모인 곳에 같이 어울려볼까 했다.

그러나 4년 점수로도 못 들어간 게 나다.


일할 사람 아니면 오지도 말라는 연구학교에 굳이 가겠나.

누군가 받고 싶어 할 자리를 꿰차고 욕먹고 싶지 않다.

자리가 남는 학폭점수도 안 받는다.


교사로서 존재하겠다는 숭고한 마음은 흐려졌대도, 다시 승진에 뛰어들기도 늦었다.

누군가 어디서 어떤 점수를 쌓고 미래를 그리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현재를 견디는 작은 이유라도 있는 것 같아서다.

나에겐 꼭 가야 할 학교가 없다.



관계


어디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면 누구랑 있는 게 중요하겠다.

동학년이 너무 괜찮아서 내년에 또 하자고도 하더라.

아예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지역을 옮기기도 한다.


나도 올해 한 사람을 보고 옮겼었다.

좋으신 분이었고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학교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마음을 열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입을 잘 열지도 않게 된 난데.

교직원 거주 지역이 나뉘어 있어 술자리는 거의 없었다.


굳이 먼저 말을 걸러가지 않았고 일로만 만났다.

직원들 간에 분쟁이 생기기도 했지만 난 별일이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냈고 난 어느 쪽에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난 다시 1년 만에 학교를 옮긴다.

남으려는 한 사람은 새로 오신 선생님과의 의리를 생각했다.

좋은 관계는 버틸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에겐 남아야 할 사람이 없다.



이유 아닌 이유


처음 강릉에 발령받았을 때 좋은 형들도 많았다.

그들도 시기가 되어 원주로 평창으로 옮겼다.

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삼척으로 왔다.


사람을 따라가기엔 육아라는 현실이 더 컸다.

결혼을 해야 해서, 처가와 가까워서 옮기기도 한다.

학교라는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들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때론 어떤 의도치 않은 문제들로 떠나기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 갑작스러운 사고, 깊어지는 다툼.

내가 원했던 이유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이유들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정말 심각한 큰일을 겪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굳이 부딪히고 상처받고 싶진 않다.

할 말은 해야 한다 했던 내가 그냥 도망쳐버리는 사람이 됐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좋은 아이들을 만나기보단 힘든 반을 맡게 될 것이 예상도 된다.

그래도 여기를 벗어나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살면서 또 내 삶의 의미를 잃을지도 모르지만.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은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지금 떠나는 나는 내 자리를 찾고, 떠나지 않을 내가 되기를.

(2024년, 남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모두 그 자리에서 잘 살아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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