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바꿔드립니다

by 삐딱한 나선생

이미 겪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 바꾸고 올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일을 재해석하는 건 가능하다.



좋은 기억


딸들이 1박 2일로 여행을 떠났다.

첫째가 하는 상담에서 체험학습을 갔기 때문이다.

동생도 데려갈 수 있다고 하여 보호자 역할 겸 둘만 갔다.


버스에서 둘이 사진도 찍고 놀았다.

박물관, 아쿠아리움, 점심, 저녁도 보내줬다.

큰 문제없이 일정을 마치고 이튿날 저녁에 만났다.


KakaoTalk_20251209_112001064.jpg


많이 피곤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치킨을 먹으면서 어땠는지 얘기를 나눴다.

주로 불만 섞인 것들이었다.


"방이 완전 별로였어.

애들이 떠들어서 잠도 못 잤어."

"침대에 낙서가 엄청 써져 있는 거야.

같은 방 언니들도 욕을 계속했어."


"단체 숙소라 좀 그럴 수도 있겠다.

애들이 요새는 욕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아.

그래도 방을 같이 썼으면 뭐 놀고 한 건 없어?"


"음.. 넷이서 진실게임도 하고.

언니들이 음료수도 사주긴 했어."


"그 정도면 엄청 나쁜 애들은 아니었나 보네.

너희들한테 해코지하지도 않았고.

우리 딸내미들 잘 다녀왔으면 됐어요~"


같이 짠~ 하면서 다독였다.

처음엔 지쳐서 부정적인 것들을 꺼냈다.

맛있는 걸 먹으며 여유가 생기니 좋은 것도 나왔다.


나쁜 아이들이 괜찮았던 아이들이 되었다.

불편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을 지금의 내가 바꿀 수 있다.


우선은 수용하고 공감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다음엔 과거를 해석할 방향을 제시하는 게 좋겠다.

경험이 나쁜 기억이 아니라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개인적인 기억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가족, 사랑하는 상대, 친구, 공동체와 상호작용할 때마다 개인적인 기억은 항상 그 영향을 받아 재편된다. - [기억한다는 착각] 중



집단 기억


교실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

다툼이 발생하면 모두 피해자만 있다.

내가 당한 것만 떠올려서 주장한다.


교사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게 한다.

친구는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내가 잘못한 것은, 오해한 것은 없을까.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기억하지만.

상대가 본 것, 친구들이 본 것은 또 다르다.

그 모든 것을 합쳐야 온전한 기억이 될 것이다.


날 치고 갔다 생각했는데 친구의 실수였던 것.

나쁜 애라고 생각했는데 이해가 필요한 아이였던 것.

나는 몰랐던 그의 기억을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때론 있다는 것.


KakaoTalk_20251209_111352050_01.jpg


기억은 집단 안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의 기억을 향해 특히 기울어진다. 따라서 집단기억 실험을 할 때 대화를 지배하는 사람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에 지나치게 많이 반영된다.


물론 목소리 큰 애가 방향을 나쁘게 이끌어 갈 때도 있지만.

교사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니까.

1년을 힘겹게 이끌어 왔대도 마지막 목소리를 내줘야지.


이제 25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보낸 시간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며.

그것이 비록 다 지난 후의 가스라이팅이라 할지라도.



기억 매듭


"처음엔 반갑게 인사를 건넸어.

하지만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지.

솔직히 나도 상처를 받았고 조심하게 됐어.

그래도 수업에는 따라와 주고 대답해 주어 다행이야.

더 이해하려 노력하고 너무 불편하지 않을 거리에 있을게.


묵묵히 선생님을 도와주었던 친구들도 알아.

지루해도 불평하지 않고 같이 하려 애써준 것.

지나가다 만나면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도.

교실에 이렇게 모여 있으면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앞으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하는 선생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희들이 재밌게 할 수 있는 활동도 많으면 좋겠는데.

많이 부족한 내가 영어를 맡아서 미안한 마음이 커.

다만 나도 계속 애쓰고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

적어도 나쁜 선생님은 되지 않으려 노력했어.


1년 동안 고생 많았고 방학 잘 보내고 와.

나빴던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겨주렴.

내년엔 우리 모두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길 기대할게."


우리가 서로 협력하며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축하고 갱신하기 때문에, 정체감은 계속 변하는 기반 위에 지어져 있다. 우리는 이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기억을 렌즈 삼아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화해한다.


학생들에게 전하는 말인 동시에 나에게 하는 말.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이제 내려놓아야 하니까.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다독이며 미래로 나아가야지.


내 기억은 마음 쓴 곳에 많이 남았지만.

마음 쓰지 않아도 됐던 고마운 모두를 기억하며.

어지러이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정리하는 기억의 매듭.


KakaoTalk_20251209_111352050_02.jpg


매거진의 이전글빈자리를 채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