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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수영하는 것은 위험해

별로 쓸모 없는 것들의 일기장

by Dark Back of Time

어머니가 나의 백일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귀퉁이가 낡은 흑백사진이었다. 약간 찢긴 왼쪽 아래에 필기체로 <白日(백일)>이라고 각인되어 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었지만, 어머니 집 냉장고에 붙어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리 부부는 어머니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고 어머니 집에 갔던 참이었다. 아내의 부탁을 어머니가 흔쾌히 들어주셨다. 일을 모두 마친 뒤에, 어머니가 냉장고에 있는 떡과 과일을 가져가라 하셨다. 나는 냉장고 앞에서 나의 백일 사진을 발견하곤 주춤했다. 웃음이 나왔다.


떡과 과일을 챙기다가 어머니 몰래 내 사진을 슬그머니 떼어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 내 집에 가지고 왔다. 다이소에서 구입한 오천 원짜리 양면 유리 액자에 내 백일 사진을 넣었다. 액자 뒷면에는 내 딸의 초딩 시절 사진을 하나 넣었다. 책상 위에 액자를 올려두고 바라보니 흐뭇했다.


내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어머니는 아들의 백일 사진이 사라진 것을 알고 의아해 하셨을 것이다. 내게 물어보기도 뭐하고, 집 안 구석구석 뒤져도 없을 테니 답답하실 지도 몰랐다. 아들아, 혹시 네가 여기 있던 백일 사진을 가져갔냐? 하고 물으신다면, 예? 뭐라고요, 어머니? 제 사진을 잃어버리셨다고요? 하고 너스레를 떨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침묵만 하신다. 전화도 없고 질문도 없으시다.


내 딸은, 아빠라는 인물이 자신의 백일 사진을 책상에 올려 두고 매일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뒷면에 너의 초딩 시절 사진이 있어, 하고 딸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내심 수상한 눈치였다. 속으로 중얼거리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딸 사진을 보는 건 이해되어. 아빠들이 흔히 그러니까. 그런데 아빠가 자신의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는 건, 도대체 뭐지?


나 역시, 내가 왜, 나의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볼 때마다 괜히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SF 영화가 하나 있다. 제목이 [패신저스]이다.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호쾌한 댄서로 등장한 제니퍼 로렌스가 여자 주인공이다.


이 공상과학 영화에는 미래의 첨단 장비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럴듯하게 디자인된 미래의 사물들은 볼 때마다 여전히 놀랍고 즐겁다.


영화 속 딜레마 상황도 무척 흥미롭다. 첨단 우주선이 동면 상태에 있는 5,000명의 승객을 태우고 새로운 식민지 행성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이주민들은 모두 동면 상태이다. 이동 시간이 백년도 넘기 때문이다. 우주선에서는 모든 것이 자동 운항되고 있다.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면 승객들이 하나둘 깨어날 예정이다. 그런데 우주선에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


딱 한 명의 남자가 동면에서 깨어나게 된다.


남자는 자기 혼자만 깨어난 것이 매우 황당하다고 느낀다.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90년이 더 남아 있다. 한 번 깨어나면 다시는 동면 상태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막막한 우주를 자동으로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선 속에서, 홀로 깨어난 남자는 광활한 우주 속에 고독하게 던져진 상황을 감내하기 어렵다.


남자는 동면 상태에 있는 다른 승객들을 매일 관찰한다. 아름다운 한 여자에게 끌린다. 그 여자를 깨우고 싶다. 하지만 그녀를 깨우는 것은 너무나 큰 범죄이다. 90년 후에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할 여자이다. 당장 깨운다면 그녀의 삶과 희망이 모두 망가지는 것이다.


남자가 일부러 자신을 깨운 걸 알게 되면 얼마나 황당할까.

광활한 우주 공간에 자신과 다른 남자 한 명,

이렇게 단지 둘이서만 존재하는 삶을 여자가 수용할 수 있을까?


남자는 여자를 깨우고 싶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남자는 너무 고독하다.


결국...



영화는 요즘 대두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잘 보여준다. 머나먼 우주로의 개척 항해, 그리고 완벽한 통제 시스템을 가진 우주선. 단 두 명뿐인 인간. 인공지능 시스템이 있고, 인공지능 로봇도 하나 있다. 로봇은 주인공의 대화 상대 역할을 한다.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1:18:24 지점에서 시작되는 중력 소실 장면이다. 우주선 내부에는 수영장 시설이 있다. 수영장은 어둡고 신비로운 우주 공간 한가운데에서 유영하는 시각적 효과를 제공한다. 여자는 그곳에서 수영을 한다. 갑자기 우주선의 통제 시스템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주선의 전체가 중력을 잃는다.


중력을 상실한 수영장에서는 물이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솟구친다. 크고 작은 물방울이 형성되어 무중력의 내부 공간 이리저리 퍼져나간다.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제니퍼 로렌스는 거대한 물방울 하나에 갇혀 발버둥친다. 벗어나지 못한다. 점점 숨이 차오른다. 영화를 보는 나의 숨마저 콱, 막히는 장면이다.


수영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돈을 많이 번다면, 넓은 정원에 맑고 깨끗한 전용 수영장을 하나 만들고 싶다. 나만의 수영장에서 나는 수영을 할 것이다. 갑자기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고, 중력이 소실되고, 나는 거대한 물방울 거품에 갇혀 허공으로 속절없이 떠오를 것이다.


둥실둥실. 숨 막혀.


아, 숨 막혀.



패신저스3.png 우주에서 수영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 <패신저스>에서.

2024년 6월에 쓴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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