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고야 산다

나를 살게 한 죽음과 삶 이야기

by 다룬

죽은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아무 것도 없을까? 아주 끝일까? 이번 생의 성적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갈까? 내가 어쩌다 이 세상에 왔는지 당사자인 내가 모르는 건 불쾌한 일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모른다. 그런데도 우린 그런 얘길 하지 않는다. 나는 아마 그런 이야기를 실컷 해도 좋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요가를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십대의 나는 '신'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나는 무신론자'라고 했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믿은 건 아니고, 뭐든 하나 입장을 정해야한다 싶어 그랬던 것 같다. 그때가 '신', '사후'라는 것에 그나마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우리 엄마는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성경에 나온대로 천국과 지옥을 믿었는데 세계 보편적인 그 믿음이야말로 나에게는 가장 멀게 느껴졌다. 일단 책에도 영화에도 그림에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서양사람이니까. 우리 나라에는 이미 토속신앙이나, 제사처럼 사후세계를 인정하고 대하는 방식이 따로 있었고 내가 어릴 땐 집에서 초상을 치르기도 했으니까, 동양적인 방식이 내게는 더 익숙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자꾸 꿈을 꾼다고 걱정하시다가 할아버지의 묘에 부엌칼을 꽂아두셨다. 지금와서 찾아보니 망자의 기를 제압하는 행위란다. 생전에도 할아버지 구박을 좀 하셨는데, 돌아가시고서도 기를 제압하려 하셨다니...!


죽음 후를 궁금해하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다닐까,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번듯한 남편을 가질까, 고민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 외양을 갖추고, 다음 수순인 갈등을 거치고서야, 다시 큰 질문을 품게 된다. 큰 질문이라고 해서 그게 꼭 심오하거나 고매한 형태가 아니다.


'왜, 나는 이런 남편을 만나 힘들게 살고, 저 사람은 저런 남편을 만나 사랑받으며 살까?'

'나는 힘든데 당신들은 왜 안힘든거야?'

'세상이 나한테 왜이래?!'


실컷 남 탓, 세상 탓을 하는 폭풍같은 시기를 거치며 탈탈 털리고서야, 이완인지 탈진인지 하는 상태가 되고, 그제서야 조금 명료하게 내가 할 일을 떠올리게 되었나보다. '그렇게 궁금하면, 공부해야지.' 요가철학과 더불어 불교철학도 좀 뒤적이고서야 내가 수긍할만한 세계관, 삶의 구조에 대한 얼개를 찾게 됐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영혼은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반복해서 세상에 우리를 내보낸다."


이번 생은 내가 이번에 택한 학교다. 내가 성장하기에 적합한 장치들이 있는 부모와 장소를 스스로 택해 태어난다. 나를 성장시킬 사건을 끌어당겨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깨닫고 성장하고 이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다. 이 학교를 한번만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무수한 삶을 '억 겁의 세월' 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성장을 다 마치고, '최종 졸업장'을 받은 사람 만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런 한 분을 안다. '붓다'


그러니까 죽음 직후 한동안은, 갑자기 몸을 벗은 상태와 다른 층의 세상에 당황하고 놀라지만 차차 그 층의 세상에서도 벗어나며 '왜 여기 왔더라?' 하고 정신이 들어 스스로 현명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다음 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티벳 사자의 서'를 보면 현명하게 다음 생을 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놀라서 아무나의 뱃 속으로 들어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엉겁결에든 현명하게든, 나는 내게 필요한 이번 삶을 택했고, 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 사람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내가 믿는 이 세계관은 그저 취향에 따른 선택인걸까? 무얼 근거로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는 것일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 믿음은 나를 더 잘 살게 해주니까.


이 믿음 전의 나는 내 삶의 일부를 부품처럼 생각하고 갈아끼우고 싶어했다. '나도 저들처럼 좋은 집에 태어났더라면...', '저 싸이코 사수만 아니라면 회사가 더 편했을텐데...', '내 남편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 삶을 내가 아니라 부모가, 그 사수가, 남편이 결정해준다 인정하는 꼴이었으니 참 가엾은 생각이었다. 그런 나는 참 별로였다.


모든 것이 필요해서 찾아온다고 믿는 지금은 '너무 좋아, 절대 싫어'가 사라지고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는 태도로 심심하게 산다. 심심하고도 충만하다. 죽음을 바라보고서야 '산다'는 기분이 든다. 내 믿음이 취향에서 왔건 진리에서 왔건, 나를 잘 살게 해주니까 되었다. 남들도 이렇게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대도 각자가 택한 각자의 학교니까, 각자의 숙제를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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