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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Oct 05. 2021

끝내 공학도가 되지 못한 떼때족의 비애

The Sorrow of Thayer Quitters

떼때족은 “떼이어를 때려친 족속”의 줄임말로 나와 혜령이가 떼이어 (정식 명칭 떼이어 공과 대학, Thayer School of Engineering)에서 평균 1년 정도의 시행 착오를 거친 끝에 공학 전공을 하고자 했던 입학 당시의 결심을 포기한 것을 자조적으로 가리켜 만든 우리만의 은어이다. 이는 끝까지 독하게 공학 전공을 밀어붙이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의 표현이자, 지옥의 문턱에서 탈출한 살 떨리는 통쾌함의 표현이자, 아직도 “떼때”치 못하고 그 곳에 남아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옛동료(?)에 대한 놀림의 표현이었다.


내가 처음 다트머스에 왔을 때, 내 계획은 건축공학 전공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건축은 미대에서 할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미대라니...! 다트머스가 특별히 미대로 유명한 대학도 아니고 당시 어린 나이에 비해 현실주의적이고 계산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이었던 나는 그건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건축대학원에 진학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건 또 학비가 들어서 어려울테니 바로 취업을 하기에는 건축공학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트머스에서의 건축공학 전공은 엄밀히 말하면 Engineering Modified with Studio Arts 전공인데, 공학에 기반을 두고 미술 수업을 추가로 들어서 비록 학위엔 나오지 않지만 성적표의 수강과목 내역으로 세부 전공을 정의하는 방식이었다. 건축을 하고 싶은 학생들은 공학 수업 외에 드로잉 1, 조소 1, 건축 1, 2, 3 이렇게 총 5개의 미대 수업을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무리 Modified 전공이어도 베이스는 공대이므로, 1학년 때는 본격적으로 공대 수업을 듣기 위한 선수 과목 (pre-requisite)을 이수해야 한다. 필수 선수과목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출처: 다트머스 공과대학 웹사이트)

화학 1 과목, 물리 2 과목, 수학 3 과목, 게다가 컴퓨터 공학 2 과목...! (혹은 더 어려운 1 과목으로 대체 가능) 이렇게 총 7-8 과목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다시 봐도 숨이 막히고 PTSD (Post-Thayer Stress Disorder)가 올 것 같다. 다트머스에서는 1년 (3학기)동안 한 학기에 보통 3 과목씩, 총 9 과목을 수강할 수 있는데, 그 중 7 과목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다트머스에는 Writing 5라는 모든 신입생이 가을학기에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글쓰기 수업도 있으므로 1학년 때 선수과목을 마치려면 1년 내내 다른 재밌는 수업은 하나도 못듣고 공돌이, 아니 예비 공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AP 크레딧이 있었으므로 지옥의 선수과목 중에서 화학 1과목과 수학 1과목은 면제가 되었다. 대신, 1학년 1학기 때 그 다음 레벨의 수학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이게 오히려 악재가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도 수학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공대 선수과목 중 제일 쉬운 수학을 면제받고 그 다음 레벨의 수업에 들어가니 공부를 따라가기가 오히려 더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쿼터제라서 진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솔직히 너무 재미도 없었고 노력 대비 성적도 형편이 없어서 가성비가 엉망이었다. 첫학기부터 성적이 잘 안나오니 전반적으로 사기가 꺾이기도 했다. 다행히 같은 학기에 미대에서 수강했던 "건축 1" 수업은 힘들지만 꽤 재미있었고, 덕분에 '떼이어를 때려칠까'하는 강력한 충동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만, 또다시 선수과목만으로 고통받다가 '내 길이 아닌가봐'하고 때려치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겨울학기에는 선수과목이 아닌 수업코드 앞에 엔지니어링의 약자 ENGS가 붙은 진짜 공대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공대 수업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수과목 이수가 필요 없는 이 수업은 학기 중 실제로 여러 제품을 직접 만들어봐야 하는 "공학 개론" 수업이었는데, 복잡한 수학 공식을 사용하는 수업이 아니라 공학적 사고만 있어도 충분한 수업이었다. 사실 이 수업은 꽤 재미있었다. 성적도 첫학기에 비하면 나쁘지 않게 나와서 "그래, 내가 수학 과학을 좀 못할 뿐이지 막상 선수과목 끝나고 본격적으로 공대 수업 들으면 잘 할수도 있어!"라는 큰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공학도 지망생으로서 생명을 한 학기 연장했다. 


1학년 봄 학기. 도저히 수학이나 물리 수업을 들을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컴퓨터 공학 수업을 듣기로 했다. 앞서 언급했듯 컴퓨터 공학 선수과목은 좀 더 쉬운 과목 2개를 2학기에 걸쳐서 듣는 방법과, 어려운 수업을 듣는 대신 한 학기에 끝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나는 '매도 한 번에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그냥 어려운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이것은 또 한번의 엄청난 실수였다. 3주차쯤 되니 벌써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당시 나는 타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면 남자친구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서 스카이프로 내가 이해할 때까지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곤 했다. 


그의 헌신적인 개인과외와 하드캐리로 간신히 버티던 나는 결국 중간고사 백지코딩을 망쳤는데, 심지어 그 중 한 문제는 아예 0점 처리가 되어 있었다. "왜지?" 나름 생각해서 답을 썼는데 왜 0점인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가 이의를 제기했더니, 교수님은 피식 웃으면서 답안지를 주셨다. 답안지에 적혀있는 코드는 단 10줄이었다. 내가 쓴 코드는 A4용지 3장 분량이었는데 말이다.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전혀 생각을 못하고 쓸데없이 엄청 돌아서 간 것이다. 나는 교수님께 항변했다. "교수님 근데 제 코드도 말은 돼요!!" 교수님은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셨는지 코드를 입력해보고 돌아가면 부분 점수를 주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내 코드를 타이핑했다. 결과는...? 내 코드가 돌아갔다! 교수님은 어이없어하시면서 내 시험지를 가져가 점수를 고쳐주셨고 나는 비효율성으로 인한 감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정말이지 현타가 왔다. 어이없어하면서 비웃던 -실제로는 비웃은 것은 아니고 그냥 웃으신 거겠지만- 교수님의 얼굴이 꿈에도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그 교수님은 조금 잘생겨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내가 평생 뭘 해서 이렇게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정도로 못하면 이건 내 길이 아니지 않을까, 이제라도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컴퓨터 공학 수업을 버틴다고 해도 그 후로 선수과목만 수학 2과목, 물리 2과목이 버티고 있는데... 그걸 들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노래지고 구역질이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건 선수과목에 불과했다. 선수과목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든 버텨서 공대에 꾸역꾸역 들어간들... 공대에서는 따라갈 수 있을까? 만약에 어찌저찌 공대를 졸업해도, 취업은 할 수 있을까? 또 운좋게 취업을 한다고 해도 일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자존감이 바닥을 쳤고,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나는 미련없이 떼이어를 때려치기로 했다. 안타깝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잡초였다! 지난 1년간 들은 수업들, 그 수업들을 듣느라 망한 학점, 어떻게든 따라가보려고 쏟았던 노력, 그리고 마음고생들이 모두 너무 아깝긴 했지만 그게 아깝다고 남은 대학생활을 망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공학 전공이 엄청 하고싶었다기보단, 취업하기에 유리할 것 같아서 공학 전공을 선택하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괜찮아, 취업은 다른 거 공부해서 해보지 뭐! 뭘 해도 이거보단 나을거야...' 막상 때려치고 나니 마음속에 얹혀있던 부정적 생각도 싹 내려가면서 속이 다 시원했다. 


혜령이가 떼이어를 때려친 사연 역시 나와 비슷하다. 혜령이 역시 Engineering Modified with Studio Arts 전공 지망이었는데, 내가 건축공학을 하고 싶어했다면 혜령이는 산업 디자인을 하고 싶어했다. 첫 학기부터 단추를 잘못 꿰어서 고통받은 나와 달리, 혜령이는 1학년부터 차근차근 수학 등 선수과목을 들으며 공학도의 꿈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2학년 가을학기에 물리학 심화입문 수업을 수강하며 공대생 워너비로써 큰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고등학교 공통 과학 이후 물리의 ‘물’자도 들여다 본 적이 없던 혜령이는 다시 공부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거라는 낙천적인 마음이었는데,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진도는 너무 빠르고 내용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방학 때 예습이라도 하고 올 걸'하고 후회가 되었단다. 더군다나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공부 의욕도 떨어져 정말 죽을맛이었다고. ‘하면 된다!’, ‘맨땅에 헤딩’ 식의 접근이 대입까지는 얼추 통했는데, 더는 무대포로 달려들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비록 우리가 선수 과목에서 혹독하게 "잡초 뽑기"를 당하고 떼이어를 때려친 떼때족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유일한 후회라면 더 일찍 떼때족이 되지 않은 거랄까...? 하지만 한 고집 하는 우리 성격을 봤을 때, 한번 하기로 마음 먹은 일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진 못했을 것이다. 어떤 패배는 필연적이다. 비록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학점이 크게 갈려나갔지만, 멋지게 시도하고 장렬하게 패배한 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꼭 필요한 성장통이자 깨달음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포기할 때를 아는" 떼때족이 된 덕분에 우리는 이후 다트머스에서 각자 자신에게 더 맞는 멋진 전공을 찾게 되었고,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안 맞는 전공에 매달리기보단 진짜 하고 싶은 일에 한발짝씩 다가가며 생산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떼이어로 향해 가던 1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때로는 포기해도 괜찮다"는 점과, "어떤 실패도 의미 없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Written by Ellian & Hye Ryung
Edited by El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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