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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Oct 06. 2021

개강 전부터 숙제를 내주는 수업

Fed Challenge? Challenge Accepted! 

(1)  경제학 전공에 정착하다

떼때족인 내가 떼이어를 떠나 정착한 곳은 다트머스에서 길가다 부딪치면 열에 하나 만난다는 경제학 전공이었다. (2014년도 통계에 따르면 보다 정확히는 10명에 1.56명이라고... 심지어 내 추측보다 더 많다) 산업 디자인이 나의 길이 아니라면 대체 뭘 전공해야하나 고민이 깊을 때 앨리안이 경제학을 강력히 추천하여 시작하게 됐는데, 막상 수업을 몇개 들어보니 수학적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성적도 잘 나와서 “그래! 너로 정했다” 하고 눌러앉아 버렸다.

 

경제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거시경제학이 재미있었는데, 아무래도 처음 들었던 거시경제 원론 수업의 영향 같다. 담당 교수님이 괴짜스러운 구석이 있으셨는데, 우리에게 거시경제원칙으로 만든 “Chant”를 외치게 만드는 등 다소 유치하긴 했지만 마치 고등학교 수업처럼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전달하셨다. 쉽게 배워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뭘 좀 아는 것 같은 으쓱한 기분에 그 뒤로 거시경제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가 되었다.


(2) 수업을 듣기 위해 지원서를 별도로 써야한다!?

그렇게 착실하게 경제학도가 되어가던 중 내 눈에 띈 수업이 있었으니 "Econ78: Fed Challenge" 였다. Fed Challenge는 원래 미국 연준(The Federal Reserve Board, 연방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하는 통화정책 경시대회를 말한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회가 있는데, 팀을 이룬 참가학생들이 미국 국내외 경제동향을 분석해 마치 그들이 Fed가 된 것처럼 통화정책 방향을 발표하는 대회이다. 보통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팀을 등록할 수 있는 한국의 대회와는 다르게, Fed Challenge는 대학마다 단 한 팀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다트머스처럼 아예 대회 준비를 위한 수업이 개설되기도 한다. 


Econ78를 수강하면 다트머스 대학의 대표로 Fed Challenge에 참가하거나, 직접 참가하는 학생을 도와 대회를 준비할 수 있다보니, 수업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봄 학기에 있는 수업 설명회에만 3-40명 남짓한 학생이 참관했고, 설명회에 오지 않은 학생들도 이 독특한 수업을 듣기 위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다! 이 수업은 무려 수강신청을 위한 지원서가 따로 있다. 인기도 높고, 수강생이 곧 잠재적 대표팀이기 때문에 담당 교수님이 지원서를 심사해 단 10명의 학생에게만 수강자격을 부여한다.


이렇게 경쟁률 높은 수업이지만, 나는 운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일하고 싶다고 쓴 것이 교수님의 마음을 흔든 것 같다. 당시 내 진로방향은 좋게 말해 “유연”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아주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긴 했다. (실제로 졸업 후 잠시 한은을 준비하기도 했다...!) 거시경제학에 대해 더 배우고, 구체적으로 통화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체험할 수 있겠다 싶어 많이 기대가 되었다.


(3) 개강 전부터 방학숙제가 있다?!

Econ78은 가을학기에만 개설되는데 대회가 11월(지역예선), 12월(결선)에 있기 때문이다. 지역예선은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리치몬드, 시카고 5개 연준 지부에서, 결선은 워싱턴 D.C.의 연준 헤드쿼터에서 열린다. 

하필 다트머스가 속한 보스턴 지역 예선은 하버드, 예일, 브라운, MIT 등 명문대들이 포진해 있어 경쟁이 특히 치열했다. 또한 오랜 기간 Fed Challenge에 참여해 연륜과 노하우를 가진 “강소” 학교들도 있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트머스의 발목을 잡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그놈의 쿼터제였다! 학기제인 대부분의 학교들과 달리 다트머스는 가을 학기 개강이 9월 중반으로 늦어 그만큼 대회를 준비할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단편적 예를 들어보자면 2014년의 가을학기 개강일은 8월 30일, 다트머스는 9월 15일이었다. 2주라는 시간이 작아 보여도, 1~2점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이 대회에서는 승패를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차이였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지도교수님은 방학숙제(!) 카드를 꺼내셨다.

 

방학 동안 지속적으로 Janet Yellen 의장의 최근 발언이나 꼭 알아야 할 거시경제 개념 등 관련 내용에 대해 자료를 보내시고 우리가 이를 미리 읽어보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Fed에서 모니터링하는 경제지표 3가지를 골라 조사하고 첫 수업에 발표하는 과제도 해야 했다.


지금의 나라면 좌절하며 “방학숙제라니!!!!”를 외쳤겠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열의에 불탔다. 첫 수업의 발표는 지도교수님과 9명의 학우들 앞에서 처음으로 나를 드러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발표에 대한 학우들의 평가가 실제 대회에 출전할 5명을 뽑는 기준이 된다고 하니 더욱 의지가 다져졌다. 나는 소중한 방학 시간을 잔뜩 투자해 열심히 조사하고 공부를 했다. 


(4) 도전! Fed Challenge

방학숙제 발표가 있었던 첫 수업은 폭풍처럼 지나갔다. 결과는? 나는 대회 참가인원 선발에 탈락했다. 이제 내 역할은 리서치 어시스턴트, 즉 직접 대회에 참가하는 학우를 도와 발표자료를 준비하는 역할이었다.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발표만 하지 않을 뿐 우리의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는 똑같이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조사와 연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기 첫 4주 정도는 다른 수업에서처럼 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거시경제원론 수업에서는 통화정책에 관한 내용을 수업 한번으로 다루고 끝내기 때문에 새로 배워야 할 내용이 많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시스템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는 배운 적이 없었다. 또 통화정책이 어떤 매커니즘으로 경제에 작용하는지, 통화정책의 도구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새로 개발된 도구가 있는지도 더 자세히 배웠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직접 FOMC(공개시장조작위원회, Fed의 통화정책결정기구)의 회의록을 읽고 Fed가 정책결정에 앞서 어떤 내용을 검토하는지, 그리고 결정한 방향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배운 것이다. 특히나 Fed는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단어 하나도 고심해서 선택하기 때문에, Fed가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도 유심히 봤다.


그 과정에서 과거 영국의 금융통화위원회에 재직하신 교수님이 초청강의를 해주시기도 했다. 이분은 특히나 자신의 전공분야인 노동, 더 구체적으로는 실업률과 임금 인상률이 최근 Fed의 주관심사와 겹쳐 Fed 의장 Janet Yellen에게 조언을 하기도 하고 각종 금융포럼에 초청돼 통화정책 관련 발표를 하기도 하는 분이었다. 최근의 행보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실제 영국에서 통화정책 결정에 참여하신 분이라 정말 신기했다.


(5) Fed Challenge가 괜히 “Challenge”가 아니다.

Fed Challenge를 준비하는 내내 우리 모두는 논문을 많이 읽어야 했다. 전년도 대회에서 우리의 랭킹은 하버드에 아쉽게 패해 2위였는데, 당시 하버드 팀이 여러 편의 테크니컬 페이퍼(세밀한 내용이 담긴 전문적 내용의 논문)를 인용한 것이 주요 승리요인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우리도 학부 수준 이상의 전문적인 내용을 녹여내기 위해 경제지표 간의 상관관계에서부터 금리 조정 도구의 효과성까지 다양한 주제의 관련 논문을 읽었고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도 다수 인용했다.


논문을 읽는 과정은 정말 험난했다. 아직 전공 세미나수업을 듣지 않아서 논문을 읽는 요령이 없었고, 그렇다보니 어떤 논문은 식을 유도하는 과정을 일일히 따라가다가 밤을 새버린 적도 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어떤 데이터를 사용했는지, 어떤 식을 세워 분석했는지, 회귀분석을 한 결과 수치가 어떻게 나왔는지, 저자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정도만 보면 되는데 그걸 몰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읽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논문들이었는데, 이건 정말이지 좌절스러웠다. 수강생 중에는 경제학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고 금융회사에서 인턴을 경험한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에 전공을 바꾼지 얼마 되지 않은 나와는 배경지식의 수준에서 차이가 컸다. 10명의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K양만 나와 이런 고충을 함께해서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노백 카페에 앉아서 우리의 무식함 또는 머리 나쁨에 대해 함께 슬퍼하곤 했다.


4주간의 강의가 끝난 뒤 나머지 4주 동안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통화정책안의 틀을 잡아나가고 그에 맞게 스크립트와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2주 전부터는 계속 공개연습 세션을 가지면서 스크립트와 슬라이드를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경제학과 교수님을 초대해 마치 심사위원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시게 했다. 


흥미롭게도 오시는 교수님마다 본인의 연구분야나 관점에 따라 물어보시는 질문도 달랐는데, 그 중 금융경제학을 가르치시는 Meir Kohn 교수님은 본질적으로 통화정책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믿으시는 분이라 질문하기를 거절하셨다. (그런데 또 참관은 하셨다.) 교수님 이외에 경제원론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도 자유롭게 참관할 수 있었는데, 마침 Curtis 교수님과 Zarnowski 교수님이 모두 Econ1 수업을 가르치시고 계셔서 그 제자로 보이는 몇 어린 학생들이 수줍게 연습을 참관하고 갔다.


참관생 중 최고봉은 우리 대학교의 총장인 Phil Hanlon 총장이었는데, 그가 참관 온 날에는 다트머스 대학교의 대외홍보처에서도 함께 방문해 우리들의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이날 취재 내용은 부담스럽게도 다트머스 홈페이지 메인에 떡하니 “경제학과 학생들 Fed Challenge를 준비하다” 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Written by Hye R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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