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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Oct 06. 2021

자네, 성적을 걸고 도박 한번 해보겠나?

Non-Recording Option

아이비리그 중 다트머스와 브라운은 학부 교육을 중심으로 한 리버럴 아츠 대학 (Liberal Arts College)으로, 학생들에게 실용적인 기술 습득보다는 인문학 전반과 순수 자연과학에 걸친 폭넓은 학습을 권장한다. 하지만 그런 교육을 제공한다고 해서 실용성과 가성비를 중시하는 요즘 학생들이 비인기 인문학 수업을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기 때문에, 다트머스에는 학생들이 인문학 수업을 듣도록 강제하기 위한 "Distributive and World Culture Requirement"라는 졸업 필수 요건이 있다.


(출처: 다트머스 웹사이트)

먼저 Distributive Requirement는 다양한 분야에서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으로, 한국 대학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교양과목이다. 다트머스의 모든 수업에는 분류 카테고리가 있는데, 학생들은 미술 (ART), 문학 (LIT), 종교 혹은 철학 (TMV), 국제학 혹은 비교학 (INT), 사회과학 (SOC), 수학 (QDS), 자연과학과 물리 (SCI/SLA), 기술 혹은 응용과학 (TAS/TLA) 이렇게 총 8개 카테고리에서 최소 하나씩 (사회과학은 두개)의 수업을 들어야 한다. 다트머스 학생들은 이 졸업요건을 줄여서 "디스트립"이라고 부른다.


보통 자신의 전공에 따라 일부 디스트립은 저절로 채워진다. 이를테면,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선수과목에서 QDS, SCI 카테고리의 수업을 무조건 듣게 되고, 공대 전공과목은 모두 TAS나 TLA 카테고리일테니 TAS/TLA 카테고리는 산더미처럼 채우게 된다. 하지만 이 학생은 아마도 본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자발적으로 TMV나 ART 카테고리의 수업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디스트립은 이 학생이 자신의 관심사와 Comfort Zone에서 벗어나 ART 카테고리의 미대나 음대 혹은 연극과의 수업을 듣고, TMV 카테고리의 종교나 철학 수업을 듣도록 만든다. 인문학적 소양을 강제로 기르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 인류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보통 전공수업이 SOC나 INT 카테고리이고 별다른 관심이 없다면 굳이 일부러 자연과학 수업을 찾아듣지 않을 것이다. 디스트립은 이런 학생이 SCI/SLA 카테고리의 천문학이나 지구과학같은 자연과학 수업을 최소 하나라도 들어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World Culture Requirement는 학생들이 (1) 서구 문화 (W), (2) 비서구 문화 (NW), (3) 문화와 정체성 (CI) 세가지 중 하나의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수업을 무조건 하나는 수강해야 졸업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디스트립과 달리, 다트머스의 모든 수업에 세계문화 카테고리가 붙어있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말이 되긴 하는 것이, "선형대수학"이나 "물리 1"에 저 셋 중 대체 무슨 세계문화 카테고리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세계문화 카테고리는 디스트립에 추가적으로 붙어있는 수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수업도 있기 때문에 보통 학생들은 디스트립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넣는 수업 중 하나에서 이 카테고리를 채우곤 한다. 이를테면, 음대에서 아시아 및 중동학과와 함께 제공하는 "글로벌 사운드"라는 수업은 세계 각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배우는 수업인데 이 수업을 들으면 ART와 NW (Non Western)를 카테고리를 동시에 채울 수 있다.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수업을 들어보도록 장려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인 교육처럼 들릴  모른다. 하지만 만약 어떤 학생이 고등학교때부터 이름난 수포자였던 미대생이라면...? QDS 카테고리를 채우기 위해 가장 쉬운 수학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애초에 별로 듣고 싶지도 않던  수업 하나 때문에 한학기 동안 엄청나게 고통을 받을 것이다. 자신이 없는 분야이니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 부담스러운  또한 당연하다.


그래서 다트머스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NRO (Non Recording Option)라는 제도를 운영한다. NRO는 말 그대로 "기록하지 않는 옵션"인데, 내 성적이 성적표에 적히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선택지이다. NRO를 사용하게 되면 수업을 들은 학점은 인정되지만, 그 수업에서 받은 성적이 학점에 합산되지는 않으며, 성적표에는 성적 대신 NR이라고 표기된다. 졸업할 때까지 최대 3번까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NRO를 썼다고 하더라도 E 이하가 뜨면 학점이 아예 인정되지 않으며, 성적표에도 성적이 고스란히 뜬다. 디스트립을 NRO해서 NR이 뜬 경우에는, 해당 카테고리를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전공과목 중에는 간혹 NRO 사용이 불가하다고 명시되어있는 과목들도 있다.


NRO를 사용하려면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그 수업에 NRO를 쓰겠다고 신청해야 한다. 사실 NRO를 쓰는 방법은 일종의 도박에 가깝다. 내가 어떤 수업이 재밌을 것 같아서 (혹은 들어야 해서)  도전해보고 싶은데 나에겐 조금 생소한 분야이고 그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면, 내가 받아도 만족할 성적에다가 NRO를 걸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B+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생각이 들면, B+에 NRO를 걸어놓고 수업을 듣는 것이다. 만약 최종적으로 내 성적이 B+거나 그 위면 성적표에 성적이 뜨고 그 밑이면 성적표에는 NR이라고만 뜨게 된다.


NRO를 거는 기준은 학기 초에 정하고 학기 중반까지 (보통 기말 시험을 보기 2주 전까지) 실제 수업의 난이도와 자신의 과제 혹은 시험 성적 추이를 보면서 마음껏 바꿀 수 있는데, 여기서 자신과의 심리싸움이 시작된다.

(NRO를 A-에 했는데 A-는 안 나올 것 같다고? B+로 바꾸자니 학점이 깎여서 고민이고?)

NRO를 써서 NR을 받은 과목은 비록 학점을 깎아먹진 않지만 전공과목이나 디스트립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므로, 제때 졸업을 하기 위해 그 학점을 꼭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이면 절대 NR을 받아서는 안된다. 결국 '그냥 NRO 기준을 낮추고 점수를 받아야 하나' vs. '그렇다고 안 좋은 점수를 받아서 학점을 망칠 수 없는데' 라는 두 의견이 천사와 악마처럼 머릿속에서 팽팽히 대립한다.


보통 1학년 때는 열정과 의욕만 앞서는 신입생들이 아이비리그 대학을 마치 자신이 잘나가던(?) 고등학교 시절처럼 생각하고 절대  A-이하의 점수는 받을리가 없다는 자만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내 성적표에 B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우매한 신입생들은 심심치 않게 A-에 NRO를 걸었다가 B+이나 B를 받아서 성적표에 NR이 뜨곤 한다. 다트머스에서 한 학기만 지나고 나면 바로 후회할 짓이다. 미국 전체, 아니 전세계에서 똑똑하다는 애들은 다 모아놓은 다트머스에서 인생의 쓴 맛을 좀 본 후에야 B+가 얼마나 소중한 점수인지를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송희에게는 1학년 봄 학기에 들은 컴퓨터 과학 수업이, 나에게는 2학년 가을 학기에 들은 음악 수업이 그랬다. 여느 다트머스 신입생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눈이 높았던 송희는 TAS/TLA 디스트립을 채우려고 들었던 컴퓨터과학 개론(COSC1: Introduction to Programming & Computation) 수업의 NRO를 신청하며  ‘A- 보다 낮은 성적을 받아서 뭐해!’ 하며 학기 초에 NRO 를 A-에 걸어놓았다. 결국 이 수업에서는 최종적으로 B+를 받게 되었는데, NRO 기준 눈치게임에 실패한 탓에 귀중한 B+를 홀라당 날려먹었고 송희는 TAS/TLA 디스트립을 미루다가 4학년 때 다른 수업에서 채워야 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B+도 엄청 소중한 점수인데 왜 당시엔 A-가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마인드였을까?


그래서 사실 나는 NRO가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한 제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디스트립을 채우기 위해 들은 수업에서 NR을 받으면 디스트립을 채운 것으로 인정이 안되어서 결국 나중에 다시 다른 수업을 들어야 하고,  그 카테고리가 엄청 싫어하는 분야일때는 한 학기 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엄청 힘겹고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이다. NRO를 걸고 수업을 들었다가 예상보다 잘 풀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자신이 어느 정도 성적을 받을 것인지를 계속 점쳐보며 NRO 기준을 마감 데드라인까지 이리저리 바꾸거나, 심지어는 아예 NR을 받을 각오로 포기하고 'E 이하만 안뜨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 수업을 아예 버리게 되기도 한다.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만든 제도지만 어떻게 보면 한 학기 내내 성적에 더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 원래 취지에 잘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아이비리그인 브라운 대학의 경우, 학생이 원한다면 입학부터 졸업까지 전공을 포함한 모든 수업을 Pass/Fail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브라운 대학에서 쓰는 정확한 용어로는 Satisfactory를 뜻하는 S와 No Credit을 뜻하는 NC다) 물론 이런 제도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 모든 수업의 성적을 Pass/Fail로 받기를 선택하는 학생은 거의 없단다. 성적표에 알파벳으로 된 성적이 없는 것이 추후 로스쿨, 의과대학원, MBA 등에 진학하는데나 취업을 하는데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운 학생들은 꼭 필요할 때만 수업을 Pass/Fail로 듣기를 선택한다고 하는데, 브라운 대학의 이런 방식이 오히려 학생들의 성적 관리에도 도움이 되고, 학생들이 점수 걱정 없이 좀 더 다양한 분야를 탐색해보도록 하는 취지에도 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Written by Haeri

Edited by Ellian

Cover Photo by Alan Levine (https://pxhere.com/ko/photo/2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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