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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Green Grads Oct 25. 2021

기숙사 조교의 고통: 내 면도기 좀 쓰지 마!

Stop Using My Razor!

내가 기숙사 조교로서 담당했던 모튼 (Morton)의 1, 2층의 방은 대부분 1인실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두 개 방이 하나의 화장실로 연결이 되어 있다. 두 명이 공유하는 이 화장실은 양 쪽 끝에 각각 문이 달려 있는데,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내 방 쪽 문이 아닌 상대방 쪽 문을 잠가야 한다. 물론 내 방에 손님이 와 있다면 내 방도 잠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졸업한 이후 모튼에 큰 불이 나서 대대적으로 레노베이션 된 적이 있어 도면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느낌에 화장실 문이 양쪽 방으로 나있었다)

Morton 201호에 거주하며 기숙사 조교 (UGA)로 일하던 마지막 해에 나와 화장실을 공유하던 일명 “화장실메이트”는 인도 여학생 S로, 나와 같은 학번 동기였다. 특이하게도 부모님이 해노버에 거주하는데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친구였는데, 부모님 집에 워낙 자주 가기도 하고 애초에 생활패턴이 매우 다른 동기였기에 화장실메이트가 된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S가 자꾸 내 면도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남의 면도기를 몰래 사용했으면 털이라도 깨끗이 제거해 모르도록 해놓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자꾸 흔적을 남겨 내가 알아채게 만들었다. 같은 아시아인이라도 한국인과 인도인은 딱 보면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털의 색과 두께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나는 짜증이 났다. S와 나는 동기이기도 하고, 같이 아는 친구도 많았다. 하지만 UGA의 입장에서 화장실을 같이 쓰는 사생에게 “너 혹시 내 면도기 썼니?”라고 대놓고 묻기는 조금 껄끄러웠다. 만약 그녀가 완강하게 부인한다면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될 터였다. 나는 그냥 참기로 했다.


‘그래 그거 너 써라, 써! 면도기 그깟 거 내가 하나 더 사면 되지 뭐!’


나는 짜증을 누르고 편의점에서 기존에 있던 면도기와 전혀 다른 색의 새로운 면도기를 구입해왔다. 그리고 손잡이 부분에 네임펜으로 “앨.리.안”이라고 이름을 꾹꾹 눌러 쓴 후 화장실에 두었다. 


처음 며칠간은 괜찮은 듯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장실메이트 쓰라고 화장실에 둔 기존 면도기는 깨끗한 상태인데, 내가 새로 사 온 면도기에 그녀가 쓴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살짝 화가 났다.


‘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걸까?’

잔뜩 짜증이 난 나는 면도기 두 개를 집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하지만 그녀를 직접 대면하고 따지자니 역시 어색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았다. 내가 UGA만 아니었다면 그냥 확 대놓고 망신을 줘버리는 건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고등학생 시절 보건 교육 중 에이즈 예방에 배운 내용이 떠올랐다. 


나는 미 보건 당국의 홈페이지를 뒤져 에이즈 예방을 위한 생활 지침 가이드라인 같은 것을 찾아 출력했다. 그리고는 “칫솔, 손톱깎이, 면도기 등의 개인 용품을 같이 쓰지 말 것!”이라고 적힌 부분에 형광펜으로 표시한 후, S의 방 쪽으로 향하는 화장실 문에 붙여두었다.


붙여놓은 종이는 다음 날 바로 사라졌다. S로부터 뭔가 언급이 있을까 했지만, 그녀는 나를 마주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행동했다. 나는 면도기를 한번 더 새로 샀고, 그녀는 자신의 면도기를 사놓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더 이상 내 면도기를 쓰지는 않았다. 다소 시니컬했던 내 대처법이 효과를 본 것일까? 대체 S는 왜 자꾸 내 면도기를 썼던 건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Written by El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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