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규 작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소설쓰기가 제대로 뒤엉킨 경우가 있었다. 출판사 편집부에 장편소설 원고를 넘겨주기로 한 날짜가 3일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단편소설도 아니다. 보통 장편소설이라면 최소 분량이라 해도 원고지 800매는 넘겨야 하는 상황. 그런데 남은 시간이 고작 3일이라니. 그야말로 마감이 코앞에 다가온 필자의 책상 앞에 놓인 원고엔 한 문장도 쓰여 있지 않았다. 켜진 노트북, 한글 파일의 텅 빈 문서에 적혀 있는 거라곤 딱 하나, 제목뿐이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로 밥 먹고 사는 소설가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필자는 출판사와 약속했던 원고 마감일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그렇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3일 남은 마감 시간에 맞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 보였다. 텅 빈 백지만 주어졌으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래도 까짓것 부딪히고 보자는 심정으로 필자는 노트북을 챙겨 들고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전문점을 찾아 조용하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밤샘을 위한 기본 옵션으로 아메리카노 대형 사이즈 석 잔을 잽싸게 주문해 놓은 다음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고 팔뚝 제대로 걷어붙이고 본격적인 소설쓰기에 돌입했다.
일단은 제목을 생각해 두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제목 안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거칠게나마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정서, 장르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결정한 다음엔 주저 없이 등장인물을 생각했다. 생각한 것들은 일단 노트북에 두서없이 적어 넣었다. 그렇게 메모를 시작하니 그다음부터는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생각해 낸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세 명이었다. 젊은 여자 한 명과 또래의 남자, 그리고 나이 든 남자. 그렇게 셋으로 압축되었다. 먼저 적은 등장인물들의 특성과 평소 필자가 그려 내고 싶었던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거칠게나마 정리했는데, 그것들을 이리 섞고 저리 섞다 보니 세 명의 등장인물 중 최종적으로 한 명의 주인공이 결정되었다. 시크한 스타일이지만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게다가 적당한 정의감까지 갖춘 주인공은 젊은 여자였고, 직업은 초선 국회의원으로 결정했다.
주인공인 그녀는 주어진 정의감으로 자신에게 닥친 사건을 일종의 극복해 내야 할 파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주인공에게 부여하면 다른 두 명의 주연급 인물들의 역할도 비교적 선명해진다. 남자는 강력계 형사로 국회의원인 여자 주인공을 돕는 역할이지만 그녀를 돕는 과정에서 한 번의 갈등을 겪고 그 갈등으로 인해 더 큰 사건과 맞닥뜨린다는 대략의 줄거리가 결정되었다. 나이 든 남자는 젊은 여자가 맞닥뜨린 운명적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로 설정했다. 주인공 여자가 파헤친 배후에 존재한다는 식의 비중을 지닌 인물로는 원로의 느낌이 제격이었다. 인생을 달관한 듯 너그러움이 물씬 풍기지만 내면엔 온갖 악의가 들끓는 노욕으로 가득한 야누스적 인물이 나이 든 남자의 역할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등장인물의 역할과 캐릭터 분석이 끝나면 그다음부터가 중요해진다. 바로 플롯과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등장인물 캐릭터와 향후 예상 동선을 구성하자 저녁 10시에 시작했던 커피전문점에서의 작업은 어느새 다음 날 아침으로 넘어섰다. 그 무렵 필자는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빠져들었다. 이야기 구조를 대충 머릿속으로 간단하고 헐겁게 저장한 다음 바로 초고쓰기를 시작할지, 아니면 좀 더 시간이 걸려도 보다 촘촘하게, 무엇보다 초고를 쓰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고민은 언제나 그랬듯 후자 쪽의 결정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걸려도 납득할 수 있는, 소위 말리지 않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자는 게 필자의 선택이었다.
때론 고전적인 방법이 주효할 때가 있다. 기승전결을 만드는 것.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더 구체적인 살을 붙일 필요가 있다. 이야기 시작인 ‘기’ 안에서도 ‘기승전결’을 구성하고, ‘승’, ‘전’, ‘결’에도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가져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보통 장편소설 흐름에선 기승전결의 각 전개과정마다 큰 사건이 한두 개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야기 시작에 필요한 사건이 있으면 그 사건을 전개과정인 ‘승’으로 이어 주는 연결고리에 어울리는 사건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필자는 일단 전체 이야기를 100자 이내의 줄거리로 요약한 다음 기승전결 구조에서 나올 수 있을 법한 사건들을 각 전개과정마다 서너 개 정도 떠오르는 대로 적어 넣었다. 그다음엔 이른바 퍼즐 맞추기 시간이다. 기승전결마다 일어나는 큰 사건들을 전체 줄거리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결 가능한 사건들과 함께 조합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기에서 승으로 넘어갈 때와 승에서 전, 그렇게 각 전개과정으로 넘어갈 때에 등장인물의 감정과 예상 동선에 효과적으로 들어맞는 사건을 결정하는 일이 구조 만들기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큰 사건들을 결정하고 난 뒤로도 세부 작업은 필요했다. 사건의 연결고리와 맥락을 이어 주는 보다 디테일한 이야기 고리를 만드는 작업인데,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 세부 작업이 까다롭지 않게 풀릴 수 있는 전제는 앞서 큰 사건들의 조합이 어색하지 않을 경우에 가능하다. 만약 세부 이야기 세공 작업에서 앞뒤 사건의 정황이 맞지 않는 틀니처럼 어긋남의 연속이라면 처음으로 돌아가 사건들을 다시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십중팔구 주제와는 한참 엇나가 삼천포로 빠져 버린다.
등장인물을 적고 100자 줄거리 방향에 맞는 기승전결 구성, 이야기 흐름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사건 발굴, 사건과 사건을 잇는 연결고리 작업까지 완성하는 데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렸다. 남은 시간은 딱 그만큼의 시간뿐이었고,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엉덩이와 졸음의 싸움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록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72시간 만에 200자 원고지 820매 분량의 소설쓰기는 예정대로 완결되었다. 작품의 성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감일에 원고를 넘겼을 때 밀려드는 뿌듯함은 뭐랄까, 갱도에서 갓 빠져나온 광부의 기분이라고 할까. 그 해방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속도전이 가능한 저변엔 탄탄한 이야기 구성, 즉 소설의 밑그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말한 탄탄함이란 스스로를 설득하는 수준이다. 일단 제일 처음 소설을 읽는 독자이자 저자인 글쓴이의 눈에 한 번에 들어오고 단숨에 설득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말한 탄탄함은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스스로에게 묵직한 감동을 심어 줄 수 있는 이야기인지에 대한 확신을 말함이다. 이 탄탄한 밑그림이 이야기 바탕으로 자리 잡으면 그 후부터의 글쓰기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 이야기는 끝을 보겠구나’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하다. 끝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은 글을 쓰는 자신이 이야기를 제대로 장악했다는 심리로 이어진다. 만약 글쓰기의 주인이 글쓴이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글쓰기는 쓰는 이에게 피로감만 안겨 주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표현하고픈 주제마저 피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3일 만에 장편소설 쓰기는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72시간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아메리카노 커피만 죽어라 들이부은 대가는 가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지금 살아 숨 쉬는 자신만의 탄탄한 이야기 설계도가 있다면, 감히 단언하건대 소설의 3분의 2는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밝혀 두고 싶다.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소설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주원규
서울에서 태어나 2009년부터 소설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현재는 소수가 모여 성서를 강독하는 종교 활동에 집중하고 있으며, 해체와 아나키즘, 공유 융합의 가능성을 살피는 해체와공유문화연구소 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열외인종 잔혹사》를 비롯해 장편소설 《나쁜 하나님》 《천하무적 불량야구단》 《망루》 《반인간선언》 《크리스마스 캐럴》 《기억의 문》 《무력소년 생존기》, 청소년 소설 《아지트》 《주유천하 탐정기》, 에세이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평론집 《땅의 예수, 하늘의 예수》 《성역과 바벨》 《진보의 예수, 보수의 예수》 등이 있으며 2017년 tvN 드라마 〈아르곤〉을 집필했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