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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와 배경: 세상을 담은 이야기

배명훈 작가

by 도서출판 다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정말로 그런 걸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이야기들의 조상인 신화라는 건 태양과 달과 번개와 하늘과 땅과 바다의 이야기, 즉 세상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법이니까.

나는 모든 이야기는 인물과 세계의 배합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9:1의 배합일 수도, 4:6의 배합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10:0의 배합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소설은 결국 인물과 세계의 비중이 10:0인 이야기라고 가르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물이 중심이니 세계는 잘해야 ‘배경’이라고 이름표밖에 달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 소설 속의 세계는 그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세계가 인물들과 똑같은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활약해야만 하는 SF나 다른 여러 가지 장르소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의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나는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이 학문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과에 지원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이게 웬일! 이 과에서 가르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세계’가 아닌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이것이었다. 써먹을 데가 아무 데도 없다는 것. 예를 들어, 컴퓨터를 4년간 전공한 사람은 컴퓨터에 관해서 뭐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를 4년간 공부한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실용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안목을 여분의 교양으로 장착하게 되었을 뿐. 남들은 거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 규모의 이야기도 나라가 두세 개쯤 나오는 정도로는 그저 미시적인 이야기로 분류해야 할 정도이니, 왕이 되거나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기 전에는 활용할 만한 곳이 전혀 없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정말로 전공을 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를 내 마음대로 만들었다가 또 내 마음대로 없애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다. 소설 속에 세계를 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반대로 소설만큼 세계를 담아내기에 편한 곳도 없다. 왜 이 좋은 기회를 없애 버리려고 하는 걸까. 궁금하고 안타깝지만, 그저 나라가 작아서 그렇겠거니 하면서, 다음 세대쯤에는 뭔가 좀 달라져 있겠지 하고 기대해 볼 따름이다.


그럼 세계는 어떻게 소설 속에 담길 수 있을까. 다시 국제정치학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관해 배우려고 들어갔다가 ‘세계’에 관한 것만 잔뜩 배우게 된 이야기의 다음 장.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됐는데, 사실 이 학문은 내가 맨 처음 생각했던 그게 맞았다. ‘세상’에 관한 학문이었다는 말이다. 원리는 이렇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깊어서, 인간은 무슨 수를 써도 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전부 다 인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 놓여 있는 객관적인 사물들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 내서 그것들만을 가지고 다시 자기만의 세계를 재구성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는 다시 ‘세상’이 되어 버린다.

사실 이건 좀 더 작은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카페에 가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각자 그 공간을 한번 묘사해 보자. 두 사람은 과연 똑같은 묘사를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누가 묘사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분명히 달라진다. 카페에 놓여 있는 물건들 중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관점과 심리학자의 관점이 다를 것이고, 열아홉 살 소녀의 관점과 일흔 살 노년의 관점도 또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이처럼 세계는 곧 사람이다. 세계와 사람이 배합된 결과, 그게 바로 세상이다. 소설 속에는 언제나 그 세상이 담기기 마련이다.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모든 이야기를 인물 중심으로 환원해서 분석하는 방식 이상으로 그 이야기에 담긴 세상을 읽는 것 또한 멋진 일이 아닐까.


나는 소설 속에 담긴 세상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자신이 놓여 있는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그 세계에 놓여 있는 어떤어떤 것들을 골라냈는지를 보는 게 재미있다. 정말이지, 이건 정답이 없다. 뭘 고르든 작가의 선택이다. 그리고 틀리게 묘사된 세계일수록 더 가치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콘택트』라는 SF소설에서는 세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국제정치학자가 쓴 소설 수준으로 정교하게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정교한 세계에는 한 가지 이상한 균열이 있다. 새천년을 맞는 시점, 즉 2000년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점에도, 세계는 아직도 미국 진영과 소련 진영 사이의 양극 체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유는, 이 소설이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쓰였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틀린 세계는 재미있는 세계가 된다. 2000년까지 쭉 확장된 1985년의 세계라니.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재미있는 장면이 발견된다. 악당들이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에 돌입하도록 음모를 꾸미는 장면 뒤에 펼쳐진 지도. 핵미사일이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과 소련을 향해 날아간다. 그런데 이 장면이 좀 특이하다. 실제 냉전기에 양측의 핵미사일은 북극을 가로질러 날아가게 돼 있었다. 왜 그런지는 지구본을 보면 1초 만에 알 수 있다. 그쪽이 최단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모난 지도를 놓고 보면 미사일들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동서로 날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든 세계는, 사실 네모였던 것이다. 본인들이야 좀 무안하기는 하겠지만, 이 네모난 세계는, 참으로 즐겁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세상’이란 건 바로 이런, 주어진 객관적인 현실과는 조금 어긋나 있는, 당신 머릿속에 든 그 세상이다. 그 어긋난 굴곡이 바로 당신의 개성을 말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팁 하나. 세계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방법에는, 세계에 놓여 있는 사물을 잘 선별해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묘사하는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 줌으로써 정말로 그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연작소설집 『타워』에서 나는 인구 50만 명이 살고 있는 674층짜리 가상건물 안의 세계를 묘사한 적이 있다. 독립된 주권을 가진 도시국가가 되어 버린 이 커다란 빌딩 속 풍경들을 본 독자들은, 내 머릿속에 이 건물의 자세한 설계도와 층별 구조에 대한 세밀한 설정, 특히 지하철 노선도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엘리베이터 노선에 대한 입체적인 그림이, 청사진처럼 명확하게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종종 그 설계도의 일부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나에게 해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 머릿속에는 그런 자세한 세부도가 들어 있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단지 이 도시가 작동하는 원리 정도였고, 그게 작동하는 모습을 이 책에 실린 몇몇 단편들을 통해 보여 줌으로써 이 도시가 리얼하다는 착각을 독자들에게 전해 준 것뿐이다. 원리를 알고 있으니, 나는 아직 쓰지 않은 다른 부분들도 필요하다면 더 묘사해 줄 수가 있을 거고, 똑같은 방식으로 독자들 역시 내가 일일이 채워 놓지 않은 다른 부분들을 스스로 상상해서 채워 넣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표현이 세계가 좀 더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팁은 사족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분의 머릿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그 재미난 세계들을 위해 이 한마디 사족을 보탰다. 만약 당신이, 소설 속 세상의 역할을 그저 설정이나 배경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배명훈
2005년 「스마트D」로 〈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타워』, 『첫숨』, 『안녕, 인공존재!』, 『예술과 중력가속도』, 『고고심령학자』 등 다수의 작품을 썼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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