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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끝을 볼 때까지 놓을 수 없게 하는 힘

좌백 작가

by 도서출판 다른

“주인공에게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는 히죽거리면서 썼고,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을 땐 이를 갈고 울면서 썼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번역이 아닌 창작무협을 쓴 『팔만사천검법』의 저자 을제상인 님의 말이다. 순문학으로 등단해서 문학잡지 주간과 편집장을 하던 분답게 이 분의 소설 속 캐릭터들은 입체적이고 강렬해서 정서를 뒤흔들고 심혼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래서 설사 이야기 전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작품 스타일이 취향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한번 잡으면 끝을 볼 때까지 놓을 수 없게 하는 힘을 가졌다.

캐릭터가 잘 그려진, 소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소설에는 이런 힘이 있다. 스토리가 구태의연하거나 허점이 있거나 뒤가 뻔히 보이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보게 하는 힘, 그것도 빠져들어서 보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게 이런 소설들의 특징이다. 물론, 단점 또한 있다. 그것도 많이.


독자가 캐릭터에 빠져들게 하려면, 공감하고 열중하여 심장박동수가 같아지게 하려면, 그래서 캐릭터의 즐거움이 독자의 즐거움이 되고, 캐릭터가 겪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독자 또한 같이 아파하며 걷게 하려면 먼저 작가가 캐릭터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 자기가 창조한 인물에 동화되고 만다는 것이 이런 캐릭터 위주의 소설가에게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운명이다.

졸저 『비적유성탄』의 주인공 왕필은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중증의 무기력증 환자다. 덕분에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인공에게 옮았는지 나 또한 중증의 무기력증에 빠져서 도무지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것 때문에 우울증까지 걸려서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어야 했다.

요즘은 『소림쌍괴』라는 일종의 개그무협을 쓰고 있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개 그렇지 않은가. 젊은 나이에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교룡의 내단을 얻거나 해서 엄청난 내공을 거의 공짜로 얻는, 소위 기연을 통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는 게 대부분 아닌가.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늙은 주인공들을 내세웠다. 정석대로 기초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수련함으로써 차근차근 무공이 상승해 마침내 고수의 반열에 오른 소림사의 두 무술승 이야기다. 단지 그렇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이 100년이 넘어 버리는 바람에 고수가 되고나니 곧 죽게 생긴 처지가 된 두 주인공이 이제 무엇을 하는가 하는 이야기다.

전작의 우울한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좀 더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연출해 보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 시작할 땐 좋았다. 발단이 일반적이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큰일 났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유쾌한 분위기를 그리고 코믹한 이야기를 쓰려면 나 자신이 유쾌한 기분, 농담을 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우리네 사는 일이 어찌 그런가. 늘 유쾌하고 누구에게라도 농담을 던지고 싶어지는 그런 때라는 건 쉽게 오지 않는 것 아닌가.

덕분에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되려고 ‘매우 고통스럽게’ 노력하는 상황이 작품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부작용도 각오하지 않고 무슨 캐릭터를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단점도 있다.

“이거 다음엔 이런 이야기가 전개돼야 하거든. 근데 캐릭터가 거부하는 거야. 그렇게 하기 싫대. 자긴 이쪽으로 가고 싶대. 억지로 내가 처음에 구상한 이야기로 끌고 가봐야 소용없어. 나중엔 결국 썼던 거 다 지우고 캐릭터가 원했던 쪽으로 다시 써야 해. 그래야 이야기가 되는 거야.”

내게 무협쓰기를 가르쳐 주신 사부님인 『군림천하』의 저자 용대운님이 토로하신 이야기다. 그래서 이분이 연재를 오랫동안 중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 또 캐릭터랑 싸우고 계시는구나’ 하는 게 이분을 아는 동료 작가들의 생각이다.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작가지만 일단 만들어진 캐릭터는 작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독립된 인격처럼 움직인다. 잘 만든 캐릭터일수록 그렇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잘 만든 캐릭터가 아닌 거다. 자식 맘대로 하는 부모 없다지 않나. 상상의 산물인 소설 속 캐릭터도 그렇다.


우리끼리는 ‘이야기를 주로 하는 작가’와 ‘캐릭터를 주로 하는 작가’라는 구분을 하곤 한다. 둘 다 잘하는 작가도 있겠지만 난 본 일이 없다. 그리고 통상 이런 평가가 뒤따른다. 전자에 해당하는 작가는 캐릭터가 밋밋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작가는 이야기가 이상하다고. 보통 장점과 단점은 따라다니는 법이다. 쾌활하면 덜렁거리기 쉽고, 음침한 대신 꼼꼼할 수 있는 거다.

추리소설에서 흔히 그렇듯이—아, ‘고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겠다. 요즘 동향은 꼭 그렇지만도 않으니—시작부터 끝까지 주요 사건과 전개 등을 꼼꼼하게 짜놓고 집필하는 작가가 있다. 이런 작가의 경우,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경우 캐릭터가 개성적이기보다는 밋밋한 게 좋다. 그래야 어떤 이야기 전개에도 무리 없이 맞추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캐릭터는 반항하는 일이 적다.

한편, 소설을 쓰기 전의 준비 작업 중 캐릭터 생각에만 7할을 투입하는 작가들이 있다. 시놉시스 같은 건 쓰지도 않지만 만약 이런 작가에게 시놉시스를 쓰라고 하면 매우 장황한 캐릭터 설명에 비해 매우 간략한 스토리 구상을 보여 줄 거다. 캐릭터에 대해서는 태어나서부터 사건이 시작될 때까지의 과거사와 성격을 드러내는 자잘한 일화들, 심지어는 사주팔자와 체질까지도 말하는 반면, 스토리 구상은 매우 간략하게 하는 게 이런 작가의 스타일이다. ‘어떤 캐릭터가(주절주절) 천하제패하는 이야기’라고 한 문장으로 말하는 작가도 본 일이 있다. 나도 좀 그런 스타일인데, 변명하자면 자세하게 짜놓아 봤자 캐릭터가 안 따라오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차라리 캐릭터를 만들어서 무대에 풀어놓고 맘대로 해보라고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인 거다.


그럼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나도 그걸 아직 잘 못해서 늘 고민하고 있다. 아, 그러나 하나는 확실한 듯하다. 고민해야 한다. 캐릭터를 잘 만드는 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모든 캐릭터는 그걸 만드는 작가의 마음속 어떤 부분의 반영이다. 하지만 자기 속에서만 캐릭터를 꺼낸다면 모든 캐릭터는 나의 반영이고, 모든 이야기는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려 노력해 봐야 한다.

작가 최인호 선생은 수업 시절 길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찍어서 무작정 뒤를 쫓아다니곤 했다는 글을 읽은 일이 있다. 걸음걸이부터 복장, 무얼 하고 누굴 만나는지, 어떤 집에서 살고 무얼 직업으로 하는지를 관찰했단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는지를 상상하곤 했단다. 이해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좋은 본보기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 여타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도 많은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만든 캐릭터고, 매체의 종류에 따라 깊은 접근도 가능하니 실제 인물을 관찰하는 것보다 손쉬운 관찰법이다. 그걸 흉내내라는 뜻이 아니다. 그걸 이해해 봄으로써 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내 식으로 다시 그려 봄으로써 나와 다른 타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편견과 어떤 나만의 동굴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덤으로 얻는 이득이다. 그리고 바꾸어 본다.

타인이 만든 캐릭터를 내가 만든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같은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캐릭터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손으로 그려 보기도 하면서 내가 만들 수 있는 캐릭터의 깊이를 더해 가고 외연을 넓히는 거다.

그다음엔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말할지, 또 어떻게 행동할지 그려질 정도가 될 때까지는 오랜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 한 캐릭터를 떠올려서 마침내 소설로 쓰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린 일도 있다. 며칠 만에 생각해서 바로 풀어놓고 같이 뒹굴고 구르며,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고생한 일도 있지만. 그러니 결국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정도, 그러니까 깊이와 넓이인 것 같다.

빠르건 느리건 숙성은 필요하고, 짧았건 길었건 그 과정을 통해 나온 캐릭터로 인해 고생하는 건 같다. 아, 물론 즐거움도 함께다.



좌백(左栢)
『대도오』로 신무협의 효시가 된 한국무협의 대표적인 작가. 『혈기린외전』, 『소림쌍괴』, 『하급무사』 등 여러 작품으로 무협의 정수를 보여주었으며, 철학소설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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