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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대화쓰기의 두 가지 원칙

윤성호 영화감독

by 도서출판 다른
지난 5월 11일, DMC첨단산업센터에서 윤성호 감독을 만났다. 말에 대한 특유의 감각으로 촌철살인 같은 대사를 써내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실 대화쓰기는 간단해요. 딱 두 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본론으로 진입! 그의 대화쓰기 비법들이 쏟아졌다.


Q 대화를 쓸 때 꼭 알아 두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A 첫째, 대사는 캐릭터를 항상 드러내고 있어야 해요. 또 어떤 상황에서 그 캐릭터가 꼭 해야 할 말인지 생각해봐야 하죠. 캐릭터의 품성, 그가 처한 상황에 어긋나는 혹은 의미 없는 대사는 빼야 해요.

가끔 작가의 욕심이 발동해서 인물들을 자기 복화술사처럼 이용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회문제나 정치 이슈에 대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인물의 입을 통해 대신 하는 거죠.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하긴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에 위배되지 않아야 해요. 즉, 캐릭터의 가치관이나 성격, 처한 상황에서의 인과관계 등에 맞아 떨어질 때라야만 용인할 수 있는 거죠.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말이 대사 속에서 정치비판이 이뤄지면 안 된다 뭐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등장인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만약 갑자기 인물이 욕을 한다거나, 안하던 행동을 한다고 해도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여겨질 때는 괜찮아요. 물이 끓어 넘친다고 해서 그게 물의 성질을 배반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캐릭터의 면모를 드러내고 강화시키면서, 사건도 전개하는 것. 이게 대사쓰기의 가장 중요한 법칙 같은 건데, 꾸준히 제대로 하기가 힘들죠. 저도 영화나 시트콤에서 그 부분을 항상 능숙하게,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 건 아닌 것 같고, 하면서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둘째, 창작자로서의 윤리랄까. 대사를 쓰는 사람들에겐 더 센, 더 날 것의, 더 자극적인 대사를 날려야겠다는 욕심 같은 게 있어요. 육두문자를 남발하거나 펄떡펄떡 뛰는 날 것의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죠. 창작자로서 이 대사가 캐릭터를 살리고 이야기의 가치를 잘 드러내는지, 또 보는 사람을 괴롭히자는 건지 아니면 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서 괴롭지만 이 여행을 같이 하자는 건지 늘 생각해 봐야 해요.

요즘에는 칼싸움을 하는 장면에 칼로 뼈와 살과 피를 가르는 소리를 다 넣거든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사실, 그건 관객을 괴롭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냐, 떡볶이를 엄청 맵게 해서 그걸 사 먹게 만드는 거랑 똑같아요. 그 음식을 사랑한다거나, 떡볶이의 가치를 드러내고 확장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프랜차이즈를 알리려는 거죠. 그건 고문이에요, 고문. 그걸 자기네 마케팅으로 쓰는 거예요. 대사를 쓸 때도 분명 그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죠. ‘자극적인 대사로 나를 알려야지’와 같은 생각들. ‘이게 캐릭터가 할 말인가’라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라면, 두 번째는 ‘내가 이런 대사를 쓰는 게 맞나? 이걸 꼭 써야 하나? 이게 옳은 건가’ 하는 창작자로서의 문제의식 같은 거죠.



Q 대화쓰기의 좋은 예가 되는 작품이나 작가 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요즘 책 소개하는 라디오프로그램을 격주로 하게 돼서 책을 많이 읽는데요, 대화쓰시는 거 보면 성석제 님과 천명관 님이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두 분 다 이야기꾼이면서, 인물들 모두 각자의 억양이 다 살아 있달까 보통은 자기가 속해 있거나 애정이 있는 계급의 사람들 이야기만 잘 쓰는데, 두 분은 어떤 인물을 불러와도 그 사람이 할 법한 말을 딱 집어서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영화 중에는 「뜨거운 것이 좋아」라는 1960년대 영화가 있는데, 우연히 마피아들의 살인현장을 목격한 두 남자가 도망 다니는 내용이에요. 이 둘이 완전 딱 봐도 남잔데, 여장을 하고 쇼단에 들어가 도피행각을 벌이죠. 그러다 한 남자는 악단에 있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요. 마릴린 먼로도 나오는데,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죠. 그중에 한 남자(제리)는 백만장자(필딩)랑 데이트를 하게 되고, 프로포즈까지 받아요. 백만장자는 이성애자니까 사실대로 얘길 해야 하는데, 결국 막판에 가서야 말을 꺼내죠. 여기서 영화 역사상 1위로 꼽히는 명대사가 나와요. 이 얘기하니까 또 소름 돋네.


제리: 솔직히 말할게요. 우린 결혼 못 해요.

필딩: 왜죠?

제리: 그건…… 난 원래 금발이 아니거든요.

필딩: 상관없어요.

제리: 줄담배도 피워요.

필딩: 괜찮아요.

제리: 과거도 복잡하고.

색소폰 주자랑 동거까지 했어요.

필딩: 용서하죠.

제리: 아이도 못 낳아요.

필딩: 입양합시다.

제리: 이해가 안 되시나 본데,

(가발을 벗어던지며)

난 남자라고요!

필딩: 뭐,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요.

_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중에서



Q 좋은 예가 있다면 나쁜 예도 있을 것 같은데요, 생각나는 작품이 있으신지요?

A 가령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한창 욕을 먹고 있던 (욕먹을 만하던) 시절 만들어진 영화들에서 뜬금없이 ‘쥐새끼’, ‘찍지마 XX’ 이런 ─ 특정 정치인의 이미지를 소환해 조롱하는 식의 ─ 대사가 나올 때가 있어요. 기득권의 횡포에 대응하는 풍자나 해학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만드는 건 시위가 아니라 영화란 말이죠. 극의 맥락과 상관없이 작가가 자족적으로 넣은 대사들은 되려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쳐요. 심지어 현실에서도 그런 허한 공격들은 상대의 모순을 드러내기보다는 되려 이쪽의 얕은 공력만 드러내고요. 관객들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 생각나고 하니까 말이 약간 따로 놀아도 웃을 수 있겠지만, 그런 시도가 등장인물이 구축하고 있는 우주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죄송하지만 감독 또는 작가의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한마디로 말해, 카페라테 잘 만들어 놓고 토핑으로 시나몬 가루를 뿌리는 건 괜찮은데, 몸에 좋다고 청국장 가루를 넣는 것과 마찬가지죠. 망치는 토핑인 셈이죠.

저도 대사를 쓸 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인물들 입에 얹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할 때가 많아요. 그런 건 나중에 보면 오글거려요. 제 영화를 본 젊은 분들은 촌철살인 같은 멘트나 시사 이슈가 나오니까 재밌다고들 하시는데, 말이 좀 촌스럽더라도 내가 진짜 마음을 담아서 쓴 것, 즉 그 캐릭터들이 절실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구나 해서 쓴 건 시간이 지나도 괜찮은데, 그냥 2009년, 2010년에 트위터에서 하고 말 말을 등장인물에게 굳이 시켰을 때, 그때는 좀 보기 싫더라고요. 그런 건 피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Q 작품을 보면 재미있는 대사들이 많은데 어디서 소재를 얻으시나요? 인상적인 경험 같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A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술 먹다가, 데이트 하다가, 친구들과 떠들다가도 ‘이거 재밌겠다’ 싶어 써둔 게 한 바가지는 돼요. 그러다보니 메모한 말을 쓰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게 되는데 그건 제가 앞서 말한 원칙과 반대되는 행위죠. 지금은 캐릭터나 캐릭터가 겪을 일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작업해요. 제가 캐릭터를 잘 구축해 놓으면 말도 잘 나오겠죠. 그래서 그 뒤로는 메모를 잘 안 하게 됐어요.

배창호 감독님 회고전 때 선보인 「두근두근 배창호」라는 단편을 찍고,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촌철살인의, 무언가 임팩트 있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주인공들이 사랑에 관한 말을 주고받긴 하는데, 오글거리기만 하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마음을 녹일 만한 말도 없고. 이건 제가 쓰고도 솔직히 별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휘파람에, 박수에, 눈물까지 흘리는 거예요.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대사의 여집합이라고 할까? 분명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하는 여백이 있고, 그걸 관객들은 각자의 상상으로 채워 나가며 감동받는 게 아닐까 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다른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더 울컥하는 것처럼요. 어떤 가치는 꼭 말로 하는 게 정답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여집합이 주는 감동이 있다는 걸 배운 거죠.



Q 마지막으로 감독님만의 특별한 방식이나 팁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습작하는 분들이 쓴 대화를 보면, 인물들이 너무 관념적인 말을 늘어놓는다든가, 무한정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무슨 뜻인지 모를 부조리한 말을 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죠. a와 b가 아니라 a와 a’가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도 많고. 이 말 저 말 다 필요한 말 같으니까 다 집어넣고. 보통 그런 경우, 한 100줄 정도 되는 대사를 썼다면 앞에 20줄, 뒤에 20줄씩 빼보세요. 그럼 의미가 더 잘 전달돼요. 저도 길게 쓴 다음에 잘라내는 방식으로 쓰기도 해요.

이건 작은 팁, 아니 룰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든 문장은 두 가지 기능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더블 미닝, 즉 중복적인 의미를 지녀야 하죠. 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해서 퍼즐 맞추듯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를 테면, “이 돼지야!”라고 특정 인물을 부를 때, 그게 호칭도 되지만, 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런 말도 되잖아요. 좋은 대사들은 한 마디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 것 같아요.

(시계를 보며) 어휴, 제가 너무 길게 떠들었네요. 이야기하다 보니까 저도 취해서. (웃음) 오랜만에 예전에 만든 영화들 얘기하니까 떨리네요. 말이 길어졌는데, 처음에 말씀드린 두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게 다예요, 사실.


‘과연!’, ‘역시!’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의 영화처럼 인터뷰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말을 고르고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대화쓰기’에 참고가 될 만한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지면 관계상 모두 옮기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그만의 개성 있는 화법과 스타일로 무장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길 기대해 본다. / 편집부

※이 글은 2013년에 진행한 인터뷰를 재수록했습니다.


윤성호
영화감독, 드라마 기획 및 연출.
영화 〈은하해방전선〉〈도약선생〉, 드라마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출출한 여자〉〈출중한 여자〉〈대세는 백합〉〈탑 매니지먼트〉 기획 또는 각본 연출.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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