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나는 회고록 작가의 거짓말에 진저리가 난다. 그건 예전에 내 이름을 걸고 희대의 사기꾼을 홍보해준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96년 작 《파편들 Fragments》 영국판 뒤표지에는 내 이름과 추천사가 적혀 있다. 가짜 홀로코스트 생존자 빈야민 빌코미르스키 Binjamin Wilkomirski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쓴 책이다.
하지만 작가는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서 편안하게 살았고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었다.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을 생각나는 대로 마구 적어 자신의 정신과 주치의에게 팩스로 보내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그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필립 고레비치가 《뉴요커》에 〈기억 도둑 The Memory Thief〉이라는 기사를 게재했을 때 주치의는 이렇게 말했다. “책 제목을 ‘심리 치료의 파편들’이라고 붙였다면 별문제가 없었겠죠.”
지금 와서는 그 책의 거짓말이 빤히 보인다. 빌코미르스키가 겪었다고 주장한 일들은 인간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가혹하다. 그는 세 살 때 수용소 감시인의 이두박근에 이빨을 박고 매달렸다고 썼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턱 힘이 그렇게 셌을 리가 없다. 게다가 아이가 힘껏 깨물면 감시인은 이두박근이 바닥을 향하도록 팔을 비틀어댔을 것이다.
한번은 발가벗은 시체들과 함께 소각실로 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던져졌는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두 손이 나타나 불타기 직전에 그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빠져나와 미친 치와와처럼 또 다른 나치스 당원에게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 이름을 책의 뒤표지에 올리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작품이 받은 세계적인 찬사에 압도되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면 만에 하나 책 내용이 사실인데 내가 실제 생존자의 목격담을 부정한 셈이 되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견디나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감을 완전히 믿지 못했던 것이다.
나 혼자만 속은 것은 아니었다. 빌코미르스키는 유대계 문학 평론가인 앨프리드 케이진과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 작가인 엘리 위젤을 제치고 프랑스 홀로코스트 기념 문학상과 미국 유대인 도서상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참관했으며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를 쓰기도 한 기자 지타 세레니도 나와 나란히 추천사를 썼다.
빌코미르스키는 지금도 물리적 증거를 애써 못 본 척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레비치에 따르면 빌코미르스키만큼 허술하게 남을 속이려 한 사람도 드물다. 그가 틀렸다는 증거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빌코미르스키의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지어냈다기보다는 정신 나간 사람이 하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글쓰기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두 편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회고록을 한 장씩 나누어 주며 비교해보라고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대중의 순진함을 가늠해보는 실험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Survival in Auschwitz》와 빌코미르스키의 책을 사용했다. 결과는 암울했다. 거짓으로 밝혀진 빌코미르스키의 글이 매번 과반수 넘게 더 진실한 글로 꼽혔다. 대학원생들이 빌코미르스키의 글을 진실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자신을 영웅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내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을 희생자로 내세웠다. 홀로코스트의 맥락에서 희생자는 곧 생존자, 생존자는 곧 영웅이다).
○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그의 정신과 주치의, 그리고 그 주치의를 인터뷰한 고레비치에 따르면 빌코미르스키는 자신의 거짓말을 굳게 믿고 있다).
○ 글에 현장감이 있다. 1인칭 현재 시제로 서술해 마치 작가가 책 속의 내용을 다시 살아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에 반해 레비의 글은 감정을 신중하게 다스려 한결 객관적이다.
○ 상세한 설명이나 수사적 기교가 없는 것을 보면 용의주도하게 계획해서 쓴 글이 아니므로 꾸며내거나 속이려는 의도도 없을 것이다.
○ 레비의 글보다 구어적이다(많은 학생이 격식이 없는 글은 진실하다고 생각했다).
○ 끔찍한 기억이나 영화 속 플래시백이 그렇듯이 글에 나온 일화들이 단편적이다.
○ 대화문이 많다(진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레비는 대화를 별로 넣지 않았지만, 빌코미르스키는 긴 대화도 써넣었다).
○ 레비의 글에는 고유명사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낸 것일까?(내 생각에 레비는 머리가 좋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조사해서 알아냈을 것이다)
○ 레비는 너무 똑똑한 상류층 지식인 같아서 가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빌코미르스키의 허물없는 태도가 더 좋다(학생들은 좌파 지식인 조지 오웰도 너무 현학적이라고 불평했다).
○ 글 내용이 정말 사실인데 우리가 그걸 믿지 않는다면 큰일 나지 않을까?
2008년에는 학생 열여덟 명 중 세 명만이 레비가 더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2012년에는 스물한 명 중 세 명만이 레비의 편을 들었다. 합리적 판단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진실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개념이 되었다. 우리는 인간이 지독하게 거짓말을 해댄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도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은 아마 옛날에도 많이 했을 테지만 지금은 끈질기게 감시하는 언론과 카메라 때문에 쉽게 들통이 난다. 인터넷에서는 불륜 정황이나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은 연예인의 사진 따위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분위기에 휩쓸려 온갖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기도 한다. 사람들이 때때로 가족 내부의 논리에 둘러싸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믿고 싶은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에 푹 빠져버리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똑똑한 독자가 가짜 실화에 끌리고 속는다.
나 역시 극작가 릴리언 헬먼의 회고록 《펜티멘토 Pentimento》에 나오는 자화자찬하는 이야기들에 처음에는 홀딱 속아 넘어갔다. 그런데 철저히 진실의 편에 서기로 정평이 난 메리 매카시가 유명 토크쇼에 나와서 “헬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접속사와 정관사(영어의 ‘the’)까지도요”라고 폭로했다.
우리를 노련한 거짓말쟁이와 사기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치는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아예 진실의 존재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마음이 무겁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학과장은 교내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면서 “여자 쪽 이야기가 있고 남자 쪽 이야기가 있지, 진실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서 진실은 희롱했거나 희롱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명백히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가를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단적인 예를 살펴보자. 경찰관 두 명이 주장하기를, 흑인 남성이 바지 주머니에서 무기를 꺼내려 했기 때문에 그를 두들겨 팼다고 했다. 녹화된 CCTV 영상을 확인해보면 실제로 흑인 남자가 뭔가를 잡으려는 듯이 바지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천식 환자용 흡입기를 꺼내려던 것이었다.
존재 가능한 진실은 하나뿐이라는 이 시대의 이상한 냉소주의는 역설적으로 어떤 거짓된 글도 활개 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영화 〈아이언맨〉과 〈그래비티〉, 흡혈귀와 좀비가 등장하는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는 걸 보면 환상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명백하다. 어쩌면 이러한 욕망 때문에 이야기의 개연성에 대한 기준이 무너진 건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구경거리를 원하는 풍토 속에서 많은 ‘회고록 작가’가 총소리가 많이 날수록 독자가 늘어난다고 믿으며 이야기를 마구 지어내고 부풀렸다.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다고 가장 소리 높여 말하는 부류는 밑천이 드러난 거짓말쟁이 작가들이다. 뭐든지 괜찮다는 그들의 주장이 회고록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삼켜버린 것이다.
나는 회고록을 즐겨 읽는 독자들이 거짓말을 귀신같이 찾아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기억이 컴퓨터 파일이나 녹화 영상만큼 정확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미래의 회고록 작가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또한 회고록의 대화문을 일일이 따져가며 작가에게 녹음 파일이 없으면 대화를 지우라고 요구하던 객관적 진실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날 대중이 진실을 비웃으며 기억이란 자기중심적인 환상 속에서 지어낸 것일 뿐이라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도 자신을 속이며 대강 얼버무리곤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있다.
무엇이든 일단 의심하고 보는 관행이 생겼고, 그 때문에 진정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작가들까지도 사기꾼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는 가운데 몇몇 난봉꾼이 대세를 장악하고 말았다.
그들은 거짓말이 들통 나서 망신을 당하고 나자, 아무리 분별 있는 사람이라도 진실과 잘 포장된 속임수를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퍼뜨렸다. 그들에게 놀아난 독자는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고 ‘뭐 어때, 모든 게 가능하지, 어차피 다들 거짓말하는걸’ 하고 넘어가 버린다.
훌륭한 회고록 작가와 훌륭한 기자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그 정도로 불분명하지는 않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힐러리 맨틀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리려 애쓴다. “나는 정확성을 기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아무래도 괜찮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걸’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도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거짓 기억, 잘못 지목된 범인,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망설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분명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진실이라는 개념에 나사가 하나 빠져버렸다. 이제 진실은 앞뒤에 따옴표를 붙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때로는 뭔가가 사실이란 걸 확실히 알고 있는데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게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마치 진실을 말하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공격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오늘날 종교 중 가장 인기 있는 종교는 의심인 듯하다. 괜히 확신을 드러냈다가 표적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되도록 안 믿는 사람이 이긴다. 믿는 것이 별로 없어야 틀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진실성에 관한 단순한 원칙들이 어째서 텔레비전 방송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제대로 된 논픽션 작가들은 그 원칙들을 철저히 지킨다. 그들은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친다.
물론 작가들은 현실적으로 과거가 진실을 늪처럼 삼켜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조금이라도 더 단단한 바닥을 찾아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고 노력한다. 우리 안에는 평생토록 생생하게 불타며 글로 옮겨지기만을 기다리는 기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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