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회고록은 목소리 때문에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특함이 모자라서 살아 있는 목소리, 흥미로운 목소리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조에 감정이 빈약해서 단조로운 목소리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너무 무심한 목소리나 너무 신랄한 목소리도 읽는 재미를 없애버린다. 문장이 지루하고 뻔하거나 일관성이 없어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 어디서 온 인물인지 파악할 수 없으면 곤란하다. 그러면 결국 독자는 목소리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리고 작가의 내면적 삶이나 외면적 삶에 대한 관심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저자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덕에 감각적 세부 사항에 신경쓰지 않고도 물리적 세계를 흐리멍덩하고 간략하게 그려내는 법을 손쉽게 배울 수 있다. 많은 작법서가 물리적 세계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그러한 묘사는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의 삶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다루는 교재는 거의 없다. 액션 영화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매체에서는 내면의 삶을 브라운관에 드러내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을 보여주거나 여기저기 내레이션을 넣는 정도다.
따라서 글은 화려한 영상미를 뽐내는 영화와 방송이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해야 이들 매체와 겨룰 수 있다. 영화와 방송이 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내면의 심오한 진실을 글로 쓰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책의 짜임새를 결정할 내부의 적을 찾아야 한다. 내부의 적은 항상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대충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초조함과 갈망을 떠오르는 대로 쓴 후에야 비로소 확실히 찾아낼 수 있다. 때로는 초고를 다 쓰고 나서야 찾을 수도 있다.
일단 내부의 적을 찾으면 그를 중심으로 원고를 수정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아가 성장하면서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글로 적는다. 좌절과 곤경이 마지막에는 화자를 달라지게 해야 한다.
어떤 회고록이 별로인 또 다른 이유는 시간이 흐르는데 화자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는 인물, 깊이가 없는 인물은 어떻게 행동할지 빤히 보인다. 나쁜 사람이 항상 나쁘기만 하다면, 우리는 마음을 다쳐도 금방 회복할 것이다. 나쁜 사람들만 피해 다니면 되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못된 사람들도 때로 친절하고 때로 사과를 한다. 또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척하면서 매번 속아 넘어가게 만든다. 매혹적인 자아도취의 문장은 우리를 괴롭혀서 옭아매는 게 아니라 연민을 느끼게 해서 옭아맨다. 그래서 우리에게만 내면의 고통을 털어놓으며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충성을 요구한다. 도우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돕게 만든다.
자기 자신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서술이 얄팍해진다. 그래서 화자가 항상 씩씩하거나 인내심이 강하거나 희생적이거나 재치있거나 잘난 체한다. 그러한 등장인물은 너무 진부하고 예측 가능하다. 삶은 예측 불가능할 때가 많고, 예술은 예측 가능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가장 상투적인 예는 오늘날 넘쳐나는, 매 맞는 회고록이다. “엉덩이에 매를 맞았다. 일어섰더니 또 맞았다. 나는 그러고도 불쌍하게 또 맞았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훌륭한 회고록은 비단 극심한 고통만 그려내지 않는다. 원대한 희망과 지혜, 정신적 인내와 호기심도 함께 보여 준다.
훌륭한 회고록은 같은 말을 따분하게 되풀이하며 한 가지 사실만 내세우려고 쓴 게 아니라 복합적인 현상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나는 십 대의 성노예였다 I Was a Teenage Sex Slave》처럼 단 한 가지만을 이야기한 책에 대중이 열띤 관심을 보일 수는 있지만, 전쟁이나 수용소처럼 배경이 극적이거나 묘사가 다채롭지 않다면 독자는 그 책을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나 리처드 라이트처럼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은 한, 신랄한 어조는 지겨워지고 복수심에 불타는 목소리는 읽기 힘겨워진다. 작가가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책의 모든 내용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독자가 눈치 채기 때문이다.
회고록이 별로인 데에는 속도 조절을 잘못한 경우도 있다. 극적인 사건은 빨리 지나가 버려놓고선 지루한 정보를 달팽이처럼 느린 속도로 나열하거나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면 곤란하다. 때로는 사건에 숨막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드는 바람에 독자를 짓누르기도 한다. 아니면 너무 거리를 두는 바람에 중요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농담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모자란 책은 질이 모자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 로버트 하스는 시행 하나하나를 다듬어가며 시를 고쳐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고치고 또 고친다. 나와 일해본 편집자들은 내 초고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다 알고 있다. 퇴고는 과거에 내게서 그 감정이 우러나온 것과 같은 방식, 또는 내가 현재 그 감정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독자의 감정을 선명하게 불러일으키는 작업이다.
다음은 《리트》 초고 중 어느 장의 도입부다.
어머니는 우리의 노란 스테이션왜건을 몰고 나를 대학교로 태워다 주고 있었다. 우리는 밤이면 밤마다 홀리데이 인 호텔에 묵으면서 스크루드라이버 칵테일에 취했다.
이것은 정보다. 어머니와 함께 술에 취하는 행동은 정서상의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여기에 드라마나 갈등은 들어 있지 않다. 노란 자동차를 제외하면 물리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칵테일은 말썽의 소지가 있음을 시사하지만 장거리 운전과 관련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장면은 없고, 그저 정보만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이것만 가지고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나는 초고의 메마른 글 한 토막을 한결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었던 걸까? 기억, 그 당시의 육체적 기억과 물리적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차에 에어컨이 없어서 어머니는 싸구려 에어컨을 설치했다. 그 에어컨은 계기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 물방울이 맺히곤 해서 어머니가 급하게 우회전을 하면 화학적 냉매를 연상시키는 차가운 물이 나의 맨발에 튀곤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방울 세례를 받으면 마치 그 생생한 찰나에 기적적으로 진짜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기억의 눈이 별안간 확 떠졌다.
그 장면은 만연체의 현재 시제로 떠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캘리포니아에서 산 큼지막한 대나무 샌들이 보였다. 샌들에 달린 검은 벨벳 줄은 차가운 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차를 타고 있었다.
어머니가 쓴 중산모자가 보였다. 어머니는 그것을 포주들이 쓰는 모자라고 불렀다. 휴스턴에서 내 것도 하나 사주었다. 어머니는 누군가가 관절염에 좋다고 알려준 구리 팔찌를 끼고 있어 손목에 초록색이 뱄다.
그리고 다른 감각 기억도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칸소에서 잔뜩 샀던 복숭아 냄새가 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죽 들이켰던 칵테일 속의 보드카 냄새도 났다.
그러한 감각 기억들 속에 머물다가 구절 하나와 맞닥뜨렸다. 피치스 갈로어 peaches galore(복숭아가 무척 많다는 뜻). 그때 어머니는 “피치스 갈로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거 웃기는 댄서 이름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푸시 갈로어 Pussy Galore(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곡예사 출신의 본드걸)지.”
어머니가 ‘푸시’라는 단어를 말하는 모습은 게걸스럽게 복숭아를 삼키는 것만큼이나 당혹스러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푸시는 암코양이를 뜻하기도 하며,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은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어머니와 한배를 탄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가 내게 관심을 쏟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어떻게 보면 그 자동차 여행은 내게 사치였다. 하지만 동시에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충돌하는 욕구들 덕분에 그 장의 감정은 풍성하게 영글었다. 그쯤 되자 과거라는 동굴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날아오는 박쥐 떼처럼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위해 《백년 동안의 고독》의 옛날 영역본을 소리 내 읽고 있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과 푸시 갈로어 이야기는 《리트》에 등장한다. 중산모자도 카메오로 나온다.
구리 팔찌와 에어컨은 뺐다. 그리고 아이오와의 아름다운 옥수수 밭을 넣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의 질서, 커다랗고 하얀 집과 풍요로운 농장은 내가 걸어 들어가고 싶어 하던 미국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은 나의 구질구질한 고향과 황진 Dust Bowl(1930년대에 심한 가뭄으로 북아메리카 평원에 일었던 대규모 모래 폭풍) 피해를 겪으며 자란 어머니의 유년기와는 정반대인 이미지였다.
옥수수 밭은 그 당시 나의 염원을 적절히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옥수수 밭의 질서정연한 반복을 두려워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질서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옥수수 밭 이미지를 첫머리에 넣었다.
어머니의 노란 스테이션왜건은 아이오와 옥수수 밭 사이 회색 도로를 따라 모노폴리 게임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듯 미끄러졌다. 옥수수의 초록빛에 대비되어 저 멀리 거대한 은색 저장탑과 녹슨 데 없이 윤이 나는 황적색 트랙터가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이 지역 농부들이 어머니가 자라난 텍사스 서부의 황진 피해를 입은 영세농과는 차원이 다르게 부유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영세농들은 개구리를 잡아 보관하던 포대에서 빌린 씨앗을 조금씩 꺼내 나눠주곤 했다고.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그날 밤이면 도착할 사립대학교에서 적응할 걱정에 손톱을 다 물어뜯은 상태였다. 학교는 내가 불쌍하기도 했을 것이고 무심결에 입학 허가를 내준 게 분명했다. 게다가 전날 밤 캔자스시티에서 이름값 못 하는 홀리데이 인에 묵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스크루드라이버 칵테일을 들이켰는데, 그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했다. 재수 없는 옛날 얘긴 좀 그만 해요. 집 떠나고서 팔백만 번도 더 들었겠네.
여기에는 육체적 묘사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모노폴리 게임판 위의 말 같은 자동차’라는 표현은 이 장면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는 사람의 시점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나는 숙취가 심했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어머니와 딸이 밤에 함께 술을 마신다는 정보와 더불어 초고에 없는 다음의 배경 지식도 들어 있다.
○ 어머니가 텍사스 건조 지대에서 자라났다는 점
○ 화자의 나이
○ 화자의 출신 지역
○ 화자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는 점
○ 화자가 곧 입학할 대학의 수준이 화자의 사회적 지위보다 높다는 점
○ 화자의 고교 성적이 엉망이라는 점
이 정도면 감정적 갈등을 빚기 위한 내부 정보가 넉넉하게 나온 것이다.
○ 딸은 어울리지 않게 수준 높은 대학에 가게 되어 걱정하고 있고, 게다가 어머니의 가난한 배경 때문에 더욱 초조해한다.
○ 딸이 어머니에게 재수 없는 옛날이야기는 듣기 싫다고 말한 것은 다소 보편적인 모녀간의 갈등이다. 하지만 딸이 어머니에게 “재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시대의 도덕적 잣대에 비추어볼 때 정도가 지나쳤다. 이 표현은 두 인물 사이에 격의가 없다는 것이 곧 주된 갈등 요인임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진실에 관한 나의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하겠다.
○ 모노폴리 게임에 대한 비유는 이 장면을 어른이 된 작가의 시점에서 떠올렸다는 것을 드러낸다.
○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했다”라고 쓴 이유는 일기장이나 객관적 기록물에서 직접 인용한 대화가 아니라 재구성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장면에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감정적 진실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십 대 때 나는 어머니처럼 자유분방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우리는 위대한 소설 작품을 함께 읽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면 나는 술꾼에다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차를 박살내기나 하는,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의 내가 또래 친구라도 되는 양 같이 술을 퍼마셨다.
나는 또한 진절머리 나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는데, 어머니는 자신도 고향이 싫지만 나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박혀 있어야 했다며 나를 원망했다. 그러다 보니 초조함과 더불어 어머니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해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래서 수정 원고에서는 아빠의 표현을 빌리자면, 커피 통에 갇힌 두 마리 다람쥐처럼 그 작은 자동차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혼란스러운 감정을 드러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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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