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회고록에서 다루는 내용은 너무도 개인적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다른 누구의 경험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작가와 가족의 관계를 논하면서 정작 내가 가장 잘 아는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좋게 보면 말을 아끼는 거고 나쁘게 보면 독자를 속이는 짓이 된다. 그러니 전부 털어놓으려 한다.
내가 회고록 집필 작업과 관련해 주변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먼저 책에 나온다고 일찌감치 알려준다. 싫으면 그 사람이 나오는 부분을 뺄 수 있게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것이다(빼달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원고를 쓰는 중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완성되면 인쇄하기 한참 전에 등장한 사람들에게 원고를 보낸다.
참고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는 성격이다. 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은 나를 괴롭힌 할머니와 소아성애자 두 명을 빼고는 모두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이다.
두 번째 회고록이 출간되었을 때 중학생이었던 내 아들은 “읽을 준비가 안 되었어요”라며 말했고 10년 넘게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내가 보기에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엄마인 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아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을 읽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들은 작품 속의 내가 아니라 와플을 구워주는 나를 좋아한다.
내 책에 아들이 전혀 모르는 내용은 없다. 우리는 서로 친밀하고, 내가 경험한 끔찍한 일을 아들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회고록인 《리트》를 썼을 때 아들은 대학생이었는데, 그때는 아들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나오는 첫 장을 자세히 읽어보게 했다. 아들은 한 단어도 바꿔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아들의 친아버지인 전남편도 원고를 자세히 검토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지적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가명을 쓰고 모호한 인물로 남기를 원했다(그래서 나는 전남편이 나오는 장들을 예전에 부부 상담을 받았던 상담사에게 보내 내가 쓴 내용이 공평한지 물어보았다).
첫 번째 회고록인 《거짓말쟁이들의 클럽》을 쓰기 전 나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아빠는 돌아가신 뒤였다) 내가 회고록을 쓰면 어떻겠냐고 떠보았고, 만에 하나 책이 대중의 관심을 끈다면 온 세상이 우리 가족의 사생활을 알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조금은 어머니와 언니가 나를 말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회고록 장르를 무척 좋아하지만 막상 직접 쓴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잘못 쓰기가 얼마나 쉬운지 새삼 곱씹으며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당시 내 주머니 사정이 너무 나빠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눈이 몇 미터씩 쌓이는 시러큐스에서 자가용도 없이 지내고 있었고, 어린 아들을 시설에 맡기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여름 방학이 되면 돈도 얼마 벌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언니는 내가 작은 출판사에서 독자가 몇 십 명 될까 말까 한 시집을 내오던 것에 익숙해서 별로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계약한 뉴욕의 대형 출판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기대하고 있었다.
가족이 전혀 동요하지 않으니 불같이 화를 내는 상황보다 오히려 더 걱정스러웠다. 언니는 “뭐 어때?”, 어머니는 “그래, 한번 써봐”라고 했다. 둘 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아니었고, 나는 수십 년 전부터 그들에게 회고록 책을 자주 선물했던 터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언니는 내가 단지 까발리기 위한 글을 쓰기보다는 입체적인 인물 초상을 그리고자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주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 한번은 부엌 바닥 타일에 왜 총구멍이 났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움직였거든.”
총기 사고가 일어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타일수리공이 총구멍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언니가 어머니에게 비꼬듯 물었다. “저게 아빠를 쏜 자국이죠?”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아니, 그건 래리를 쏜 자국이야. 아빠를 쏜 건 저쪽에 있지.”(이 대목은 회고록이야말로 내게 딱 맞는 장르란 걸 알려준다. 이렇게 멋진 인물을 두고 인물을 새로 만들어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술과 총이 우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예순이 넘어서야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난 어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이 구원받은 이야기도 있었다(어머니의 경험은 세월이 흐른 뒤에 내가 술을 끊는 데 지침이 되었다). 술을 끊었다고 해서 너덜너덜하게 해진 지난날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일단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멎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오래된 거짓말들을 파헤치면서 우리 가족은 전에 없이 가까워졌다.
어떤 면에서 나는 어머니와 언니가 자신들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책에 등장하겠거니 하고 기대하는 상황이 고소했다. 그때는 책에 나온 사건들에 대해 지난 수십 년간 제각기 할 말을 쏟아낸 뒤였고 서로 앙금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나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런 대화를 권했다.
그래도 그렇지, 내 가족은 다른 가능성은 염두에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진실을 외면하는 그들의 탁월한 방어 기제가 되살아났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 때 고향에 내려갔다. 그리고 책에 적혀 세상에 알려질 경우 그들이 부끄러워할 수 있는 내용을 며칠 동안 조목조목 나열했다. “우리한테 식칼을 휘두르고 장난감에 불을 질러서 벌금 낸 건 기억하세요?” 어머니는 말했다. “당연하지.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뭐.”
나 같은 회고록 작가에게 이렇게 강인한 어머니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남들 눈치 보는 성격이었으면 진작에 쿠키나 굽고 학부모회에도 나갔겠지.” 어머니는 슈퍼마켓에서 난동을 부려 안내판을 넘어뜨린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뉴욕에서 초상화를 공부한 적도 있어서 작가의 관점과 감정이 현실에 어떤 색을 입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작품 속에 담긴 내 목소리가 절대적 권위자를 시늉하지 않고 주관적 현실을 보여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귀가 얇은 편인 언니도 천하태평인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태평했고, 사실은 약간 뒤끝이 있었다. 보험설계사인 언니는 선원처럼 욕을 해댔고 악인을 자처했다. 하지만 언니는 다른 가족들보다 더 많은 걸 감당하고 채워주며 살아왔다.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 했다. 나를 격려한답시고 “네가 심리 치료를 받은 덕분에 난 안 받아도 됐어”라고 말할 정도로 언니는 순진했다. 로터리클럽과 여성 프리메이슨협회(자선·박애 활동을 하는 친목 단체)에서 활동했고, 1970년대까지도 청바지를 각 잡아 다려 입었다. 우리 자매는 언니의 첫 번째 남편을 쌀부자Rice Baron라고 불렀는데, 한번은 언니가 언니 부부네 컨트리클럽에 싸구려 옷을 입고 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입고 우리 집에 발을 디딜 순 없어.”
나는 좌파인 반면 언니는 철저한 우파였다. 나는 삐딱한 외톨이였지만, 언니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낼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는 개인 사업자였다. 이렇게 언니와 나는 극과 극을 달릴 만큼 달랐지만 어린 시절 언니는 나의 영웅이었다. 물론 내 회고록에도 영웅으로 나온다.
고향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회고록 내용 중에 어머니나 언니와 절대 관련이 없는, 그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내가 두 차례 성폭행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음속의 짐을 덜었던 그날 아침, 예상했던 대로 큰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다소 거칠게 한마디 했다. “망할 개새끼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언니가 지갑을 집어 들었다. “멕시코 음식 먹고 싶은데.” 언니는 점심을 먹으면서 어렸을 때 자신을 강간하려고 덤벼든 남자를 힘으로 떨쳐낸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폭행 이야기는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나와는 거의 알지 못하지만 언니가 사업상 아는 남자가 찾아와 내게 성폭행에 대해 물었다. 언니가 그에게 다 말해버린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질문은 “삽입당했나요?”였다. 차갑고 색을 밝히는 인간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고록을 쓸 거면 어차피 이런 해프닝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기롭게 미식축구부에 들어가 놓고 공에 맞았다고 징징댈 수는 없으니까.
나는 첫 번째 회고록 원고를 2년 넘게 쓰는 동안 주변에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이따금 어머니에게 전화해 날짜 같은 걸 확인하거나 특정 사건을 책에 넣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았다. 고맙게도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해석의 차이를 처리한 나의 방식이 누구에게나 좋은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어떤 인물의 의견이 나와 정반대인 경우에 한 번쯤 그의 의견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를 대변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진 않았다.
예를 들어 금발인 언니는 얼굴이 고운 할머니를 좋아했고 할머니도 언니를 편애했다. 할머니는 나의 갈색 머리를 두고 멕시코인처럼 보여 실패작이라고 구박했다. 그런 할머니를 나는 원고에서 드러내놓고 경멸했다.
하지만 언니가 할머니와 레이스를 뜨며 재롱을 부렸던 추억은 그대로 실었다. 또한 할머니가 오십 대에 암으로 죽어갔다는 사실도 썼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고 성격이 이상해질 만도 했다. 게다가 뇌에 자몽만 한 종양이 자랐으니 내가 본 건 할머니의 원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 책을 읽고 내가 할머니를 미워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독자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어렸으니 할머니가 ‘미웠을 수도 있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원고를 탈고하고 나서 어머니를 내 집으로 초대했다. 어머니는 뒷베란다에 앉아 원고를 읽었다. 어머니가 이따금 “난 정말 못된 년이었어”라며 우는 모습은 한편으로 나를 무너뜨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감을 주기도 했다(이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마침내 어머니는 “네가 이런 식으로 느꼈는지는 미처 몰랐구나”라고 말해 내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었다.
언니와는 콜로라도에서 만나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함께 둘러보았다. 우리는 그 여행을 아동학대 투어라고 불렀다. 내가 차를 몰고 옛날에 살았던 곳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세부 사항들을 확인하는 동안 언니는 원고를 읽었다. 언니가 원고를 게걸스럽게 읽어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한 거야?” 언니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내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 내용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전부 다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어머니도 그랬다.
그런데 책이 출간되기 몇 달 전 언니는 갑자기 토라져 나와 연락을 끊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책을 읽은 독자 모두가 언니를 영웅으로 여기리라 믿었다. 그렇게 된다면 언니도 마음을 풀겠지 싶었다. 그때 친한 작가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까발린 회고록에 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여 출간했다. 나는 왠지 외로웠다. 이렇게 소설로 위장할 수도 있다고, 어머니가 언니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다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나의 회고록은 정확한 내용이라고 극구 칭찬했다는 소릴 전해 들었다. 나중에 언니는 내 책을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팔았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다. 나의 회고록 덕분에 우리 가족이 오랜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괄괄하고 예쁜 칠순의 어머니에게 모르는 사람들이 청혼을 해왔다. 나오는 서평마다 언니가 용감하고 씩씩하다고 칭찬했다. 독자들은 술고래였던 우리 아빠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상이라며 내게 편지를 써 보냈다.
어차피 우리 가족에 관한 지저분한 사실들은 진작에 고향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안 좋은 일들을 죄다 공개하고 나니 가족 모두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50년 넘게 이어진 어머니의 거짓말을 함께 극복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 사인회를 열자 옛 남자 친구들, 소식이 끊겼던 사촌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까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와 언니가 자리를 함께한 그날이 비평가에게 받은 호평보다도 값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 나는 해묵은 수치심을 조금이나마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나는 회고록을 출간하기 전에 수십 명의 친구들, 정신과 의사들, 지인들에게 원고를 돌렸지만 그중 단 한 명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아마 내 글이 정확해서라기보다 내가 인복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다음은 내가 회고록을 쓸 때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원칙들이다.
○ 등장인물들에게 책에 나올 거라고 일찌감치 연락해서 그들이 공개하기를 꺼릴 수 있는 내용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여태까지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 아무리 그러고 싶더라도 작업 중간에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글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장 잘 다듬어진 상태의 원고를 보여줘야 한다.
○ 소설가 휴버트 셀비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제리 슈탈에게 말했듯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쓸 때에는 크나큰 사랑을 품고 쓴다”.
○ 앞의 원칙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절대로 타인의 감정이나 의도가 어떠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추측할 수는 있지만 독자에게 나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알린다. 늘 나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 누군가의 의견이 나와 정반대인 경우에는 한 번쯤 그 사람의 의견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를 대변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사람들을 전문 용어로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례한 처사이자 형편없는 글쓰기다. 나는 책에서 내 부모를 알코올 중독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보드카를 개수대에 버리는 장면을 넣었다. 이렇게 내가 정보를 받아들인 방식 그대로 독자에게도 보여 준다.
○ 친구들에게 가명을 고르게 한다.
○ 글을 쓸 때는 항상 나의 관점, 특히나 극단적이거나 엄격한 축에 속하는 관점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헤아리려 애쓴다. 생각이 바뀌면 바로 고친다.
○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민감한 내용이 들어간 원고를 보여줄 때는 그들이 읽는 동안 괴로워할 수 있으므로 곁에 있어 준다. 내내 옆에 붙어 있지는 않더라도 같은 집이나 같은 동네에 머문다.
○ 누군가가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실은 빼버린다. 그런데 우리 가족의 경우 내가 첫 번째 회고록을 쓰기 전에 이미 모든 지저분한 사실들을 내게 털어놓은 지 오래였다.
○ 작가의 관점이 다분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린다. 이것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여러 등장인물을 존중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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