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출간해도 될 만큼 잘 다듬어진 글을 쓰는 것을 성공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아는 제대로 된 작가들은 모두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작가들은 퇴고를 통해 좋은 작품을 얻곤 한다. 윌리엄 예이츠가 마구 고쳐놓은 자필 원고나 에즈라 파운드가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칼로 쳐내듯이 편집한 것을 생각해보라. 과감하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훌륭한 작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 많은 작가에게 조언을 구해왔는데, 그들이 한결같이 언급하는 세 가지 진실이 있다.
첫째, 글쓰기는 고통스럽다. 초심자, 젊은이, 글의 질에 신경 쓰지 않는 글쟁이나 글쓰기를 ‘재미있어’ 한다.
둘째, 간혹 운이 좋을 때만 빼고 좋은 작품은 퇴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셋째, 퇴고를 잘하는 작가들은 현대 이전의 문학 작품도 열심히 읽는다. 그러면 역사적 감각을 기를 수 있고 글의 질을 따지는 기준이 높아진다.
많은 독자가 옛날 말씨로 적힌 작품을 읽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어렸을 때 오래된 작품을 싫어해서 코를 막고 냄새가 고약한 대구 기름을 얼른 삼키듯이 억지로 읽어버리곤 했다. 죄다 부유한 백인 남성의 작품이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현대에 쓰인 작품들을 먼저 읽고 차츰 더 옛날 작품들을 읽었다.
프랭크 콘로이를 읽는 데 딱 한 세대 전인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언급되었다. 그레이브스는 새뮤얼 존슨을 언급했다. 그래서 존슨의 전기를 그의 저작보다 먼저 읽었다. 엘리엇은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발레리와 샤를 보들레르를 언급했다. 내가 우러러보는 동시대 작가의 작품에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문인들의 전기도 열심히 읽었다. 월터 잭슨 베이트가 쓴 존 키츠와 새뮤얼 콜리지의 전기, 이니드 스타키가 쓴 샤를 보들레르와 아르튀르 랭보의 전기, 다이앤 미들브룩이 쓴 앤 섹스턴의 전기, 이언 해밀턴이 쓴 로버트 로웰의 전기, 폴 마리아니가 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전기 등등. 작가가 살아간 시대를 파악하면 시대의 맥락에서 작가의 문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가의 글에 반영된 문학적 경향이나 유행, 시대의 가치를 살펴보는 것 말이다.
여러 시대의 작품을 읽으면 시장이 요구하는 품질보다 더 높은 기준을 세울 수 있다. 동시대 잡지에 푹 빠질 수도 있고, 모든 시대의 작품에 푹 빠질 수도 있다. 여러 시대의 작품을 읽는 일은 어렵지만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선별된 작품이기에 더 훌륭하다.
물론 이른바 고전 목록에는 제 나름대로의 흠이 있고 최근에야 조금씩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살아남은 작품들은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전 작품과 9・11 테러를 다룬 책처럼 최신 경향이나 유행에 편승한 현대 작품을 한번 비교해보라. 역사에 길이 남을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가지면 불공정하고 어리석은 시장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시장에는 사기꾼과 돌팔이가 넘쳐난다.
퇴고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판적 자아를 길러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진다. 내가 가르치는 3년짜리 문예창작 석사과정에는 자신이 쓴 단어 하나하나를 방어하는 학생들이 있다. 제대로 공부한 학생들은 2년차 중반에 접어들면 자신의 글을 보며 절망에 빠진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능력보다 기준이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과 머릿속에 있는 관념이 서로 격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예전처럼 요령을 부릴 수 없다. 이제는 그런 속셈이 빤히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의식은 곧 무거운 짐이 된다. 큼지막하고 불편한 갑옷을 입고 춤을 추려 하는 것처럼. 그런데 3년째가 되면 대다수가 근육을 키워 갑옷을 입고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자의식은 단순히 자기인식이 된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글을 퇴고하는 행위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대신에 그들의 아방가르드한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이지 않았다고 몰아간다(예전에 전위 예술이었던 아방가르드는 지금 와서는 별로 전위적이지 않지만).
그들을 곤경에서 구해줄 비밀의 열쇠는 퇴고다. 더구나 자신의 능력보다 높은 품질 기준을 지니고 있으면 추구할 목표가 생긴다. 사실 모든 작가에게는 두 가지 자아가 필요하다. 글을 생산하는 자아와 편집하는 자아가 그것이다.
글을 쓰는 자아는 초반에 글자 하나하나를 쾌활하게 써나간다. 한두 달이 지나면 성실하고 낙관적으로 200쪽을 생산해낸다. 그러면 편집하는 자아가 나타나 원고를 들춰 보고는 말한다. ‘그래 좋아, 하지만…….’ 편집하는 자아는 200쪽을 30쪽으로 줄인다.
무조건 잘라낸다는 뜻이 아니다. 적은 분량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게 핵심만 남기는 것이다. 편집하는 자아는 독자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글을 읽었을 때 강렬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한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드는 불평과 의심, 의문을 선뜻 잠재우지 못한다.
내 경우에는 글을 생산하는 자아를 발동시키는 단계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좋은 문장이 거의 나오지 않더라도 굳은 의지로 볼품없는 문장들을 종이에 죽죽 휘갈기곤 한다. 일단 몇 개의 장면을 글로 옮겨 놓는 게 관건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길들을 들쑤시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리트》를 쓸 때 나는 한 2년 동안은 캘리포니아, 멕시코, 영국에서 보낸 시간과 몇몇 옛 남자 친구들에 대해 썼다. 그러다가 수백 쪽에 이르는 그 이야기들에 감정적 깊이와 진중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을 퍼마시며 시간을 소모하던 시절, 가볍고 편안하고 활기찼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였다. 겉보기에 화려하지 않아 에피소드를 끌어내기 어려운, 고뇌에 시달리던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다 그 이야기들은 어머니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사실 그때 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더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꼭 써야 했던 것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글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들과 화해하지 않고는 내 아이들에게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처음에 썼다가 빼버린 분량도 꼭 필요한 내용이었다. 최종 여행 일정에서 제외하기 위해 반드시 답사해야 했던 장소 같은 것이었다.
써놓은 것 없이 1쪽부터 쓰기 시작할 때는 뭐라도 짜내도록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 그 내용이 나중에 최종 원고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뭔가를 쓸 때마다 다음 목표 장소로 가기 전에 들러야 하는 곳에 다녀온다. 그러다 보면 우왕좌왕할지도 모른다. 우울할 때도 있겠지만 꾸준히 억지로라도 써나가야 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한 사소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성장시킨 뚜렷하고 진실한 기억 속에 자리 잡으려 애써보자.
그러한 노력이 효과가 있을 때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다. 과거의 세계가 분명해진다기보다는 과거의 내가 되살아나는 경험이다. 내가 무엇을 느꼈고, 어떤 계획을 세웠고, 누구에게 거짓말했는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보통 처음에는 상투적인 문장만 나열하게 된다. 단숨에 멋진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편집하는 자아가 나타나 원고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각 장면의 진실을 건져 올리면 좀 더 진전이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주로 일반적인 관념을 육체적인 혹은 극적인 이야기로 나타내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심해본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게 확실한가? 그 사람이라면 다르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육체적인 언어를 활용하다 보면 과거의 공간에서 내 몸이 움직이는 모습을 자주 묘사하게 된다. 그러는 내내 나는 스스로 물어본다. 이 내용이 진짜 중요한가? 멋지고 똑똑해 보이려고 쓰는 건 아닌가?
나는 원고를 다듬는 작업의 마지막 20퍼센트에 내 노력의 95퍼센트를 기울이곤 한다. 전부 퇴고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발표한 모든 책은 단 한 쪽도 초고와 비슷하지 않다. 시 한 편을 60가지 버전으로 다시 쓰기도 했다. 나는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고집스럽고 묵묵하게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다.
퇴고를 할 때는 장기적으로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는 편이 좋다. 그러면 글을 많이 고쳤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퇴고 과정은 독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작가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는 수단임을 명심하자. 글이 좋은지 나쁜지, 출간에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호평을 받는지 혹평을 받는지 이러한 결과와 관계없이 글을 쓴다는 건 추악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기리는 일이다. 그러려면 늘어지고 어수선한 부분을 다시 쓰거나 잘라내면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글을 써내야 한다.
너무 높아서 절대 다다를 수 없을 정도로 기준을 높게 설정하면 자기 자신이 조금 불쌍하기는 해도 묘하게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셰익스피어를 기준으로 삼으면, 적어도 지저분하고 변덕스러운 출판 시장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상하게도 작업이 잘될 때 쓰는 글은 더 이상 나에 대한 글이 아니다. 설령 회고록을 쓸 때도 그렇다.
글쓰기의 퇴고 과정은 다른 예술의 경우보다 안전하다. 예를 들어 회화에서는 가장 좋은 상태에서 덧칠을 하는 바람에 작품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은 수정할 수가 없다. 이에 반해 작가는 언제든지 이전에 썼던 원고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자존심을 지키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작업하고 있는 글을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시도해보는 편이 낫다.
지루한 부분을 쳐내는 방법을 배우도록 해라. 요즘에는 아무리 작은 동네에서도 온오프라인 카페나 지역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교실을 운영한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글재주가 아주 출중하지 않더라도 잠재적 독자 역할을 해준다.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머릿속의 작은 방보다는 그들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G. H. 하디G. H. Hardy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A Mathematician’s Apology》(세시, 2011)은 훌륭한 회고록이다. 말년에 접어든 하디는 자신의 수학 연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깊은 교감을 나누는 상대 없이 공부만 한 사람이고, 일요일이면 크리켓 경기를 관람하는 영국의 독신 남자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 C. P. 스노가 병원에 찾아왔다. 하디는 치사량에 가까운 약물 과다 복용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암울하게 자조하고 있었다. 하디의 회고록에 들어간 스노의 서문을 읽으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가 한쪽 눈에 멍이 든 모습은 희극적이었다. 약을 토하다가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다. (……) 나는 냉소 놀이에 참여해야 했다. 그때만큼 냉소할 기분이 아닌 적도 없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탁월하게 실패한 자살 사례들을 이야기했다. 지난 전쟁에서 독일 장교들은 어떻게 했던가?
하디는 계속 살기로 했다. 스노는 이렇게 썼다. “하디의 엄중한 지적금욕주의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몸이 약해졌고, 쇠약한 노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하디의 생존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때로 작업이 잘 안 되어 낙담하거나 악마 같은 자기연민이 삶의 저편에서 나를 유혹할 때면(‘네 작품은 정말 볼품없어. 이 위선자!’), 나는 하디의 짧은 책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지루한 줄만 알았던 수학 책이었지만, 수학에 대한 하디의 열정은 전염성이 강했다.
하디는 책의 마지막에 뭔가를 창조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잔인하지만 왠지 모르게 희망적인 자신의 신조를 적어놓았다.
나는 ‘유용한’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내가 발견한 모든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좋든 나쁘든 이 세상에 아무런 실용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미칠 일이 없을 것이다. (……) 어떤 실용적 잣대로 가늠해보아도 내 수학 연구의 가치는 제로이고, 수학 이외의 내 삶의 가치도 어차피 하찮다. (……) 나는 인류의 지식에 내 몫을 조금 보탰고 다른 사람들도 보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우리가 보탠 것의 가치는 뛰어난 수학자들이 창조한 이론 또는 위대하든 보잘것없든 뭔가 기억할 만한 것을 남긴 예술가들이 창조한 것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이 글을 나눠주곤 한다. 뭔가를 창조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시장에서 성공하든 못하든 누구나 거장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우리 모두 같은 무대에 서 있고 우리의 노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펜을 드는 순간 우리는 호메로스와 토니 모리슨과 물소를 그린 동굴 화가들을 포함해,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작가들의 역사의 일부가 된다. 연예인들의 전성시대인 오늘날 작가를 우러러보는 태도는 식상해졌다. 학계마저 작가는 죽었다고 부르짖는 판이니. 문단의 시상식에 가보면 작가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소박한 사람들 같다. 내성적인 바보들이 블라우스에 음식이나 흘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작가들을 존경한다. 고단한 삶 속에서 길이 남을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거장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작가들도 진심으로 존경한다. 지독하게 엉망인 개인의 삶에서 진실을 끌어내려 애쓴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작가가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덕분에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덜 외롭다. 뭔가 해보려고 애쓴 고귀한 몸부림이 감동적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실패한 수학자(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소심한 하디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하디는 아인슈타인이나 뉴턴만큼 중요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나는 그의 수학적 업적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소한지 아닌지 가늠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가 대단찮게 여겼던 그의 작은 책은 지금도 계속 출간되고 있고, 내가 아는 한 수학자가 쓴 회고록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회고록을 읽을 때마다 요정이 내 몸에 마법 가루를 뿌려주는 기분이다.
아무도 각자의 인생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지 못한다. 저마다 묵묵히 쓰는 글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보탬이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쓴 글은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키면서 세상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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