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싱글맘의 생활력 매뉴얼 시리즈
ENFP에 ADHD 기질까지,
나는 타고난 서류 젬병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페이퍼워크만 나오면 머리가 하얘졌다.
업무상 실수도 많았고, 조직 적응도 오래 걸렸다.
그런데 차상위 싱글맘이 되고 나니, 이건 선택이 아니었다.
한부모 지원신청서, 차상위 증명서, 급식카드 신청서, 양육비 이행확보 신청서… 그리고 그때마다 필요한 첨부서류들.
기본증명서(상세), 가족관계증명서(상세), 주민등록등본, 혼인관계증명서(상세), 소득금액증명원, 재산세 과세증명서, 건강보험료 납부확인서…
이 모든 걸 발급받고, PDF로 만들고, 합치고, 나누고, 개인정보 동의서에 사인하고, 스캔하고, 모바일팩스로 보내고 받고.
**"교사니까 이런 일 쉽겠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마다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 로드가 있다. 내 뇌는 창의적인 일에는 번뜩이지만, 정확성이 생명인 서류 작업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승무원 시절에는 SAFETY 매뉴얼을 달달 외우고, 외항사에서 영어 시험도 척척 통과했었는데,
왜 서류만 나오면 이렇게 막막한 건지.
내 뇌는 암기와 창의적인 일에는 번뜩이지만,
이런 자잘하고 정확성이 생명인 행정 서류 작업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미쳐버릴 것 같을 때마다 나를 붙든 건, 성경 구절 하나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ADHD든 뭐든, 나는 할 수 있다.
해야 하니까,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중얼중얼 혼잣말하며 서류더미와 씨름했다.
아이들 기본증명서를 뗄 때마다,
대문짝만 하게 인쇄된 문구가 있다.
"화해권고 결정으로 양육권·친권자 지정: 어머니 ○○○"
그 글씨를 볼 때마다 정신이 확 든다.
그래, 이게 현실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더한 공부도 해봤는데 (사실 대학 다닐 때 지독히 싫어하던 전공과목도 있었거든ㅎㅎ), 이 정도 서류에 무너져서는 안 되지.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시스템이 생겼다.
✓ 서류 보관함 만들기
클리어파일에 종류별로 정리
유효기간 스티커 붙이기 (3개월짜리는 빨간색, 6개월짜리는 파란색)
✓ 디지털 백업의 신
모든 서류를 PDF로 변환해서 구글드라이브 저장
파일명: "241215_기본증명서_첫째" 이런 식으로 통일
✓ 담당자와 친해지기
주민센터, 교육청, 구청 담당자 연락처 저장
"안녕하세요,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의외로 친절하게 도와준다
✓ 온라인 신청 마스터하기
정부24, 홈택스, 건강보험공단 사이트 즐겨찾기
아이 주민번호까지 외워버렸다 (이건 좀 슬프지만)
05. 무적의 골든레이디가 되는 순간
한 고비 한 고비 넘기다 보니, 어느새 나는 서류계의 고수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다른 싱글맘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 양육비 이행확보 신청 어떻게 해요?"
"한부모 지원받으려면 뭐가 필요해요?"
그럴 때마다 뿌듯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혼자 터득한 이 모든 노하우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부부라면 둘이서 나눠 했을 일을 혼자 다 해내고 있는 나.
정말로, 아무도 필요 없이 혼자 척척 다 해내는 파워 원더우먼이 된 기분이다.
06. 깨달음
서류와의 전쟁에서 배운 건 이거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시작도 못 한다.
일단 시작하고, 틀려도 다시 하면 된다.
담당자들도 사람이다.
솔직하게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도와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가 있으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서류와의 전쟁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약점을 한계로 받아들이지만,
그 약점이 오히려 새로운 길을 여는 열쇠가 될 때가 있다. ADHD로 산만했던 뇌가 이제는 동시에 여러 서류를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의 달인이 되었고, 완벽주의에 발목 잡혔던 성격이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용기로 바뀌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약한 곳에서 가장 강해지고, 가장 서툰 영역에서 가장 능숙해진다.
서류 더미 앞에서 무너졌던 그 순간들이, 지금의 무적 골든레이디를 만들어낸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서류와의 전쟁은 끝났다. 이제 나는, 종이 위의 승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