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함께 걷는 엄마의 기록
사람 마음에는 이상한 시계가 하나씩 달려 있다.
언제 멈출지, 언제 다시 뛸지 모르는 시계.
나에게 그 시계의 첫 멈춤은 2002년 5월, 월드컵을 앞두고 초여름 무더위가 기승이던 때였다.
그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열알홉의 나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깊고 넓었고, 그 상실감은 오랫동안 내 삶의 배경음처럼 깔려 있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또 한 번의 시계 멈춤이 찾아왔다.
쌍둥이 언니의 죽음.
엄마를 잃었을 때보다도 더 깊고 날카로운 슬픔이었다. 두 번의 큰 상실은 내 마음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서서히 알게 됐다. 상실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더 큰 폭풍을 견디도록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 두 사람의 부재는, 훗날 내가 싱글맘이 되었을 때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싱글맘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와 현실은 때로 숨이 막히고,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었다. 그 경험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했다.
물론 처음부터 담대한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다.
내가 법원에서 재판이혼 판결문을 받아들었을 때, 친권과 양육권 모두를 나 혼자 가져오겠다고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건 오히려 전남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라고까지 했다.
나도 불안했다. 1년 뒤, 2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gut feeling’—그리고 기도 속에서 받은 영적인 감각—을 믿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록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되었다.
재판 과정은 길고 지쳤다.
그는 출석을 미루고, 가사조사에도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학교 교사인 나는 학기 중에 연가를 내거나 외출계를 써서 법원에 나가야 했고, 담임 업무와 재판을 병행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결국 나는 판사에게 사정사정했다. 빨리 종결짓고 싶었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부부인 상태에서는 ‘한부모’ 지위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육비를 주지 않았지만, 서류상 부부라는 이유로 나는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유책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조정으로 빨리 마무리하는 선택을 했다.
이혼 전부터 아이들 아빠는 양육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에, 이혼 후의 삶은 그 연장이었다.
새벽같이 출근하는 나는 세 아이의 아침을 직접 챙기지 못했고, 대신 김진숙 선생님이라는 좋은 돌봄 선생님을 만났다.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뒤치다꺼리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고등학교 특성상 야자 감독을 하거나 늦게 귀가하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나를 못 보고 지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 사진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고, 그 모습이 마음 한쪽을 쓰리게 했다.
싱글맘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다.
아이들의 사춘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미 무너지고 부서진 심장이 다시 조립되어 뛰기 시작했던 그 순간, 세상은 더 이상 나를 쉽게 흔들 수 없는 단단함을 내 안에 심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단단함은 먼저,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깊은 고민 속에 있다면 전하고 싶다.
“인생은 자주 무너집니다.
그러나 무너진 자리마다 단단함이 자랍니다.
그 단단함이, 당신의 내일을 지켜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