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싱글맘의 용기수집 시리즈 — 두려움을 딛고 일어선 순간들
"이거 어떻게 생각해?"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습관처럼 던지던 그 질문들이
이제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몸 곳곳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이유 없는 고열, 끝없이 몰려오는 피로, 감기처럼 시작했지만 감기가 아닌 증상.
근무 중에도 버티지 못해 병외출을 냈고,
근처 병원에서 수액을 두어 번 맞고 돌아왔지만 차도는 없었다.
졸음은 쏟아지고, 몸은 처지고,
입맛이 사라져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니 체중은 일주일 새 급격히 빠져나갔다.
금요일 저녁. 퇴근해 돌아온 나는 평소 같으면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 잔소리를 하고 저녁을 차리느라 분주했을 텐데,
그날은 기어들 듯 안방 이불속으로 들어가 첫째에게 모기 같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항히스타민제… 좀 사다 줄래?"
온몸은 발적과 부종으로 뒤덮였고 고열에 휘청거려
옷조차 입기 어려웠다.
다엘이가 약을 사 들고 들어오자 나는 반색하며
두 알을 꿀꺽 삼켰지만 직감했다.
아, 이건 단순 알러지가 아니다.
새벽 두 시, 세 시. 나는 세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낯선 구토, 오심, 타는 듯한 발진과 고열,
온몸을 가누기 힘든 피로감. 난생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날을 꼬박 새우고 토요일 아침,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고 티비를 켜준 뒤 나는 수건과 칫솔을 챙겼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응급실에 가는 순간, 입원은 피할 수 없으리라는 걸.
짐을 싸다 말고 결국 폭풍 오열이 터졌다.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 그렇게 아파?"
둘째 루비는 울먹이며 내 곁에 주저앉았지만
그 위로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눈물 범벅된 얼굴로
대형병원을 향해 달렸다.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붙들며, 머릿속 CPU는 풀가동 상태였다.
삼 남매는 어떡하지?
학교 수업은, 담임업무는?
땜빵은 누가 하지?
이걸 모성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책임감이라 해야 할까.
응급실. 접수하고, 증상을 설명하고,
스스로 두 발로 걸어 베드에 눕기까지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어떡하지?" 묻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모든 시나리오를 그려낸 뒤,
결론이 난 시점에서야 연락해야 할 곳,
부탁해야 할 곳, 통보해야 할 곳을 차례로 정리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담대함이 아니었다.
더 이상 사람에게만, 누군가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날들이 쌓이고 쌓여
내 몸에 각인된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그날, 배우자도 보호자도 없이 스스로 응급실을 걸어 들어간 순간.
피검사 결과, 내 간수치는 1000을 넘어 있었고
간염바이러스 DNA 카피 수는 수억 단위를 치솟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도 이상치 않을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나는 이혼 이후에 철저히 알게 되었다.
누군가와 상의하기보다 내 직감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싱글맘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건강한 방식이 돼야 한다는 것을.
사회가 원하는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
또 아이들에게는 든든한 엄마이자 한 집의 가장으로
모든 것을 온전한 성인으로서 책임진다는 것을 실천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도전과제.
결국 내 모든 상황의 해결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나.
그리고 그 열쇠를 돌려 문제를 타개해 갈 용기도,
그 용기를 발휘할 주체도 나 자신이라는 것을.
특별히 아이들이 아프거나 곤란한 상황을 겪을 때는
당연히 우왕좌왕하기 마련이었다.
선배 엄마들에게 묻고,
주변 어른들의 조언을 참고하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엔 '정답'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나의 선험적 경험, 직관, 담력—그것으로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삶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종국엔 깨닫게 되었다.
셋이 동시에 아파서 코로나 락다운 상황에서
함께 격리되었던 일주일, 내가 발휘했던 기지들.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던 해, 밑의
두 미취학 아동들의 어린이집 픽드랍을 홀로 책임졌던 이혼 1년 차의
전쟁 같은 나날들.
아이 셋을 데리고 호기롭게 외식을 나갔다가
시킨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애들을 데리고 화장실로 사라져야 했던 해프닝을 겪으며
나는 기저귀를 갈러, 대변 처리를 하러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던 그시절을 다 지났다.
그 결정 하나하나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만약 매 순간마다 누군가에게 묻고 의존했다면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냉정하게 응급실로 향하며
앞으로의 절차를 계획하고,
차분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마당에 강조하고 싶은 한마디는
나는 뼛속까지 엥뿌삐,
결정과 결단과 아주 거리가 먼 기질의 아줌마란 사실)
그래서 이제는 맘카페에 과하게 의존하지 않는다.
엄마들 단톡방에 모든 걸 의논하지도 않는다.
힘들다며 교회 언니, 권사님, 장로님께 기도 제목을 조르듯 내 맡기는 일도
아주 많이 줄어들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고요한 가운데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고,
그 목소리를 믿고 움직이는 것이 진짜 용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위대한 카운슬러는,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바로 '나 자신'.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목소리를 따라 세 아이와 함께 흔들리지 않고 걸어간다.
두려움은 여전히 내 곁을 맴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내 안의 목소리를 신뢰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내 가장 위대한 카운슬러는 언제나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