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싱글맘의 꿈 보관함 시리즈 ㅡ상처 위에 다시 심은 꿈의 씨앗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은…
사실 내 차 안이다.
아이들 학원 앞에 세워둔 차,
마트 주차장,
아니면 그냥 아무 데나 멈춰 있는 그 차.
거기는 내 사무실이자 휴게소,
상담실이자 기도원이다.
운전석은 책상이 되고,
대시보드 위에는 서류 대신 과자 봉지가 굴러다니며,
컵홀더에는 커피 대신 미지근한 보리차가 꽂혀 있다.
조수석은 이미
쇼핑백과 빨래 가방에게 양도한지 오래이다。
드라이브스루에서 커피를 받아들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CEO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든다.
마트 주차장에 앉아 있으면
괜히 나만의 리조트에 와 있는 기분이다.
다만 풍경이 카트 끄는
사람들뿐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어쩌다 보니 내 인생의 가장 생산적인 순간이
차 안에서 일어난다.
"엄마 어디 있어?"라는 전화를 받으며
"응, 회사야" 대신
"응, 주차장이야"라고 답해야 하는 건
웃픈 일이지만,
그 몇 분의 고요가
다시 엄마로 돌아가게 하는 충전이 된다.
그리고 가끔,
나는 아이들에게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오늘은 엄마라는 말 쓰지 마.
오늘은 엄마라고 부르지 마!"
아이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김지은? 지은 씨?
아니면… 회장님?"
막내는 갑자기 진지하게 외친다.
" 옴마。。 옴마 옴마 금지! 만세!"
문제는 내가 선언할 때마다
아이들끼리 새로운 별칭을 만들어낸다는 거다.
"오늘부터 엄마는 김지은 선생님!"
"아니야, 그냥 지은 씨라고 해."
결국 하루 종일 듣는 건
"지은 씨, 물 좀!"
"지은 씨, 밥 줘요!"
이런 기묘한 호출음이다.
솔직히 '엄마'라는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길거리에서 남의 애가 "엄마!" 하고 불러도
반사적으로 돌아볼 정도니 말 다 했다.
방학이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엄마 물! 엄마 밥! 엄마 리모컨! 엄마 풀!
엄마, 엄마, 엄마…."
마치 잔소리 합창단의 합주곡을
매일 라이브로 듣는 기분이다.
그러다 결국, 나도 모르게 폭발한다.
"엄마 금지!
오늘부로 엄마라고 부르면
쫓아낼꺼야”
아이들은 잠시 움찔하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살며 배운 기류의 변화를 읽는 노하우로
이제 다 알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엄마를 방해하면,
평소엔 착한 엄마가
마귀할멈으로 빙의해
"누가 나를 불렀느냐아아아―!!"
하고 빽빽 소리를 지른다는 것을.
엄마금지가 선포되면
비로소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열린다.
쿠팡 로켓배송으로
시킨 입욕제를 풀어놓고 반신욕을 하거나,
네일팁을 붙이고,
미뤄둔 마스크팩을 붙이고,
짧은 낮잠을 자는 식이다.
아이들도 그제야 각자 할 일을 한다.
마치 집 안에
평화 협정 체결일이라도 찾아온 듯이.
차 안에서의 고요,
엄마금지의 시간.
이 작은 일탈들이 모여 나를 버티게 한다.
그 덕분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
'엄마'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엄마로만 살아서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잠시라도 내 이름을 가질 때,
비로소 나는
'엄마로서의 나'를 지켜낼 힘을 얻는다는 걸.
그건 내가 학교 교사로 불리는
‘선생님’ 이란 호칭도 아니고
어느 교회 출석하는
‘집사님’ 이란 신분도 아니다。
오직 김지은 자신이 되는 5분여。。
그리고 그 5분의 휴식이
때론
24시간의 엄마를 가능하게 한다。
차 안에서 미지근한 보리차를 마시며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언젠가 아이들이 다 커서
더 이상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냥 5분만 더,
나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엄마 말고… 그냥 지은 씨로 살아도 되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