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70만 원짜리 영웅이 되었다

— 엄마는 가끔 비싼 선택을 한다

by 다루오

싱글맘이 벌인 아이 셋과 오사카 여행기

제5화 70만원 짜리 영웅이 되었다

엄마는 가끔 비싼 선택을 한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방전된 건 나뿐이었다.

아이들의 시계는 아직 낮이었고,

나의 시계는 이미 심야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온천에서 봤던 것들을 재연하며

역할놀이를 시작했다.


유카타 흉내,

노천탕 흉내,

"엄마 여기 따뜻해!"라는 대사까지.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12년 만의 해외, 3일 차.

43세 아줌마의 체력은 생각보다 정직했다.


잠깐 눈을 붙였을까, 루비가 나를 깨웠다.


"엄마, 배고파."

그래. 엄마는 쓰러져도 일어나는 존재다.


신사이바시에서 도톤보리까지는 멀지 않았다.

어른 걸음으로 10~15분.

택시를 타기엔 애매했고,

지하철은 계단이 문제였다.


"걸어가자."


내 기준의 10분은, 아이들 기준에선 원정이었다.

밤의 도톤보리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취기 어린 웃음,

기름 냄새와 술 냄새가 섞인 끈적한 공기.

혼자였다면 꽤 재미있었을 풍경이다.


하지만 아이 셋을 데리고 걷는 엄마에게

이 모든 풍경은

그저 '위험 요소 분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어디가 안전한지, 어디가 관광객용 바가지인지,

이 복잡한 거리에서 아이 손을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싱글맘의 뇌는 여행 중에도 항시 경계 모드다.


� [사진 1 위치: 도톤보리 야경 (네온사인, 구리코상, 거리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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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톤보리 강가의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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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늠의 글리코상인지 구리코상인지 >ㅁ< ㅎㅎ

호객 행위가 거의 없던 거리에서

유일하게 한 여성이 웃으며 손짓했다.


"Travel Advisor 1위!"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징징거렸고,

나는 피곤했으며,

판단력은 이미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 상태였다.


'1위라면 괜찮겠지.'


전직 승무원이

저 뻔한 한 문장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코미디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지쳐

너덜거리고 있었다.


안내받은 곳은 와규집이었다.

'그래, 일본까지 왔는데

와규 한 번은 먹어야지.'

메뉴판을 펼쳤다.


와규 스테이크 세트 35,000엔.


피곤에 찌든 뇌는 0의 개수를 마음대로 지우고

숫자를 자동으로 '원'으로 바꿨다.


'3만 5천 원? 괜찮네.'

아니다. 그게 아니다.

35,000엔은

3만 5천 원이 아니라 35만 원이다.

그때의 나의 뇌는

아웃 오브 인지..

인지를 전혀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엄마 빨리!"를 외치고 있었고,

나에게는 환율 계산기를 꺼낼

이성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 주세요. 이것도요."


일단 먹고보자 금강산도 식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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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메뉴판이 무엇인지 너희가 정녕 알고 있느냐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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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 ㅎㅎ 웨이츄레스 언니가 너무 친절하게 찍어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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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무 맛있게 먹어주어 고마웠엉 생애 첫 와규 스테이크


아이들은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아!"

"엄마, 피가 똑똑 떨어져!"

"야 원래 소고기는 바짝 굽는 게 아니야!"

"그래도 이븐해야지 이븐.."


참나..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안성재 쉐프라도 된건지

미슐랭 쓰리스타 미식 평가단이라도 된건지

어찌나 진지한 미식 평론을 쏟아 내던지


시끌벅적한

식사가 끝나고 계산서가 나왔다.

70,000엔.


'아, 좀 나왔네.'


호기롭게 카드를 냈다.

그리고 띠링,

울리는 승인 문자.[해외승인 7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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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시 봤다. 700,000원.


눈이 아니라 인생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나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70만 원.

5개월 할부로만 따져도 한 달에 14만 원.


이건 학원비도 아니고, 비행기 값도 아니고,

그냥… 뱃속으로 사라진 와규다.


피로감으로 숫자 단위 하나를

잘못 파악한 엄마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어이 없는 숫자..


ㅎㅎㅎㅎ


결국 돌아가는 길에

타야지 마음먹었던

택시는 오르지 못했다.


난바에서 신사이바시까지

무거운 다리를

우리 넷은 기어코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며 길바닥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지만

환상적이었던 와규의 맛을

계속 해서 재잘대며

썩어 가는 엄마의 지갑사정은 무시한채

다음날 어딜 갈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무계획으로 온 여행에 대한

하나님의 테스트인가.

환율 공부 제대로 안 하고 온 자의 최후인가.

할랄푸드를 먹어서 그런가.


사람은 극도로 당황하면

신학도, 환율도 다 끌어다 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그 집은 할랄푸드 전문점이었다.

무슬림들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그래서 별점이 높았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 터무니 없이 비쌌을 것이다.


물론 비싼 만큼 고기의 질은

훌륭했고, 맛은 최고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그날의 와규를 이야기 꺼낼 만큼 말이다.


"엄마, 그때 그 고기 기억나?"

"이번 여행에서 그게 제일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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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움 레어로 벌겋게 피가 똑똑 떨어지던 잊을수 없던 그 와규


나는 환율을 계산하지 못했고,

전직 승무원의 알량한 자존심은 호객 행위에 넘어갔으며,

극단적 P 성향의 엄마는 즉흥을 질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최고급 와규를 선사할 수 있게 되었고

70만 원짜리 실수를 범하게 된 것.


묘하게도 완전히 후회되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계산된 여행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에게 완벽하게 기억에 남는 밤을

선사했던 추억의 와규.


도톤보리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엄마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하고

합리적인 지출만 하는

신사임당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종종, 아주 멋진 히로인이 된다.


70만 원짜리 영웅.


그 정도면 이번 오사카,

충분히 비싼 선택으로 영웅이 되기에 충분한 밤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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